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 13,24-43 |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하늘나라는…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는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또 ‘씨 뿌리는 장면 전체’, 또는 ‘씨가 뿌려진 밭’의 상황의 설명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고자 하신다.
‘하늘나라’는 메시아가 건설하시고 완성하시고자 하는 메시아의 나라이다. ‘좋은 씨’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나오는 한 종류의 좋은 씨앗이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했다면 여기서 ‘좋은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잘 생활해온 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 밭’은 이 세상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창조하셨기에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세상은 하느님의 밭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무관심하게 계시거나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늘 세상을 보호하시고 가꾸시는 분이시다. 세상이 죄악과 악이 만연해 쓸모없는 땅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고 있으며 추수를 기다리는 땅이다.
|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는 말에서 ‘자는 동안’은 원수가 농부가 모르게 슬그머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기회를 암시하는 말이다.
이 세상의 어둠의 세력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 시간대에 활동을 한다. 즉 우리의 신앙이 느슨해 지거나,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거나, 도덕과 윤리성이 빛을 잃어갈 때 악은 지체 없이 우리 안에 들어와 그 씨앗을 뿌려 놓는다.
이 비유에서도 농부의 원수도 농부가 휴식을 취한 밤에 몰래 들어와 악한 씨앗을 뿌리고 간 것이다. 당시에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또는 괴롭히기 위해서 밭에 가라지 와 같은 잡초를 뿌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로마법에서는 보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 와 같은 잡초를 뿌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 구절에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는 표현은 이 지상에 자기세력을 심어 놓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덧뿌리고 갔다’는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시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레위기 19 장 19 절과 신명기 22 장 9 절에 보면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그 이유는 두 씨앗 중 어느 한 씨앗의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신앙에 견주어 보면 하느님 신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우리에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이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나안 지방의 이방신 숭배와 또 결혼으로 인해서 흐려질 수 있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악한 씨앗, 곧 가라지의 씨앗을 곡식의 씨앗 사이에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행위인 것이다. |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가라지’는 밀과 비슷하게 생긴 독보리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식별하기 어렵고, 또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설사와 구토 등의 증상을 일으키며, 심할 경우는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한다.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인데 사람들을 의로움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이며,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특징은
1) 곡식과 가라지가 잘 구별이 되지 않듯이 그들도 세상 끝 날까지 신자들과 구분이 잘되지 않는다.
2) 가라지는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가지로 외형과 생장 과정이 비슷한데 이삭이 패면서 알곡을 맺을 때 확실히 차이가 난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숨어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감춰진 악함을 드러내 놓고 알곡(신자)에게 해를 끼친다.
3) 가라지는 알곡뿐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도 큰 피해를 입힌다. 이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에 분별을 잘해야 한다. 가라지가 성장하는 동안 그 악한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수확철이 되면 그것이 가라지인지 밀인지 확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결실의 때는 영적으로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마지막 추수이기에 추수 바로 전까지는 악의 세력과 죄악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때는 고난의 때이고 신앙의 시련을 통과하는 때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주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다. 바로 그때가 열매를 맺을 때이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해석된다. ‘집주인’은 씨를 뿌린 사람이고 예수님 이시다. 그분 만이 선과 악을 완전히 구별하시는 통찰력을 가지신 분이시고 오직 그분 만이 온 우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주인님’은 마태오복음 사가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을 부를 때 ‘주인님’이라는 호칭과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주로 제자들 또는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 등의 유대 지도층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적대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즉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며 ‘선생님’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예언자들 중 한 명 또는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 주신 구원자, 구세주이시기에 마땅히 우리가 불러야 할 호칭은 ‘주님’이다.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종들은 좋은 씨만 밭에 뿌렸는데 왜 가라지도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메시아의 나라에, 또는 교회에 왜 선인과 악인이 함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성당에 다니면 모두 착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실상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성당을 다니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사기꾼도 많고, 위선자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악은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접 간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유형, 무형의 어두운 실체로서 이것을 다른 말로 선의 부재, 선의 결핍의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성경은 세상 종말에 모든 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 16:20; 요한 13:8).
