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솔라따(Consolata,위로) 수도회는 1901년 이태리 토리노에서 요셉 알라마노(G. Allamano)에 의해 결성되어 현재 24개국에서 2천 명의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다. 한국에는 1988년에 4명의 신부가 들어왔고, 현재 6명의 신부가 역곡 본원과 옥길동 '위로의 샘터', 구룡 마을의 세 공동체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예수를 말하지 않는 선교
1991년 동인천 만석동 달동네에 네 명의 외국인 신부들이 들어왔다. 주민들은 그 신부들이 외국인일 뿐이지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을 귀찮게 하리라 여겨 처음에는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신부들은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주민들과 어울리는 것뿐이었다. 마늘을 까고 있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끼여 매운 내에 눈물 흘리며 거들고, 마을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참여하고, 마을 공부방에서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주민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주민들과 친해진 후에도 예수를 믿으라거나, 가톨릭 신자가 되라는 소리를 꺼낸 적이 없었다. 신부들은 칠 년 동안 달동네 주민들과 함께 살았을 뿐이다. 그러면 선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박호(Fransisco Lopez)신부는 말한다.
“공부방에서 만난 자원 봉사자들이 모두 서른 명이었는데 가톨릭 신자는 두 명뿐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서른 명 모두 가톨릭 신자가 되었어요. 지금 그들 중 몇 명이 만석동에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고 있어요.”
신부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다가오거나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말하기보다는 선한 행동을, 교리를 알리기보다는 먼저 삶을 함께 하는 “24시간 선교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만 남기는 수도회
일부 목사들이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교회를 세습하려는 이유는 자기 인생을 모두 바쳐 그 교회를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교회가 자기 인생의 결정체라는 관념이 교회를 ‘자기 교회’로 여기게 하고, 그래서 자기 교회를 믿고 맡길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헌신적 희생과 소유 의식이 동전의 양면일 수도 있다.
꼰솔라따 수도회 신부들은 그 욕망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달동네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산 지 칠 년 후 신부들은 만석동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공동체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과 삶을 지탱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꼰솔라따 수도회의 선교 원칙 중 하나는 선교사들이 개척한 공동체가 성숙해지면 다른 수도회나 그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이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일군 공동체라 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꼰솔라따 수도회가 성공적으로 활동했던 지역일수록 정작 수도회가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만석동을 떠난 신부들은 역곡 본원을 중심으로 빈민사역을 계속했고, 올 9월에는 두 명의 신부가 서울의 대표적 빈민지역인 구룡 마을 산동네에 들어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 마을의 공동체가 성숙해지면 신부들은 또 다시 더 가난하고 힘겨운 곳을 찾아 떠나갈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들의 사랑만이 남아 그리스도를 기념할 것이다.
더디 가며 다른 문화를 배우는 신부들
야생화 천지인 숲길이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은 숲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꽃과 나무와 함께 걷는 사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 들어온 네 명의 신부는 처음부터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교의 기본 요건을 결여한 것 같지만, 실은 한국의 문화를 천천히 익히려는 의도적 방기였다.
“우리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으므로 모든 것을 천천히 하게 되었고, 그만큼 한국 문화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었어요. 뭐든지 물어봐야 했으니까요.”
신부들은 ‘기역’, ‘니은’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말을 익혀갔고, 도시의 빈민가, 농촌, 탄광, 그리고 이웃종교의 공동체들을 돌아다니며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체험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3년 동안 계속했다.
꼰솔라따 수도회는 항상 교회의 경계 밖으로, 그리스도인이 가장 없는 곳,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곳을 찾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럴수록 경험 많은 선교사를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수도회에서는 오히려 선교 경험이 전무한 젊은 신부들을 파견한다. 이런 원칙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른 나라에서 선교 경험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선교지에서 이전의 경험을 반영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럴 경우 선교지의 문화를 밑바닥에서부터 배울 수 없어 토착화에 실패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박호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 방송사 기자가 사전 약속없이 찾아와 ‘보신탕’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한국의 음식문화를 왜 외국에서 강제하려는지 모르겠군요. 잔인하게 죽이는 것만 빼곤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문화를 모르고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이다.
