남 작가의 두 번째 수필집 <모서리의 변명>을 감명 깊게 읽었다. 나에게도 각인된 모서리에 관한 생각과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반추되었다.
생활과 유리될 수 없는 집 안과 가구 곳곳에 모서리가 도사리고 있다. 어릴 때 무심코 벌컥 방문을 열다가 마루와 문 모서리에 발이 끼어 고래고래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있다. 어른들은 부주의만 탓할 뿐 아무도 역성을 들어주지 않았다. 눈만 뜨면 방문을 여닫는 것이 일상이라 한 번쯤 당해봐야 조심한다는 뜻인가 싶다. 내가 가정을 이뤄 아이 셋이 자라는 동안 침대를 비롯한 가구에 모두 모서리가 있었지만 분잡스럽지 않아 부딪친 적이 없다 보니 모서리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했다.
첫 손자를 보자, 옹알이를 하고 아장아장 걷는 작은 생명이 자지러질 정도로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어린 녀석이 어쩌다 식탁 모서리에 부딪혀 이마에 멍이 들었다. 우는 얼굴이 너무 애처로워 안절부절못했다. 식탁 모서리가 원망스러웠다. 부리나케 가구점에 달려갔으나 모서리가 없는 식탁은 없었다. 특별 제작을 주문하면 꽤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포기하고 돌아왔다.
손주들이 온다는 기별이 오면 가구 모서리마다 수건을 두르고 테이프로 감았다. 부딪혀도 안전하도록 만들다. 모서리마다 너덜너덜 지저분했지만, 손주들에 대한 할아버지의 배려를 본 며느리는 깜짝 놀랐다. 나중에는 침대 프레임의 모서리가 싫어 매트리스형으로 바꾼 것을 비롯하여 다른 가구도 모서리가 완만한 스타일로 모두 바꿨다. 할아버지 정성과 사랑에 감동했는지 며느리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막내 손녀는 애교를 부렸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종일 울 거야.” 어린것들이 며칠간 분탕을 치다 가고 나면 솔직히 후련했다. 손주들은 올 때 반갑고 갈 때 더 반갑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손자가 결혼하여 증손자가 와도 이제 걱정을 접을 것 같다. 위험 요소가 줄어드니 이제는 증손자를 보고 싶다. ‘노나라를 얻고 나니 촉나라까지 갖고 싶다.’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결혼 적령이 된 손자에게 넌지시 결혼을 권하자 손사래를 친다.
“아직 어린 손녀도 있는데 왠 증손자 타령이요?”
아내의 핀잔도 유쾌하게 들린다.
모서리는 사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말에도 모서리가 있다. 사물의 모서리로 생긴 상처와 통증은 일시적이고 치유되면 쉬 잊힌다. 말 모서리에 상처 입으면 아물지 않고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다. 말을 술술 잘하는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란 모서리가 나지 않고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이다. 말을 듣는 것이 말을 하는 것보다 한 수 위다.
고향 마을에 유달리 거친 말투로 욕을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 자식들에게도 걸핏하면 “에라이 빌어먹을 놈아.”하고 욕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자기 자식이 빌어먹는다면 거지가 되란 말이가? 자식에게 저런 악담을 왜 하노?”
거친 말만 모서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생각없이 예사롭게 한 말도 모서리를 만든다. 초등학교 5학년쯤 어머니의 사촌 여동생이 우리 집에 다니러 왔다. 내 앞니가 튀어나온 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언니야 저렇게 뻐드렁니가 나면 복이 없단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불쾌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하면 앞니를 보게 되고 기술을 배워 이를 뽑아버리면 새로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걸핏하면 어머니께 이모가 내 앞니 때문에 복이 없다는데 읍내 치과에 가서 이를 뽑아달라고 졸랐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치과 보철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거금을 들여 앞니를 조금 갈아버리고 보기 좋게 보철을 해주었다. 그 시절 중학생이 금니 보철을 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친구들이 볼 때마다 부러워했다. 복이 없다는 앞니로 인해 복이 굴러들어 오는 것 같았다. 말을 할 때도 앞니가 보이도록 윗입술을 위로 올리려 애를 썼다.
나이 들면서 치과에 가는 횟수가 잦았다. 다른 이는 충치와 풍치로 이를 뽑은 후 틀니로 교체했으나 관리가 번거로웠다. 상하 서른두 개의 영구치 중 서른 개는 임플란트와 보철이다. 몸의 내외부는 물론 발바닥까지 병원 치료를 받았다. 앞니 때문에 복이 없다는 말 모서리에 주눅이 들었던 두 앞니만 오기가 생겼는지 용케도 짝을 이뤄 무탈했고 아직도 건치로 남아 제 역할을 다한다.
상명하복의 군조직은 상급자의 명령과 하급자의 복종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상급자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적 언사로 욕설을 말마다 달고 인간적 모욕감을 준 선임병이 있었다. 그가 전역하여 귀향 때 아무도 나서서 환송하지 않았다. 쓸쓸히 부대를 떠나는 뒷모습이 처량했다. 남달리 폭력적 언사로 말 모서리를 만든 인과응보였다.
직장에서 상하 관계였다가 퇴직 후에 만났을 때, ‘내가 데리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사람을 보았다. 직장에서 같은 부서에 근무했을 뿐인데 데리고 있었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자기가 고용하여 급여를 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사람은 예사로 한 말이지만 당사자에게는 듣기 거북한 말 모서리였다.
살아오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어릴 때 들었던 ’뻐드렁니라 복이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보철하여 내 운명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날을 돌아보면, 보릿고개가 뭔지 모르고 자랐다. 검소한 삶으로 자식들을 고생시키지 않고 지금에 이른 걸 보면 다복하다고 생각하며 감사히 여긴다.
첫댓글
할아버지가 되는건어렵지않은데, 할아버지노릇하기는쉽지가않네요.
어른 노릇하기가 쉬운 구석이란 없답니다. 데이빗님은 예비 할아버지 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