집주인인 그리스도께서는 원수가 밭에 가리지를 뿌렸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악마의 활동을 모두 꿰뚫어 보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원수’라는 말은 ‘미움’, ‘증오’의 뜻을 가진 ‘에크드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원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자들을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버려야 하지 않느냐고 주인에게 묻는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또는 교회의 신자들이 처음부터 악인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의 열정과 과도한 행동은 잘못하면 성급함과 경솔함으로 변할 수 있다.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 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밀과 가라지의 뿌리는 서로 얽혀 있고, 가라지의 뿌리가 더 강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을 때 밀도 함께 뽑힐 수 있다. 그래서 주인은 그대로 가만두고 지켜보자고 한다. 이것은 세상의 악에 대한 주님의 지혜롭고 여유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악의 근절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 안에 선인과 악인이 뒤섞여 있을 때 악인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려고 하다가 선한 사람들도 억울하게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보면, 중세 시대에 종교 재판, 마녀사냥으로 인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함부로 의인과 악인을 부결하거나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판은 하느님의 권한이다.
‘밀까지 함게 뽑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악을 없애지 않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을 때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힐 수 있다.
주인의 관심은 오로지 곡식에게만 있기에 곡식이 다치지 않을까 근심 걱정에 집중이 되어 있고 반면에 종들은 곡식에 대한 생각보다 가라지에 대한 관심에 더 집중되어 있다. |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수확 때’는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심판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때는 세상의 끝이라는 시간적 의미와 함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우리의 이 세상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에 악한 자는 영원히 멸망할 곳으로 의인은 수확이 끝난 타작마당에서 그리스도와 성인들과 함께 수확의 기쁨, 축제와 평화의 기쁨을 누릴 것이고 행복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씀에서 ‘내버려 두어라’라는 그리스어의 뜻은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 상태대로 방치하라’라는 뜻이다. 이 말은 ‘내가 그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으니 너희들은 관여하지 말라. 그것은 너희의 소관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비유는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낸 교회의 현실에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해 떼죽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배교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박해가 끝나자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도나누스파) 한 번 배교하여 파문 당한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심해지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자들을 함부로 제거해서 교회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거룩한 실체이다. 하지만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이 신앙공동체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라는 말씀은 수확 때가 되면 가라지는 알곡과 확실히 구별이 되기에 추수하는 사람은 쉽게 가라지를 구별해 낼 수 있다. 알곡보다 가라지를 거두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추수 방법과 다른데 보통은 알곡을 먼저 단으로 묶어 곳간에 쌓아 놓은 다음 쭉정이는 한곳에 모아서 불사르는데 가라지를 먼저 거두는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사탄과 사탄에 속한 무리들을 가려내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으로 넣으실 것이라는 뜻으로 하느님 나라는 죄와 악 그리고 악마의 존재들이 완전히 소멸되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백성들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 준다. ‘곳간’은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머무실 영원한 장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악인이나 악을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다. 조금 더 기다리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자연 안에서 밀이 가라지로, 가라지가 밀로 바뀌지는 않지만 인간 사회 안에서는 충분히 신앙인이 악인으로, 악인이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로 성실한 신앙인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이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가라지가 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주님의 말씀과 성찬례에서 오는 은총으로 우리를 무장시키고 우리의 삶을 은총의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시면서 하늘나라의 성장은 겨자씨가 자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앗 보다 작지만 생존력이 좋고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약 3m까지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다인들 중에는 그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겨자씨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비유하신 것은 겨자씨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 때문이다. 그 특징은 겨자씨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는 우리 눈에 보이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성장해 간다.
겨자씨처럼 하느님 나라는 비록 현재는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 만하게 성장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겨자씨의 특징처럼 하느님 나라는 작게 시작을 하였지만 그 끝맺음은 성숙하고 완전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이 크고 웅장하고 눈에 확 띄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사업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또한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복음의 결과로 교회는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당시 사람들은 겨자씨를 가장 작은 씨앗으로 생각했고, 가장 작은 것을 나타낼 때 겨자씨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것보다 더 작은 것을 가리킨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1-3m까지 성장하기에 나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에서 ‘나무가 되고’는 나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란다는 것을 뜻한다.
