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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家禮.
주자가례는 관(冠),혼(婚),상(喪),제(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의례서를 말한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선조시기에 송익필이 저술한다.
이외에도 구봉집,절개가 굳은 당나라시 고문(古文)을 즐겼다.
송익필은 예학의 대가이자 군사학의 대가였다.
정주학의 태극설 해석에 능통하였다.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로 동인 주리학파/이황학파와 철학이 똑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이황은 정이학을 신봉하였고,송익필은 정주학을 신봉하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구봉(龜峰)송익필(宋翼弼,1534년2월10일∼1599년8월8일)은 서인이라 주자학 개혁학파이자
근대식 개혁학파였던 주기학파(서경덕,기대승,이이,이항,성혼,박순,김인후 등 40여 명)와
친분관계는 유지하였으나 서로 간에 추구하는 사상철학은 전혀 달랐다.
송익필은 구봉집, 주자가례를 남긴 주자학 원리주의 학자로
그제자로 김장생,김집,김류,이귀(인조반정 주도),이서(신립의 아들 신경진과함께 인조 반정계획 수립),
신경진, 정엽, 송준길, 송시열 등이 있으며 양광도 서인 노론학파로 이어진다.
노론학파 영수 송시열 역시 예학의 대가였다.
예송논쟁으로 남인 윤휴학파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하여 사사시킨다.
송시열과 윤휴는 사돈관계였지만 추구하는 사상철학이 달라 윤휴가 죽게 된다.
1,2차 예송논쟁에서 인조의 왕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과 기간문제로 1차 전에서
윤휴가 3년상을 해야한다며 보수적인 주장을 하고, 2차 전에서는 송시열이 법으로 정한 1년상으로
진보적인 주장을 하다 화가 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한다.
서인 송시열은 주자학 원리주의자로 집권당 보수 세력이었으나 1차 예송논쟁에서 남인 윤휴학파에 패하자,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2차 전에서는 통크게 진보적으로 고쳐
1년상으로 법률로 정하고, 야당이었던 윤휴학파에게는 법률을 고친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예송논쟁에 돌입하기전 대비하였는데, 윤휴학파 허목 등이 사전정보를 입수하여 선수를 치고
1년 상을 주장하여 송시열이 다시 패하게 되자,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낙인찍어버린다.
노론학파 영수 송시열은 집권당 보수세력이었기 때문에 3년상을 주장해야 맞는데,
제1차 예송논쟁에서 이기려고 진보적인 1년상을 주장하고, 남인학파인 윤휴는 야당이라
진보적인 1년상을 주장해야 옳은데 윤휴도 이기려고 보수적인 원칙론으로 3년상을 주장하여
결국 1차전에서 윤휴가 이치론으로 승리한다.
2차전에서는 윤휴, 허목등이 사전정보를 입수하고 선수를 쳐서 진보적인 1년상을 주장하여
또다시 승리하자, 이에 화가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하여 사사시킨다.
명확하게 정립된 학파의 확립철학과 창조철학이 없거나 남의 철학[주리철학]을 빌려쓸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일관성이 없이 진보와 보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명확한 철학이 없었기 때문에 윤휴가 화를 당한다.
[노론영수 송시열의 집권당 보수세력은 보수정책을 펴다가 한발 양보해서 진보정책을 펴도 무방하지만,
야당이 진보정책을 주장하지 않고 일관성이 없이 진보와 보수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그 학파의 정치철학과 정체성에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임].
-한마디로 남인학파는 정당의 정치철학과 학문적 사상, 이념철학 및 정체성도 없고
오로지 권력만을 잡기위한 정파로만 송시열의 눈에 보였다는 이야기임.
[조선은 예조를 통한 중앙 집권식 교육제도가 아니라, 각 지역마다 각기 다른 성리학적 학문을 창시하여
학파를 형성하고 서원, 서당, 학당 등에서 교육시키는 나라였고, 교육제도는 지방분권을 유지함.
중앙만 성균관에서 교육시킴].
선조 시기에 주기학파가 임진왜란으로 제1차로 몰락하고
광해군 때 도교학파인 조식학파 대북의 집권으로 제2차로 몰락하며,
인조반정으로 200여 명이 유배갈때 주기학파 40여명이 유배를 가서 3차로 몰락하고 사라지면서
조선의 근대화가 완전 사라지고 정묘, 병자호란을 맞는다.
기호사림파[조광조 등 70명]-한성 및 기호지방.-[도학/도가사상 개혁].
격물(과학)발전.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송익필, 정철,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 이귀, 김류, 김집, 이서, 신경진, 정엽,
윤선거, 송준길, 송시열(옥천)로 이어짐.- 충북 청주성이 노론학파의 중심지로
양광도[경기 동부, 충청 북부, 충북, 강원 영월, 경북 서북부/정주학 신봉학파(태극설)]를 대변.
