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한 문장
박은형
파란시선 0070 / B6(128×208) / 119쪽 / 2020년 11월 1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당신이라는 단 한 번의 미지
<흑백 한 문장>의 마지막 시(「그 나무 붉은 지문 밑」)에서 시인은 “그럼에도 그 꽃나무 아래서 만나자”고 말한다. 시인은 먼나무 아래로 “딱 슬픔 하나만 개종하지 말고 오”라는 말을 남겼다(「먼나무 편지」). 그것은 시인이 타자에게 폭력을 저지르지 않게 우리를 막아 줄 방편으로 슬픔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꽃나무”는 죽음과 울음으로 둘러싸여 있고, 아직 변질되지 않은 사랑을 꽃으로 피운 채 가만히 서 있다. 삼백 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한 가지 말과 일색의 마음”으로 서서 가만히 꽃잎을 떨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물의 가장 큰 특성이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 어떤 다른 것에게도 스스로의 의지로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다. 식물의 이러한 면모가 화자로 하여금 “제발 만지지 말아 달라는” 타자의 간청을 “헛된 다짐으로라도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만든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식물은 쓰러진 타자를 일으켜 세우지도, 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더듬어 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만지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지켜 줄 수는 있다. 지금껏 타자화되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일상적인 영역에 존재하던 다양한 폭력의 양상이 드러나는 시대에 우리는 쉽게 타자에게 다가갈 수 없고 다가가서도 안 된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타자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멈추는 동시에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서로 간의 거리를 조절하는 일이다. 시집에서 ‘우리’는 언제나 지나가고 엇갈리는 존재들이지만 「그 붉은 나무 지문 밑」에서만 “잠시 서로를 알아”본다. 시인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가능성을 본다. 그래서 “그럼에도”이고, “그러니까 더욱”이다. 슬픔의 길을 따라 도착한 꽃나무 아래에는 “꽃잎경”을 “알아듣게 고쳐 건네는” 시인이 있다. “꽃잎경”은 잠시나마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그 꽃나무 아래”로 수많은 ‘당신’들을 부르는 초대장이다. <흑백 한 문장>이다.
‘당신’이라는 흰색 위에 “눈을 뜨고도 꾸게 되는 슬픔”(「검은 꿈」)이 심겨 문장이 되고 문장은 식물을 틔웠다.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한 나무 아래는 낙원도 아니고 종착지도 아니다. 안주할 수 없는 언덕이고, 떠나야만 하는 그늘이다. 그러나 그 아래서 우리는 서로를 잠시나마 알아볼 수 있다. 이제 타자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폭력의 새로운 경계를 잡아 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았다. 그동안 우리는 슬픔을 한 손에 꼭 쥐고 있어야겠다. 만지지 말아 달라는, 아프다는 타자의 신호를 언제든 잡아낼 수 있도록. 그리고 먼 곳에 가까워지며 가까이 멀어지지 않도록. 시인은 꽃나무 아래서 “흑백 한 문장”을 쓰면서, 언제까지고 서로의 접경에서 식물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는 오지”(「낭만 관리소」)를 헤매는 곳곳의 ‘당신’들을 위해서. (이상 김동진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박은형 시인은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고, 2013년 <애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흑백 한 문장>은 박은형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박은형의 시는 어두운 대지와 하늘, 강물과 눈 위에 쓰는 생의 첫 연서(戀書)다. 적막과 침묵으로 채색된 통점(痛點)의 흑백판화다. 적요의 빈집에서 허밍처럼 울려 퍼지는 빛과 먼지, 식물의 감수성과 섬세한 감각이 빛나는 시편들이다. 자기 안의 아픈 매듭을 한 땀 한 땀 엮어 가는 서정의 수놓기가 참 애절하고 애틋하다. 시편마다 환절(換節)의 문양과 그늘, 죽은 이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상처, 비감(悲感)의 살과 자문이 생생히 묻어 있다. 그녀에게 풍경은 기억의 아픈 환생이고 세계는 끝없는 변장과 마술의 공간이다. 사람살이의 아픈 울음이 괸 곳, 물외(物外)여서 결코 물외일 수 없는 세속의 땅이다. 사랑이 결빙된 이 세계에서 해동(解凍)의 꿈을 꾸는 시인의 모습이 아프고 아름답다. 라일락 꽃그늘 속에 그녀의 시집을 펼쳐 놓고 단팥죽 한 그릇 먹고 싶은 초저녁이다.
