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뉴스 펌) [소식] 5월 1일 어린이날의 의의 어린이날은 5월5일이 아니라 1일 메이데이였으며 어린이날의 의미도 단순히 동심천사주의적 기념일이 아닌, 정치·사회적 운동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영혜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는 4일
‘두개의 어린이날-역사적 기념일의 계승:묻혀진 이야기와 선택된 이야기’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어린이날은 방정환 등 일본 유학생이 주축이 된 색동회가 주체가 된 게 아니라 소춘 김기전이 만든 천도교 소년회가 1922년 5월1일에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이듬해 같은날을 ‘제1회 어린이날’로 정했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당시 어린이날을 1일로 정한 것은 메이데이처럼 압박받던 자의 해방과 생명이라는 차원이었다”며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28년에 5월 첫째주 일요일로 변경되고 1937년 사라졌다가 1946년 5월5일로 부활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해방 후 어린이날을 5일로 변경한 주체인 ‘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가 “당시 극심했던 이념대립을 피해 어린이날을 민족기념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국내 소년운동단체의 의견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후 소년운동가들이 대거 월북함에 따라 어린이날의 정치성이 퇴색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식민시기 어린이날 5월 1일"
[연합뉴스 2004-05-04 15:45]
(서울=연합뉴스) 김경희 기자 =
일제 식민통치기 어린이날은 5월1일로 제정됐다가 해방 이후 이념 대립속에서 5월5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영혜 한신대 교수(일본지역학)는
4일 '두 개의 어린이날'이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을 공개하고 "소춘 김기전이 만든 천도교 소년회가 1922년 5월1일에 '어린이의 날'을 선포하고 이듬해 5월1일을 '제1회 어린이날'로 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어린이의 연령층은 19세까지로 폭이 넓었다"며 "압박받는 자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메이데이와 같은 날인 5월1일로 어린이날을 제정했다"고 주장했다.
한교수는 "일제 시대의 어린이날이 5월1일이었다는 것은 관련자들의 증언이나 연구논문을 통해 극히 일부에게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교과서에도 언급되지 않는 등 사회적 담론으로 확산되지 않았다"며 더구나 "날짜의 의미나, 향후 변천과정 등은 전혀 연구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교수는 또한 1937년 일제가 없앤 어린이날을 현재의 5월5일로 부활시킨 주체로서 '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이하 전국준비위)의 존재를 밝혔다.
그는 "윤석중, 정홍교, 김억 세 사람이 모여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는 설"을 반박하며, 1946년 5월5일자 「자유신문」 어린이날 특집면에 실린 박홍민의 글을 근거로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구성된 '전국준비위'가 어린이날을 통합적으로 치러내기 위해 1946년 5월5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했다"고 말했다.
한교수에 따르면 46년 '전국준비위'는 정성호, 최병화 등 53명의 위원으로 구성됐으며, 이듬해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김기전을 고문으로 하고 양재응, 최청곡, 양미림, 남기훈, 정홍교 등 9명을 대표위원으로 하는 조직으로 변화했다.
그는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노동절 행사를 모두 양분된 상태로 치른 상황에서 통합 행사로 치러진 제1회 어린이날의 의미는 각별했다"며 그 예로 "축사를 하러 나온 여운형이 '남산에 대해서도 북쪽에 대해서도 절을 한 일도 없거니와 나한테 절 받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린이들만은 나한테 절 받을 자격이 있다'며 일본천황에게 하던 절과 같은 최경례의 절을 했다"는 1946년 5월6일자 「중외신보」기사를 인용했다.
이어 한교수는 흔히 알려진 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의 '어린이날 노래' 말고도 다른 3개의 어린이날 노래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국준비위가 1947년 '어린이날 노래'로 제정한 것은 윤석중 작사, 안기영 작곡의 노래였는데, 안기영이 월북하며 같은 가사에 윤극영이 곡을 다시 써 오늘날 널리 알려진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었다"면서 "1925년 제3회 어린이날에 소춘 김기전이 구한말 창가 '야구단운동가'에 가사를 붙여 만든 '어린이날 노래'와 1946년에도 창작 경위를 알 수 없는 '어린이날 노래'가 불렸다"고 밝혔다.