-[도학/도가사상 인정].
서인 주자학 중도파-성혼, 조헌(김포).-윤증(충남 논산 노성)의 소론학파 양명학으로 이어짐.
-전남 광주출신 한성태생 성혼, 김포의 조헌은 경기 서부, 광주, 한성 중심 대변.
서인 주자학 개혁 혁신파/주기학파(근대 이성철학파/근대식 개혁학파)-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박순, 김인후 등의 제자 40여 명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
>충남 논산 노성 윤증의 소론학파가 명맥을 계승.
-도학/도가사상 철폐, 정이학, 정주학, 주자가례/관의복 복식등 예학 철폐.
소론학파-충남 논산 노성의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양명학파 >실학사상으로 이어짐.
-충남을 중심으로 경기 중서부를 대변.
(단지 조헌, 김장생의 후예 윤선거 등이 윤증과 가족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주게 되어
연관 지어지는 것이며 주기학파의 정통 계승자는 조헌, 김장생이 아님.
주기학파 영의정 박순과 함께 주자학 중도파 영수 성혼이 중재하여 동인 주리학파와의 협상을 완결시켜
성혼을 주기학파에 넣어준 것이지만 성혼이 주기학파에 포함된다고 해서 그 제자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님.
주기학파 정통 계승자는 태인의 이항, 장성의 김인후, 광주의 박순(영의정) 등이며,
이항은 서경덕의 주기설, 기대승의 주정설 (이성의 상호 통제론>사회 이성철학 완성)을 전파하고
이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기학파의 대부격이었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을 방어하는 황박, 황진, 정담,
이복남,김경로,김천일, 남언경, 송상현,고득뢰,선거이,이순신 등 맹활약을 펼치는 문무관들이
모두 이항의 제자였음.)
영남사림파-김종직(밀양) 김굉필(대구),정여창(함양),김일손(선산) [도학/도가사상 인정/영남 중심학파]
동인 주리학파/이황학파-이언적,이황,이산해,류성룡,김성주,김성일..[이언적이 최초로 주리철학 소개]
-양광도[경기동부,충청북부,충북,경북북서부]안동, 정이학(무극론/음양오행론)신봉학파.
조식학파(도교학파)-정인홍(합천),이이첨(선산~음성),허균(대구),곽재우(의령),정구,정우옹,이달..
윤휴학파(주리철학 개혁학파)-허목,유직.[청소북>청남학파/청풍~청도,청송에서 이어지는 학파]
허적학파(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탁소북>탁남학파/진주,마산,창원,진해,거제에서 이어지는 학파)등은
주자학 내에서 고대의 악습인 도교적인 학문 정이학,정주학,예학 등을 신봉하는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였고,
윤휴학파, 허목학파 등은 주리철학을 변종 개혁시켜 더욱 더 폐쇠된 조선으로 이끌고 간다.
주리철학은 이미 주자학 안에 도교적인 정이학,정주학,예학이 있었기 때문에
주리철학은 완성된 학문이라 개혁하면 안되는 학문인데 이것을 개혁하여 변종 학문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마디로 주자학과 도교철학 [노장철학,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을 융합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융합시키면 이성이 그릇된 성악설적이고 잘못된 법, 제도, 사회관습, 관의복 복식,풍습(상투,제사,주자가례),
문화제도,예법 등이 최악의 길로 들어서는 학문으로 치달아 조선사회에 뿌리가 내리게 된다는 말이다.
광해군 때 조식학파의 집권으로 더욱 폐쇠[幣衰]-폐쇄되고 쇠퇴함]되고,
집권한지 하루만에 효종을 독살한 윤휴학파 허목(영의정) 등은 북벌정책을 무너뜨리고
더욱더 폐쇄된 조선으로 이끌고간다.
이들이 신봉한 학문 철학이 고대의 폐쇠적인 학문을 그대로 신봉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더욱더 고대기로 돌아가는 조선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도교적인 학문인 정이학,정주학,예학등이 바로 무위자연,만물일원론을 따르는 노장철학 학문이다.
거기에다가 서인 송익필의 철학인 정주학의 태극론,예학 등의 융합은
그야말로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 최악의 폐쇠적인 학문이 융합한 것이다.
남존여비사상, 신분차별, 반상의 법도(법학/계급), 강상의 법도(예학,풍속) 등 신분질서와 예법이
극도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주기학파가 사라지고
최악의 학문들이 융합하여 조선을 천길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다.
예송논쟁 요약.