―함기석(시인)
■ 시인의 말
지나온 모든 가을처럼
마음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가까이 있으려고
당신과 멀어지는 날들이다
■ 저자 소개
박은형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2013년 <애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흑백 한 문장>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박꽃 – 11
연두 – 12
꽃집이 있었다 – 14
구름 종묘상 – 16
도화복음 – 17
낭만 관리소 – 18
먼나무 편지 – 20
골목 서사 – 21
천리향 전언 – 22
금지 구역 – 24
가을 공작소 – 26
비의 정원 – 28
동선 – 30
다알리아 – 32
제2부
여행자 – 35
동쪽 – 36
율마 – 38
벌어들인 슬픔에 관한 산책 – 40
미루나무 붉은 서쪽 – 42
검은 꿈 – 44
사슬나무 – 46
차가운 인사 – 48
디아 – 50
빨간 장화를 신은 나디아 – 52
울음사막의 여자 – 54
동굴영원 – 55
배후 – 56
타이밍에 관한 성찰 – 57
헬멧 – 58
제3부
물외 – 63
꽃병의 감정 – 64
작약 – 65
거듭 휘는 봄밤 – 66
눈물의 지도 – 68
반딧불이 생각 – 70
월하정인 – 72
끝 방 – 74
손거울 – 76
전자레인지 – 78
외뿔고래 – 79
저녁 여섯 시 – 80
머나먼 이름 – 81
제4부
거기 누가 가고 있나요 – 85
도라지꽃 – 86
주걱 – 88
가을 인근 – 90
십일월 – 92
손 – 94
투기 – 95
앵두의 폐사지 – 96
자전거 – 97
수양버들 아래 – 98
검진 – 99
미간 – 100
난전 서신 – 101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 102
해설 김동진 접경의 녹지와 곳곳의 당신 – 103
■ 시집 속의 시 세 편
연두
주남지 왕버들이 연두를 시동 겁니다
넌짓한 마음을 단숨에 뜯어내는 승냥이 떼 같습니다
늦으면 늦은 대로 연두를 따라붙으려
두툼하게 녹이 난 슬픔이나
생애 첫 연서의 무용한 형식에 대해 고심합니다
일몰의 긴 회랑이라면 눈부신 졸음
폐역의 늦은 당신이라면 단팥죽 한 그릇
빈 식탁이라면 먼지를 보여 주는 흑백 한 문장
다발로 묶어 연두를 실어 갈 당나귀 어디 없을까요
당신과 나의 담장에도 뭉개질 만큼만 놓아기르기로 해요
연두가 그저 몇 걸음의 눈 배웅에 관여하는 거라면
나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해서 꼭 살겠습니다
전승된다면 사랑
죽음이라면 끄덕끄덕 자장가까지
저수지 너른 고독에 찔려 신접의 병상처럼 에는 것
내 마음을 따라잡는 연두였다고 중얼거립니다 ***
먼나무 편지
하지 무렵 저녁나절엔 먼나무 아래로 오세요
수호초 명자나무 목서와 남천
이름도 단단한 꽝꽝나무 번지를 건너면
푸른 깃털의 해거름 자리로 비워 놓는 곳
수종(樹種) 따로 없는 득실한 고요에
내 졸음은 먼 표정 하나 새로 얻지요
입자 큰 정색일랑 꽝꽝 밀봉해 두어요
어제의 통곡이나 고장 난 날씨 따위는
흐물흐물 욕조에 풀어 두고 오세요
존재의 빛으로는 짧게,
무익한 실마리로는 오래 퇴화하는
나와 당신의 분주한 풍경은
소지의 빛 충만한 먼나무에 탕진해 버리자구요
들뜬 목울대와 쉰 창자와 치렁한 주머니
잘못 배운 어른 말투들 변기에 흘려 버려요
이제 그만 무리의 서열을 떠나 먼나무에 연루돼 보세요
딱 슬픔 하나만 개종하지 말고 오세요
하지 무렵 저녁나절이 제격이랍니다
낭창하고 깨끗한 먼나무 피안에 드는 일 말입니다 ***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그럼에도 그 꽃나무 아래서 만나자 했다
그러니까 더욱 그 꽃나무 아래로 찾아오라 했다
새 옷 입는 꿈을 꾸었다는 당신은
차디찬 이월의 매화에 눈썹을 그려 넣자 했다
달콤한 맹세 같은 향기에 부빈 눈과 귀 멀어 보자 했다
나무는 방금 잊히어서 죽었다 울었다 하는 구원과
첫 꽃 구사하는 물색없는 사랑들에 둘러싸여 있다
삼백 년을 저렇듯 기다려서
한 가지 말과 일색의 마음인 꽃잎을 짓는 중이다
제발 만지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헛된 다짐으로라도 지켜 주고 싶게 하는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꽃잎경을 알아듣게 고쳐 건네는
그 나무 붉은 지문 밑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를 알아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