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四端,
단시조로 푸는 네 가지 실마리
성국희
죽는 날까지 수행의 과정에 놓인 삶, 이미 오래전에 성인聖人들은 다양한 철학을 논하며 풀이하고 정리했다. 해답은 없다는 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묻고 또 답을 찾으며 시간 속을 걷고 있다. 그러면서 다양한 철학적 풀이를 잇대어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 풀이들은 다방면에서 보면 맞기고 하고 틀리기도 하다. 옳고 그름을 따져 갇힌 신념으로 일관하기보다는 개인과 사회의 조화로운 삶을 위한 고민의 여러 갈래 뿌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함부로 깊이와 넓이를 재며 판단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맹자는 인간 본성의 도덕적 씨앗을 사단四端, 네 가지 실마리로 풀었다. 문학이 품고 있는 방향성의 가치는 규정지을 수 없이 다양하다. 인의예지가 지닌 가치 실현 또한 문학 속에서 마땅히 실현되어야 한다고 본다. 쓰는 자들은 내면화되어 있는 본성을 문장 속으로 끌어낸다. 그 지점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삶으로 이끌고자 애쓴다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 편의 글이 안고 있는 가치 범위를 하나의 주제에 가두어 바라보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님을 안다. 다양성의 시대에 철학적 이론을 대하는 태도 또한 유연해야 하는 것임을.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읽어야 마땅할 테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이렇게도 한번 읽어 본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울려고 갔다가
울지 못한 날 있었다
앞서온 슬픔에
내 슬픔은 밀려나고
그 여자
들썩이던 어깨에
내 눈물까지 주고 온 날
-강현덕 「기도실」
기도실에서 인仁의 실마리를 풀어본다. 인간은 모두 울면서 태어났고 울어야 하는 존재이다. 내가 죽어 울지 못하는 날이면 남이 대신 울어준다. 그렇게 울음이란 생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기도실이 있다. 그것은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이기도 하다. 고통을 짐 진 채 그 공간을 찾아드는 순간이 많지 않기를 바라지만, 하지만… “울려고 갔다가 울지 못하는 날”도 있다. 어쩐 일인지 그곳에는 통곡도 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는 드깊은 울음이 있다. “앞서온 슬픔에 내 슬픔은 밀려” 난다. 아, 쓸쓸한 어깨도 바라보는 눈빛도 말을 잃어버렸다. 이런 순간 위로의 말은 사치이다. 그저 “내 눈물까지 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큰 위로인 듯하다. 그러면서 내 슬픔도 위로 받는 것은 어떤 이치일까. 타인의 슬픔 앞에 드러나는 마음 바탕에 깔린 선한 본성, 그 본질을 더듬어 보며 행간 위에 오래 머물러 본다. 기도손을 하고.
#수오지심羞惡之心
아슬한 물방울이 암반에 홈을 파듯
적벽의 소나무가 바위를 쪼개내듯
결박된 봉두난발이 한 시대를 깨우듯
-김덕남 「협객을 기다리다」
시대를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며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협객을 기다리는 마음, 아니 어쩌면 누구나 협객이 되어야만 하는 정신으로. “결박된 봉두난발” 그 피 묻은 걸음을 걸었던 전봉준의 실천은 “한 시대를 깨”웠다. 실천하지 않는 정신은 관념일 뿐이다. 허공에서 흩어질 말뿐인 허상이라면 물 한 방울도 바다에 닿지 못하고 뿌리는 바위를 쪼개며 뻗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단박에 시대를 뒤집는 혁명을 꿈 꿀 수는 없지만 “아슬한 물방울이 암반에 홈을 파듯” 그리고 “적벽의 소나무가 바위를 쪼개내듯” 우리의 정신은 밝고 바른 곳을 향하여 깨어있어야 한다. 소신 있는 마음 하나가 또렷한 길 하나를 새겨낼 것이니.