‘하늘의 새들’은 많은 나라와 그 민족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은 세상의 민족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신다는 뜻이다. 또 ‘새들’은 고통에 지쳐 평화와 안식을 갈망하며 쉴 곳을 찾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들은 참 포도나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
‘깃들인다’는 ‘장막을 세우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 안전하고 영적인 거처에 자리를 잡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2 장 25 절에 인용된 시편 16 편 8 절에 의하면 부활 이후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비유에서는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을 뜻한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크게 될 것이라는 비유이다. 또한 이 비유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야기한다. 즉 하늘나라는 완성을 향해 계속 성장해야 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협력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고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에 빠지면 우리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또 어떤 때에는 정체되어 있거나 후퇴한다고 느낄 때에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나라는 성장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협력자일 뿐 그것을 계획하고 건설하고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중점을 두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라는 말은 ‘하늘나라의 성장과 변화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모습과 같다.’라는 뜻이다.
누룩의 비유를 해석하는데 여러 견해가 있다. 앞선 견해가 대부분이나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즉 가루로 표현된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누룩으로 보는 것이다. 긍정적 측면은 교회의 확장 또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힘으로 이해한다.
부정적 견해는 ‘어떤 여자’때문에 그렇게 해석한다. 여자를 악한 존재로 보는 경향(즈카 5:7-8), 즉 이제벨(묵시 2:20), 대탕녀(묵시 17:1)로 보는 경향 때문에 악한 존재가 가져다 집어넣은 것이 좋은 것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누룩을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다른 견해로 ‘성장’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견해에서는 앞선 ‘씨 뿌리는 행위’가 남자의 활동으로 외적 성장을 가져오는 것으로 본다면 이 구절에서 여자는 누룩의 역할과 같이 집과 교회와 다른 공동체 안에서 그 활동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나 집단, 공동체를 놀랍게 변화, 성장시키는 내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많은 교회에서 대부분의 신자 수를 차지하는 것이 여성 신자들이다. 이 말은 교회가 여성들의 활동으로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며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누룩과 같다’는 말씀에서 ‘누룩’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교만이나 죄에 이르게 하는 욕망(1 고린 5:6),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적대자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부패하고 썩게 하는 요소(루카 12:1, 마르 8:15)를 가리킨다. 이런 이유로 ‘누룩’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예수님의 비유에서 누룩의 의미는 부정적, 긍정적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는 놀라운 병 화력과 팽창력에 있다.
작은 양의 누룩이 밀가루 사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보잘것없이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세상 곳곳을 묵묵히 스며들어 그곳에 사람들의 죄의 사슬과 욕망의 덫에서 풀어 내어 그들을 해방된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밀가루 서 말’은 여자가 하루에 빵을 구울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말’을 뜻하는 ‘사타’는 히브리어로는 ‘스아’이며 ‘에바’의 3/1에 해당된다. 즉 ‘서 말’은 22-23 리터에 해당되며,
이것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천사 세 명을 대접하기 위하여 준비한 분량(창 18:6)이나, 기드온이 하느님의 천사에게 ‘밀가루 한 에파로 누룩 없는 빵’을 만들어 드린 양,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 가져가던 ‘밀가루 한 에파’의 양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1 오멜(약 2.34)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던 것으로(탈출 16:33-36)을 비추어 볼 때 하루 서 말의 분량 1 에바는 10 오멜에 해당하므로 아마도 가족 9- 10 명의 하루 세끼 분량의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 당시는 대가족이 기본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처럼 핵가족 시대의 가족 구성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 밀가루의 양은 언급되었지만 누룩의 양은 언급되지 않고 누룩으로 인해 팽창력만 강조되고 있으며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게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힘은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임을 강조한다.
교회는 외적인 성장과 함께 내적인 성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냉담자가 늘어나는 현상은 그들이 사회적, 세속적 가치를 더 좋아해서 쫓아가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의 가치와 기쁨을 그들이 충만히 누릴 수 있도록 교육하고 도와주었다면 그렇게 많은 수의 냉담자가 생겼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반면에 교회는 충만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미사 성제 안에서 말씀을 듣고 해석해 주며, 성체 성사 안에서 주님의 구원의 성사를 매일 우리가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신자들의 성장을 돕고 있다.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좋은 땅과 영양분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좋을 땅을 피해서 돌 밭이나 가시덤불로 가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구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군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평상시에 눈으로 보고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을 통해서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다른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을 보면 모든 말씀이 비유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기 위해 군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쉽게 받아들이도록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을 못 알아듣고 그 비유를 수수께끼처럼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이 구절은 시편 78 편 2 절을 인용한 것으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 이 시편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라고 본다. 시편 78 편의 저자는 ‘아삽’이라는 인물로 역대기 하권 29 장 30 절에 히즈키야의 유다 통치 시절에 히즈키야와 대신들이 아삽을 선견자로 부른 적이 있다.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 성전의 성가를 맡았던 베레갸의 아들로서 시편 중 12 편(시편 50, 70-83)를 지었다. 그의 이름은 헤만, 여두툰과 함께 다윗의 세 악사로서 계약의 궤를 오벳 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역대기 상 15: 19)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여두툰과 아삽은 왕의 선견자라고 불렸다. 역대기 상 25:5; 역대기 하 35:15.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를 직역하면 ‘내가 다른 일들과 비교해 가면서 말하리라’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교육 방식을 말한다.