그는 "담론 생산자들이 특정한 이야기들만 선택해 재구성한 결과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처음 어린이날이 가지고 있던 정치.사회적 담론이 배제돼 오늘날 그 정체성이 크게 훼손된 것이 문제"라며 "오늘날 어린이날은 과거에 비해 그 주체의 범위가 한정돼 있다"고 지적했다.
어린이날 유래와 역사
[어린이동아 2004-05-03 22:28]
어린이들이 1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날. 하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날뿐 아니라 어린이라는 말조차 들을 수 없었다.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주창해 1923년 5월 1일 서울에서 첫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날은 1921년 5월 1일, 소파 선생이 주축이 된 ‘천도교 소년회’에서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처음으로 소년운동을 시작한 지 정확히 2년째 되는 날이었다.
소파 선생은 천도교 어린이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어린이가 이 날만큼은 존경받고 즐겁게 보내라는 의미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했던 것이다.
해마다 5월 1일 거행된 어린이날 행사는 1927년부터 5월 첫 일요일에 개최되다 193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금지됐다. 하지만 어린이날은 소파 선생의 숭고한 정신으로 살아남아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가 광복 후 1946년 5월 5일 다시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렸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1957년에는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제정 선포됐다.
어린이라는 말도 소파 선생이 처음 창안해 사용했다. ‘어른’에 대한 대칭어로 쓰여 온 ‘아이’라는 말이 어린이를 비하해 부르는 듯한 어감이 짙게 풍기는 반면 ‘어린이’는 ‘젊은이’ ‘늙은이’와 대칭되는 표현으로 ‘어린 사람’이라는 뜻과 함께 어린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은 천도교소년회가 제정”
[경향신문 2004-05-03 19:47]
5일은 81주년 어린이날.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역사가 긴, 우리의 어린이날에는 어떤 역사와 뜻이 담겨 있을까.
한신대 한영혜 교수(사회학)는 최근 한국사회사학회 월례모임에서 어린이날의 역사와 담론을 다룬 논문 ‘두개의 어린이날-선택된 이야기와 묻혀진 이야기’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한교수는 초기의 어린이날은 사회적 담론이 담긴 ‘정치적 기념일’이었으나 냉전체제 이후에 순수한 기념일로 변화했다고 밝혔다.
한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어린이날 제정은 일제하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된 소년운동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기념일도 5월1일→5월 첫 일요일→5월5일로 바뀌었다.
천도교소년회는 발족 1주년이 되는 1922년 5월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이듬해에는 전국 조직인 ‘소년운동협회’가 결성되어 1923년 5월1일을 제1회 어린이날로 선포했다. 한교수는 어린이날 제정은 소파 방정환보다는 천도교소년회 회원이던 소춘 김기전이 주도했으며 창립기념 선언문도 김기전이 기초했다고 밝혔다. 당시 천도교소년회는 회원 자격을 만7세부터 만16세로 규정, 어린이의 범주에 오늘날 청소년에 해당하는 층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한교수는 5월1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은 서양의 메이데이(노동절)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메이데이를 제정하지 못하는 대신 어린이날을 통해 그 뜻을 살리자는 취지에서다. 일각에서 어린이날을 ‘소년 메이데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메이데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1928년에는 어린이날 기념일도 5월 첫째 일요일로 변경된다. 학생들의 행사참여를 쉽게 하자는 취지였지만 일제 탄압이 가중되면서 1937년을 기해 어린이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해방이 되자 어린이날도 부활했다. 1946년 조선소년운동중앙협회 등이 중심이 돼 다시 제정한 어린이날은 5월5일이었다. 어린이날이 5월5일로 바뀐 것은 해방 후 성대하게 치러지는 메이데이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5월5일이 카를 마르크스의 생일이라는 사실과도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교수는 덧붙였다.
어린이날 행사가 오늘날처럼 초등생 이하를 대상으로 한 것은 1947년부터. 좌·우 이념대립으로 많은 소년운동가들이 월북하면서 운동의 구심점이 사라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때 윤석중 작사·안기영 작곡의 ‘어린이날 노래’도 안기영의 월북으로 윤극영이 작곡한 현재의 노래로 바뀐다. 한교수는 “역사 속의 어린이날은 ‘가정의 달’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오늘날의 어린이날과 달리 많은 정치·사회적 담론을 담고 있었다”며 “냉전으로 인해 이런 담론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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