전쟁은 평화를 이길 수 없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나라와 나라가 더는 핏물로 얼룩지지 않길 바라본다. 한 시대를 깨우는 협객을 기다리며, 그 협객이 우리 스스로가 되길 빌며.
#사양지심辭讓之心
한 번쯤 사람으로
살았으면
됐지 뭐
한 번쯤 눈에 띄는 곳
서봤으면
됐지 뭐
한 번쯤 자리 지키다가
녹았으면
됐지 뭐
-조경선 「눈사람」
그랬으면 됐지 뭐, 왠지 이 말에는 겸손과 사양의 예禮가 엿보인다. 사람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사람도 때로 짐승이 되는 세상, 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는 일은 복된 일이다. 사람다운 건 무엇일까. 짐승과의 구분은 지능일 텐데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그 생각이 참되게만 쓰이는 건 아니다. 그 결과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보면 눈사람이 진정한 성인聖人이다. “한 번쯤 사람으로 살았으면”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도 족한데 “한 번쯤 눈에 띄는 곳”에도 서보았으니 더욱 고마운 삶이 아니냐고 겸손의 발언을 한다.
그렇게 무엇이든 한 번이면 된다고, 더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한다는 건 그 한 번에 얼마만큼의 지극한 정성을 쏟았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그는 “한 번쯤 자리 지키다가 녹았으면 됐지 뭐”라는 종장을 남긴다. 이 문장이 끝나는 지점에선 어떤 욕망도 미련도 남김없이 녹아버린 듯하다.
#시비지심是非之心
대숲에 부는 바람 소리
한밤에 눈 지는 소리
백운산 찬 달 아래
거닐다 문득 서서
대처럼 굽히지 말자
다짐하던 옛 기억
-이은상 「대」
저마다의 소리를 가진 우리는 저마다의 소리를 내야 한다. 때로는 당차게 때로는 나직하게. “대숲에 부는 바람”은 대숲의 소리를, “한밤에 눈 지는 소리”는 눈의 소리를 낸다. 그렇게 자연은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고 화합할 땐 화합하는 미덕을 지녔다. 자연의 소리가 문명의 소리보다 아름다운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의 소리는 어떤가. 우리는 때로 시시비비를 따지며 소리를 높인다. 소리를 지른다는 건 내면이 약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일일 것이다. 묵직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힘, 판단이 선 옳은 일에 “대처럼 굽히지” 않는 정신은 얼마나 강인한 힘을 가지는지. 난삽하고 혼탁한 세상일수록 “찬 달 아래” 홀로 서서 되짚어 볼일이다. 우리는 과연 옳은 일을 옳다,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는 꼿꼿함을 지니고 살고 있는지. 대숲에서 맞는 바람 앞에 대나무를 올려다보며 울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처럼만 살 수 없기에?
#에필로그
희미하고 희미해지다
끝내는 잊혀질
한없이 생략되고
행렬에서 열외列外되는
불우한
운명의 손금에
칼금을 긋고픈 밤
-선안영 「눈 오는 밤」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나라와 나라가 단체와 단체가 개인과 개인이 자아와 자아가 또는 개인과 단체가 개인과 나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더욱 잊지 말아야 할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일깨워 보고 싶어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 협객을 기다리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 눈사람의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 대나무의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풀어보았다. 그 정신에 먹을 찍어 옮겨 보았다. 오독誤讀이 있겠지만 바른 정신을 탐하고자 애쓴 마음을 이곳에 함께 녹인다.
파란만장 우리의 생이 “희미하고 희미해지다 끝내는 잊혀”지더라도 소중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한없이 생략되고 행렬에서 열외列外되”더라도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다 우리 “불우한 운명의 손금에 칼금을 긋고픈 밤”이 오더라도 생은 아름다운 것이며 살만한 것임을 알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눈 오는 밤의 의미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시조21》2024. 겨울호
성국희 : 2011년 서울신문,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6년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외. 시조집 『꽃의 문장』 『미쳐야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