‘세상 창조 때부터’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던 때부터’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은 ‘예부터’로 표현되고 70 인 역에서는 ‘태초부터’로 번역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 78 편의 문맥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다루기 있기 때문에 ‘세상 창조 때’는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된 민족과 관계없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되었던 것일 것이다.
‘숨겨진 것’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말한다.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숨겨졌다’라는 단어는 ‘수수께끼’, ‘가려진 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도트’와 같은 말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는 소극적 의미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숨긴 것이라고 하는 적극적 의미가 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그 신비는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감추어져 있던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계시자인 동시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예언되었던 구원 역사의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완성자이다.
‘드러내니라’는 ‘선포하다’, ‘크게 말하다’의 뜻으로 강물이 콸콸 소리 내어 흐르듯이 열정적인 마음으로 ‘연설을 하다’의 의미가 들어 있다.
아삽이 비유를 통하여 유다의 지나간 역사와 사건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힘차게 선포했듯이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율법학자 등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숨겨진 하느님 나라의 도래의 비밀을 군중들에게 밝혀 계시하셨다.
더구나 이 비밀들은 율법학자들이 율법을 가르치듯이 말씀하시지 않았고 마치 예언자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그 영감 속에서 진리를 선포하듯이 권위에 찬 음성으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에서 ‘떠나’는 ‘가게 하다’, ‘보내 버리다’ 또는 ‘버려두다’, ‘포기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들을 귀와 볼 눈을 갖지 못한 많은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비유 속에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앞서 떠났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음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그래서 36 절 이후의 비유들을 듣는 청중들은 일반 군중들이 아닌 소수의 제자들로 바뀌었으며 비유의 목적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또한 알려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제자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촉구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들이다. 이 소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설명하여 주다’의 뜻인 동사 ‘디아사페손’은 ‘철저히 말하다’, ‘분명히 가르치다’ 또는 ‘밝혀 말하다’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제자들의 예수님의 비유 중 그 어느 하나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풀거나 해석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어떻게든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알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복음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묵시적인 의미의 사람의 아들, 고난받다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어가는 사람의 아들, 현제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이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의 아들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복음의 선포자로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 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밭은 세상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퍼질 것을 암시한다.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사람의 아들에 의해서 이 세상에 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메시아 왕국에 참여할 수 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 법적 권리 즉 상속권을 소유한 자들이다.
특히 ‘하늘나라의 자녀’는 히브리적 표현으로서 그들이 천국에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어울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을 가졌고 성령의 여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가라지 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거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악한 속성을 지닌 자들이기에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신자들을 유혹하여 하느님의 복음과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들이다. |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원수는 악마다’에서 ‘원수’, ‘적대자’를 뜻하는 말인 ‘에크드로스’는 ‘적의’, ‘불화’, ‘이간’, ‘분리’를 가리키는 말인 ‘에크드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분리되어 나온 자’를 의미한다.
한편 마귀를 가리키는 말인 ‘디아볼로스’는 ‘사이에’를 뜻하는 ‘디아’와 ‘밀어 넣다’, ‘끼어 넣다’, ‘던지다’의 뜻인 ‘발로’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상하는 자’, ‘비방, 거짓 고소하는 자’, ‘밀고자’, ‘분열시키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원수라는 단어는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버린 자로서의 악의 기원과 그 정체성을 나타내며, 마귀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서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를 조성하는 그들의 사악한 행위를 드러내 주는 말이다. 하느님에게서 분리되어 나간 자는 마귀의 역할, 즉 죄의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일을 담당한다.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에서 ‘세상 종말’은 이 시대의 결말을 의미한다. 결국 이때가 되면 영광스러운 새 시대가 열리게 된다. 한편 ‘ 이때 ’는 예언된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다.