이웃종교와의 열린 대화
1988년 한국에 들어올 준비를 하던 신부들은 “한국에서의 우리 활동에 대한 꿈”이라는 주제로 피정을 가졌다. 이때 서원한 것 중의 하나가 이웃종교와의 대화였다. 수도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한 후, 1993년에 새로 파견된 두 명의 신부는 절을 다니며 불교를 배웠고, 나중에는 대학원까지 다니며 한국의 종교를 공부했다. 그후 이웃종교인들과 폭넓게 만나며 대화 모임을 준비했고, 드디어 1999년 5월 역곡 교외 조용한 마을 옥길리에〈위로의 샘터〉를 세웠다.
아담한 한옥 두 채가 숲과 어우러진 이곳은 “종교간 대화를 위한 영성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이곳에서는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명상과 삶의 나눔을 가져왔다. 종교가 무엇이든, 종교를 가지고 있든 없든 자유롭게 만나 신과 인간과 자연을 명상하고 삶을 나눈다. 모임에 참가한 종교인들은 이웃종교의 깊은 경험을 함께 함으로써 자기를 반성하고 이웃을 이해하는 상호 성숙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이번 12월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저녁마다 모임을 갖기로 했고, 내년 1월부터는 열린 영성, 대화, 기도의 시간으로 짜여진 ‘영성의 하루’라는 프로그램도 실시할 예정이다.
꼰솔라따 수도회 신부들이 종교간 대화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방편이 아니다. 이들을 대화로 이끄는 힘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의 깊이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을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열린 영성, 모든 사람을 위한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박호 신부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이들에게 도달한다고 믿는다. 설령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일까?
“예수를 모른다고 어떻게 착한 사람이 지옥에 갈 수 있겠어요? 그는 예수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에요.”
수도회 신부들의 공동체적 삶
보통 가톨릭 수도회라고 하면 엄격한 규칙과 일과를 떠올리게 되지만, 꼰솔라따 수도회에는 특별히 정해진 규칙이나 계획이 없다. 물론 월요일마다 세 공동체가 모여 각 공동체의 경험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매월 셋째 월요일은 토론과 침묵 산책을 함께 하는 피정을 갖는다. 그러나 그 외의 날에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 시간을 가질 뿐 그날 그날의 일과는 아침 식사하면서 정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러한 무계획성은 신부들이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폐쇄적 수도회일수록 종교적 일과를 철저히 지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꼰솔라따 수도회 신부들에게는 정해진 일과보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더 중요했다. 기도할 시간이 되었다고 사랑과 위로의 손길이 절박한 사람들을 떠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꼰솔라따 수도회의 규칙은 사랑이며, 일과를 정하는 이는 신부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다른 문화에 대해 관용적이고 겸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수도회 생활 안에 이미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수도회에 입회하려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나라에 선교사로 나가 평생토록 일한다.”는 서약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각 국 수도회는 여러 나라 출신의 신부들로 구성되는경우가 흔하다. 지금 한국의 수도회에 있는 여섯 신부들의 출신 국가도 모두 다르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서 영성-생활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은 수도회 바깥의 문화를 존중하며 만날 수 있는 훈련이 되는 셈이다.
수도회의 젊은 신부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와 낯선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수도회는 위계적 질서보다는 가족적 분위기를 중시한다. 13년을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문화의 차이는 더 이상 문제거리가 아니다. 함께 신앙과 인격을 성숙시켜온 이들은 ‘다름’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있다.
기차에서
역곡역까지 차를 태워준 라파엘 신부와 헤어져 서울행 전철을 탔다. 흐린 늦가을의 오후, 열차 안의 사람들은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박호 신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번은 어떤 자매가 전철 안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녀는 그 안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이 목소리를 높였어요.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책을 읽던 한 청년이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니 종교가 뭐냐고 묻더군요. 청년이 불교신자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부처는 악마다!’ 라고 소리쳤어요.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겠어요?그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소개하는 예수’를 거절하는 것이에요. 삭개오가 예수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뽕나무에 올라가야 했던 것은 예수를 따르는 군중들에 막혀서였죠. 지금도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서울로 오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지금도 열차 노선 여기저기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위협이 사람들의 쉼을, 예수와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없이 자기 이야기만 하려는 그리스도인들과, 예수를 말하지 않고 선교하는 꼰솔라따 수도회 신부들 중에 진정으로 예수를 전하는 이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