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광복 70주년. 사람으로 따지면 고희(古稀)다. 그만큼 그날은 오래됐고 세월도 변화무쌍하게 흘렀다. 그러나 강산이 일곱번이나 바뀌었다 해도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품고 있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로 독립투쟁을 하며 일제에 당당히 맞서던 우리 선조들을 말이다.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는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신념을 갖고 지난 7월 10일부터 17일까지 국외(중국)독립운동 사적지탐방을 다녀왔다. 그 중에서도 '조선의용군'들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한단시, 임주, 유주 등을 밟고 왔다. 한송이 무궁화로 살다간 의용군들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지, 그들이 남기고 간 무궁화는 여전히 피고 있는지 눈으로, 마음으로 직접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첫째날 10일 오후 11시 30분, 광복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40명의 탐방단은 광주시 서구 광천터미널 맞은편 도로에 집결했다. 대형버스로 오른 뒤, 1시간 여 지났을까. 어느새 무안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2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다다랐다. 첫날은 탐방단원들끼리 친목을 다지고 다음날 본격적인 답사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11일,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탐방단은 중국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천안문 광장, 자금성, 왕부정거리를 둘러봤다. 이곳들이야 워낙 잘 알려져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북경이 독립군의 주요거점 지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만주, 연해주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오후 2시 25분, 이제 독립투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북경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단시로 향했다.
2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윤세주 열사와 진광화 열사의 묘. 이 두분이 잠들어 있는 곳은 '진지루위예열사능원'이라 불리고 있다.
이곳은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8로군 유격전적지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숨진 열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묘지에 해당한다. 윤세주와 진광화 열사는 지난 1942년 5월 '반소탕전' 당시 태항산에서 전사한 분들이다.
탐방단은 이들의 묘지 앞에서 묵념을 했고 그들의 애국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 속에 새겼다.
셋째날 12일, 이날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적지 탐방과 더불어 강행군이 시작됐다.
조선의용군으로 인정받기 전, 조선의용대로 불리던 열사들의 주둔지, 훈련장소 등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이른 아침, 버스에 올라탄 탐방단은 산서성 좌권현 상무촌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선의용대가 지난 1941년 6월에 최초 주둔한 지역이다. 대원들은 같은해 7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조선의용대가 머문 홍복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불을 지르고 허물어 지금은 터만 남은 상태다.
마을 뒷산에는 아직까지 이름이 파악되지 않은 한 열사의 묘가 안치돼 있었다. 주민들은 이 열사를 위해 매해 4월 5일 청명절 전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탐방단도 이 열사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고인의 뜻을 이어나갈 것을 다짐했다.
탐방단은 이어 운두저촌, 석문촌, 중원촌, 남장촌까지 버스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이러한 이동선은 조선의용대가 잇따라 이동한 경로와 일치했다. 습하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탐방단은 주변 경관을 바라보면서 당시 시대상황을 가늠해 보며 탐방을 이어갔다.
운두저촌은 조선의용대의 두번째 주둔지다. 마을 관문인 남각에는 선전 문구인 우리말 글씨가 벽면에 남아 있었다. '왜놈의 상관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가 바로 그 내용이다. 지금은 글씨 상당 부분이 지워져 있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한글로 쓰인 문구는 의용대의 기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실감케 했다. 마을 입구에 오롯이 피어 있는 무궁화나무도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이 무궁화나무는 조선의용대가 이곳에 주둔하던 당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기상과 절개를 무궁화꽃이 그렇게 대변하고 있었다.
다음은 석문촌이다. 이곳은 윤세주와 진광화 열사가 최초로 안치된 곳이다. 숨진 그해 10월 이곳으로 안치됐다. 또 이곳에는 지난 2004년 개관한 '조선의용군 열사기념관'도 있다. 1층짜리 건물에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시간순으로 여러 사진과 우리말로 전시해놨다. 탐방단은 특히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에 오래 머물며 사진촬영과 함께 여러 기록 등을 수첩에 적었다.
다시 이동한 곳은 중원촌. 윤세주 열사 전사 이후 조선의용대가 정착한 곳이다. 이 때부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확대 개편됐다. 의용대는 주로 사찰을 주둔하기 위한 장소로 삼았다. 이곳에도 의용대가 머물던 '원정사'라는 절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던 우리 민족의 정서가 의용대에도 이어져 의용대가 사찰을 중심으로 주둔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남장촌은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주둔지다. 조선의용군 총본부와 조선혁명군정학교(1944년 9월 설립)가 있던 곳이다. 건물은 현재 유치원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 교장이던 정율성(1914~1976)은 광주 출신으로 '중국인민해방군가'와 '조선인민해방가'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탐방단은 이곳을 끝으로 이날 일정을 마치고 다시 안양시 임주로 3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13일 넷째날, 탐방단이 긴 시간 동안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태항산대협곡에 들어서기 위해서다. 이 지역은 조선의용군과 여러 독립투사들의 발길이 거쳐진 곳이다. 탐방단은 이 일대를 돌아보며 중국의 거대한 산의 장관에 한번 놀라고 이곳을 걸어다니며 누볐을 열사들의 수고가 떠올라 또 한번 놀랐다. 이곳에는 중국의 '그랜드캐뇬'이라 불리는 석판암 풍경구가 눈길을 끈다.
점심을 먹고 중국 최고의 풍경구로 꼽는 곳 중 하나인 천계산으로 향했다.
이곳의 절경은 괘벽, 운봉화랑이고 1~7 전망대에 올라 산세를 바라보는 것도 운치 있다.
특히 이곳에는 '십자령'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 골짜기는 중국 8로군과 조선의용군이 연합해 싸운 항일 무장투쟁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당시 일본군이 약 4만명의 군대를 투입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여 윤세주·진광화 등 조선의용군이 이곳에서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 전투기가 십자령 골짜기를 폭격하면서 두 열사는 장렬히 전사했다. 중국 8로군 중에는 중국 인민 영웅 덩샤오핑(鄧小平)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닷새째 14일, 이날은 또 비행기를 타고 계림으로 향해야 해 3시간 여 버스를 타고 정주공항으로 이동했다. 탐방단에게는 이날이 휴일과도 같았다.
엿새째 15일, 계림에서 차로 약 3시간 떨어진 유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있던 이곳은 그야말로 참 의미있는 곳이다. 독립투사들은 지난 1938년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6개월 가량 유주에 머물면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 중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연극공연과 가두행진, 선전문배포 등의 활동을 했다.
탐방단은 이곳에 마련된 유주 임시정부기념관을 방문해 그곳에 전시된 사료들을 살피며 연신 감탄을 이어갔다.
한 단원은 '상해 임시정부기념관보다 더 잘 마련돼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념관을 나와 인근의 유후공원도 들렀다. 공작대가 결성지이자 주요 활동지로 삼은 곳이다.
탐방단은 이날 주간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 후, 모처럼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인상유삼저공연을 보며 휴식을 가졌다.
중국에서의 마지막날 16일, 이날은 관광지로 유명한 계림의 곳곳을 둘러봤다. 이강을 유람했고 모노레일을 타고 관암동굴을 일주했다. 또 조선의용대본부터인 칠성공원도 들르고 리프트로 909m에 달하는 요산을 왕복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중국에서의 6박 8일.
일행은 버스 안에서 이번 탐방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장은 "한번 체험을 하는 것이 백번 책을 보는 것과 같다"며 "조선의용대의 목숨을 건 항일투쟁 활동을 다시 한번 마음 속에 되새기는 계기가 됐길 바라고 이제는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우리가 되자"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