‘일꾼들은 천사들이다’에서 ‘천사’들은 구약에서 주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 특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천사의 중요한 역할과 책임은 종말에 사람의 아들과 함께 세상에 와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며 악인을 멸망의 장소로 추방하여 영원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 곧 종말에 있을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가라지 즉 악한 자들의 묶음이 영원한 멸망의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상징적, 교훈적 차원에서 내려지는 형벌이 아니라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심판이다.
쉽게 말하면 죄를 지은 후 재판을 받고 형량을 채우면 출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곳에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에서 ‘보낸다’는 것은 ‘사명을 띠고 목적한 장소로 가게 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아포스텔로’인데 ‘위임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스톨로스’ 즉 사도란 말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12 제자들로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구절의 천사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의 나라에서’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의 왕국 안에서’의 뜻으로 하늘나라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서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통해 이미 시작된 나라이며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교회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온 우주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라는 말은 스바니야 1 장 3 절의 ‘나는 사람도 짐승도 쓸어버리고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도 쓸어버리며 악인들을 비틀거리게 하리라. 사람도 땅 위에서 없애 버리리라.’는 말씀의 완곡한 표현으로 볼 수 있으며 스바니야의 구절은 주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말씀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악에 빠져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오복음 사가의 표현도 사람으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는 함정이나 미끼 또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악을 행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란 ‘법’을 무시하는 자들로서 하느님의 율법과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불의의 사람을 가리켜 멸망하게 되어 있는 자이며 하느님과 맞서는 자라고 했다(데살 2 2:3-4). |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옥 불에 던져 버릴 것이다.’ 라는 뜻이다. 묵시록 20 장 15 절에 보면 지옥은 죄인을 불에 태우는 곳으로 묘사된다.
‘불구덩이’는 직역하면 ‘화덕’,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가리킨다. 이는 하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것을 ‘지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모든 불의 한 것들이 그 죄를 받고 멸망되는 이곳에서 악인들은 종말적인 영원한 운명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짜 형벌은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잘려 나갔다는 절망감일 것이다.
‘울며 이를 갈 것이다’에서 ‘울며’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할 때 우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라마에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우는 것, 회 당장의 집에서 우는 것 등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갈 것이다.’는 말의 어원은 ‘굶주림에 계속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모습이나, 분노로 씩씩대는 사람을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사도행전 7 장 54 절에 스테파노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유대인들이 ‘마음에 화가 치밀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완전한 절망과 무기력한 분노를 이 구절에서는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포함해서 자기에게 그런 벌을 내린 하느님에 대한 분노 등을 뜻한다. 즉 분노와 절망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때’는 ‘최후의 심판’이 끝난 후이다. 다니엘서 12 장 3 절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데, 다니엘서의 ‘현명한 이들’이란 말이 생략되고 ‘의인’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당시 당신의 메시지를 지혜롭게 이해하는 자들이었던 제자들만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인들’이란 복음의 빛을 수용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의인들은 바로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즉 아버지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영원한 고향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해처럼 빛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빛날 것이다’는 ‘등불’이라는 단어와 전치사가 합쳐진 말로써 의인들의 빛남이 마치 어둠 가운데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밝혀 볼 수 있게 하는 등불과 같이 빛나게 된다는 의미로 세상 끝날에 신자들이 입게 될 영광의 광채 그 아름다움을 묘사한 말이다. 의인들이 해 같이 빛나는 모습의 예표로 예수님께서는 다볼산에서 당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런 모습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광채로 모든 만물이 다 해처럼 빛날 것이며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던 처음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말씀은 제발 깨닫고 믿음을 가지라는 예수님의 호소이다. 가라지의 비유는 선인과 악인이 뒤섞여 있는 이 세상의 현실과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자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에 우리 자신이 가라지라면, 회개하고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으로 좋은 밀로 변화될 기회를 얻어야 할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 악인들을 처음부터 제거하셨다면 우리 교회에 바오로 사도와 같은 인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같은 인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셨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회개와 은총의 시간으로 이끄셨다. 하느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선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모든 인류가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다리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