예송논쟁은 인조의 자의대비 사망시 상복과 기간 문제를 가지고 1년 상으로 할지, 3년상을 치뤄야 할지를 놓고
대립한 것이고, 집권당 보수파인 양광도 서인 송익필, 정철에서 이어지는 송시열의 노론학파가 집권당 보수파라
3년상을 주장해야 하는 게 맞는데, 야당이었던 영남 남인 윤휴/허목학파에게 예송논쟁에서 이기려고
1년상을 주장하는 바람에 남인 윤휴가 유교 이치론으로 승리하는 논쟁이고,
2차전에서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송시열이 야당 남인 윤휴학파 몰래 1년상으로 법률을 고쳐놓고
제2차 예송논쟁에 돌입하였는데 윤휴학파 허목등이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1년상을 주장하여 승리하는 사건이다.
당연히 야당은 진보적인 주장을 해야하므로 또다시 이치론으로 승리하는 사건이고 이에 화가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매도하여 윤휴를 사사시키는 사건이다.
집권당 보수파는 보수적인 주장을 해야하고 야당은 진보적인 주장을 해야 이치에 맞는 것인데, 야당이 야당답지 못하고
진보와 보수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정략을 펼치면 그 정당과 학파의 정치적 신념,사상,이념, 정치철학도 없는
부패한 파리떼들이 오로지 권력만을 잡기 위해 정략을 펼치는 세력이라고 봐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매도하여 사사시키는 것이고, 후일 남인이 반격하여 송시열이 사약으로 제거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허목 등은 정권을 잡고 영의정으로 오른지 하루만에 북벌정책(진보정책)을 펼쳤던 효종을 독살시켜버리고
폐쇠적인 조선으로 이끌고 가는 사건이다.
백날 역사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지론을 이야기 해봐야 도움이 안되고
제대로 알려면 성리학의 사상철학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역사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朱子家禮.
지나친 禮는 독이라고 하였다.
또, 공자가 노자에게 禮를 배워 성리학의 틀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왜 들어와서는 안되는 학문이었는지 간단한 실례를 들어본다.
그리고 성악설/성오설을 바탕으로 성리학/주자학의 원칙을 고수하는 원리주의자들이
이끌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는 맹자의 심성론, 천성설, 성선설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노자,장자의 도교철학>제자백가철학>공자의 예학>순자의 성악설>한비자의 법가사상>신라의 풍류도>
>고려말 신진사림파,이규보,이색>정도전의 이상국가>양광도 동인>사림파>조선 주리학파/이황학파>
>조식학파(노장철학/제자백가 철학)>윤휴학파/허목학파[주리철학 개혁학파]>
>허적학파[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로 이어진다.
禮는 서인 송익필이 주자가례를 완성하면서 조선 정권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송익필 역시 성리학 원리주의자였다.
예법에 왕이나 부친,조부,증조부가 죽으면 3년상을 치루게 된다.
어린 왕자나 왕은 증조부부터 3년씩 9년을 치뤄야 한다.
대자대비,대비,왕후,후궁 모후까지 하면 다시 9~12년을 치루게 되기 때문에 국사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다.
분명히 지나친 禮의 폐혜[弊惠]이다.
1919년1월21일 고종때 가서 처음으로 국상을 9일장으로 치루게 된다.
잘못된 예학의 폐혜[弊惠]였으며 노자,공자의 예학과 한비자의 법가사상을 지나치게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성악설을 기반으로하는 지나친 잘못된 예학과 법학은 진보하는 게 아니라 퇴보만을 거듭할 뿐이었다.
송익필은 기대승vs이황의 사단칠정 논쟁, 이이vs이황의 이기논쟁같은 사변적인 이론보다
"예(禮)"를 통한 도덕성 확립으로 주리론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송시열이 예학의 대가 송익필의 제자로 충북 옥천의 노론학파 영수 송시열 역시 예학의 대가였다.
"이말이 뭐가 문제냐 하면 송익필은 서원에서 "예"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도덕성 확립 교육만으로도 인격이 완성된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이성의 정립이 없는데 어떻게 "예"를 통한 도덕성 확립만으로 깨달음을 얻어 인격이 완성되겠는가 이말이다.
송익필 역시 이성의 정립(인격완성)이 뭔지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왜 주기학파 서경덕,기대승,이이,이항,성혼,박순(영의정),김인후 등이 주도하고
40여 명의 제자들이 444년을 앞서간 선각자들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주기학파는 근대 이성철학자들이며 근대식 개혁학파였다.
이성주의,경험주의,현실주의,합리주의 사상철학자들이었다.
광해군의 조식학파 도교정권 때 처음으로 현실주의를 내세워 일시 협력하여 살아남는다.
숙청과 유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일시 협력하였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문제지만,
학문적으로 실제 정치에 적용하여 실험한다는 점에서
이성주의,경험주의,현실주의,합리주의를 현실적으로 현실 정치에 적용한 것이다.
이당시에는 처음으로 학문적 사상을 실험정신을 가지고 강하게 시도하고 싶어했던 시기였다는 말이다.
성악설에 법가사상을 예학과 법학만을 가지고 조선 정권에서 지나치게 적용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고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주변국과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발맞춰 나아가는 자세와
한발 먼저 움직이고 대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여진의 조상 숙신은 색신족>색슨족으로도 분화하고, 숙여진(란주여진)은 일본 동경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으켰던 세력이다.
생여진(건주여진)은 정묘호란,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세력이었다.
현재에 와서 둘은 한몸처럼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절묘할 수가 있을까 한다.
사변적[[思辨的]- 경험(실천적 체험)보다도 이성적 사고로 설명하는 일.
예(예학/예법)를 통한 경험(체험)을 배우지 않고, 순수 이성론으로만 인식하고 설명하려 하는 일.
>이성의 정립과정과 확립과정을 거쳐 인격을 완성해야만 화담 서경덕처럼 황진이가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지만, 실천적, 경험적 체험으로 예학과 법학만을 통해 백날 예법을 익혀봐야 30년간 도를 닦든,
성불을 하든 간에 지족선사처럼 하룻밤 사이에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가는 현상이 실제로 발생한다는 이야기임.
왜냐하면 인간이 이성의 정립과정과 확립과정이 없으면 인격은 불완전하게 형성될 뿐이고,
예학과 법학만으로는 인격을 완성할 수가 없으며, 그 예학과 법학이 개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 또는 반강제로 창시자에 의해 강요되는 예법이기 때문임.^^
[송익필이 이산해파에게 패한 원인.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는 정주학(태극설) 신봉학파이고,
동인 주리학파는 정이학(무극론/음양오행론)기반으로 둘다 도학/도가사상을 인정하는 학파였지만,
송익필의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학파는 성선설 기반이고 동인 주리학파는 성악설 기반이기 때문에
필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임].
-연산군~중종 사대사화 (무오,갑자/연산군,기묘(중종),을사(명종)때 무오사화부터
동인은 권모술수적이고 중상모략, 감언이설,교언영색 등 권력을 잡기 위해 철저하게
묘략과 모략적으로 변해간다.
이는 선조 때 1589년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이어지며 양광도 동인,대북/소북>남인으로 이어짐)은
도교철학의 도학에서 파생된 주역/역술,풍수지리,예언,예언서,사술[사주,관상],도술[도참설],토정비결,
주술,저주의식 등을 이용하여 권력을 악용하다가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고,
인조반정 정권은 주기학파 40여 명을 유배로 몰락시켜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고
정묘, 병자호란을 맞는다.
남인정권은 숙종 때 장희빈과 함께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양광도 서인/노론(송시열)에게 몰락하고,
남인이 재반격하여 권력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송시열을 기사환국(기사사화)으로
다시 사사시킨다>갑술환국으로 양광도 서인 소론>노론 재집권].
[귀족과 대상인들이 독점한 육의전을 혁파하고 일정기간 난전을 허용하여 모든 것을 사고 팔게 하면
활, 화약, 총포의 등장으로 근대화가 촉발되는 시발점이 됨.
(근대화로 진입시키기위한 사전조치로 자본시장 일정기간 개방).
그럴려면 주기학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이성의 정립(인격완성)"이 먼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임.
서인 강경파 정여립학파가 "이성의 정립과정"을 무시하고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 못 담그나"라는
양명학에서 강조하는 실사구시 실천철학으로 합천, 산청의 조식학파와 연합하여
신분질서를 철폐하고 근대식 개혁을 밀어붙였다가 역모죄로 몰려 몰락하는 것임.
1981년경부터 약 20여년 간 전주에서 해마다 난장을 열어 중소기업 제품 활성화에는 기여하였으나,
주요 과학기술 통제로 핵심 과학분야에는 활성화 되지는 못함
선조 때 근대화 시키지 못한 한을 난장으로 대신한 것인데 난장이 역사가 될줄은 몰랐을 것임].
>>현재도 육의전 우선주의 정치, 경제에서 벗어나 과학기술 통제를 풀고
모든 것을 법적으로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저작권, 공업소유권, 유형재산권, 무형재산권(발견, 발명, 고안,
의장, 상표, 저작물, 컴퓨터 프로그램, 반도체 칩의 배치설계, 데이터 베이스등..)/상표권, 실용신안권,
디자인권, 의장권, 초상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주는 정책을 펼치면,
제4차 산업혁명을 짧게 경험하거나 건너뛰고 바로 제5차 산업혁명 체제로 들어갈 수도 있음.
>육의전과 수구 정치, 수구 자본파 바로 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