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의 세계관은 과학의 발전과 깊이 연관되어 발전하여 왔다. 그 때문에 유물론 철학이라 하더라도 늘 같은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그때그때의 과학 발전의 수준에 따라서 여러가지 형태가 있었다.따라서 중요한 것은 유물론의 원칙적인 관점 그 자체를 유물론의 역사적인 특정한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보면 물질적인 것이 근원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물질적인 것'을 넓이·굵기·무게 등을 가진 물체적인 것으로 한정하여 파악하던 유물론의 형태도 있었다. 18세기의 프랑스 유물론이 그러하며 <인간 기계론> 같은 책도 이러한 입장에서 쓰였다. "인간은 대단히 복잡한 기계"이고 결국은 정교한 '용수철의 집합'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당시 어느 정도 완성된 과학이라고는 '물체 역학' 밖에 없었다는 사정에 기인한 것이다. 즉 이 역학 이론을 유일한 척도로 하고 기계를 모델로 하여 우주 만물을 이해하는 것이 유일한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계론적 유물론이라 불린다. 기계론적 유물론의 결함에 대해서는 제3장에서 더욱 자세하게 생각하기로 하자.
그것은 종교적인 미망(迷妄)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가장 진보적·합리적인 이론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종교적인 미망을 사상적인 무기로 하고 있었던 봉건 권력에 대한 투쟁의 무기로서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자연분야만 보더라도 물질이 소위 '물체'의 형태 이외에도 다종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 '물체 역학'의 법칙이 전부도 아니고 기본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차례차례로 밝혀왔다. 예를 들면 '물체 역학'으로 소립자(素粒子)의 세계와 생물의 세계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계론적인 자연관은 완전히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오늘날의 조건에서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이제 반동적인 의미밖에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반동적인, 즉 과학의 진보에 등을 돌린 유물론의 형태 - 타락한 형태 - 도 역사에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와 같은 시대에 나타난 속류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콩팥이 오줌을 분비하고, 간장이 담즙을 분비하는 것처럼 뇌수는 의식을 분비한다"고 주장했다. 그 대표자인 포그트(1817-1895)는 정치적으로도 악질적 반동이었다. 한때는 부르조아적 급진파로서 행동했지만 뒤에 나폴레옹 3세의 비밀 하수인이되어 마르크스에 대한 비방, 중상 모략의 선봉을 맡은 인물이다. 엥겔스는 그의 철학적 활동에 대해 '유물론을 팔아먹은 속류화 전문 행상인'이라며 통렬하게 비난했다.
더구나 그것만이 아니다. 낡은 유물론은 자연과학이 고작 자연의 극히 한정된 영역을 그것도 불충분한 형태로밖에 해명하지 못한 역사적인 사정에 제약됐을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 아직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립이 지체되어 있었던 역사적 사정에 의해서 크게 제약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의 다종다양한 영역과 그것들의 상호연관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크게 발전하여 사회과학의 기초가 확립됨으로써 유물론은 이러한 역사적인 제약에 묶여 있는 상태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되었다.
이제 우리는 자연의 특정 영역의 법칙만을 척도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려는 옹졸함은 물론, 일반적인 자연과학만을 척도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려는 좁은 안목도 극복하였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자연 및 사회에 대한 과학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더라도 변함없이 기 기초에 존속하며 그들의 끝없는 발전을 이끌어 갈 기본적 관점인 유물론의 원칙을 확립하여, 그것을 우리들의 세계관의 근본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유물론의 모든 역사적 발전을 통해서 변함없이 그 기초에 존속하여 왔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을 명확한 형태로 자각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자연과 사회는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밖에, 의식보다 앞서서 -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2.그것은 어떠한 초감각적인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의 감각의 대상이 되는 성질을 가진다.
3.이 감각을 실마리로 하여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지나치지만큼 당연한 것뿐이지만 이들은 각각 1주관적 관념론의 주장에, 2객관적 관념론의 주장에, 3불가지론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고 유물론의 원칙적 관점은 이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철학적 세계관에서 문제가 되는 '물질'이란, 1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고, 2우리 감각의 기본을 이루며, 3감각을 실마리로 하여 인식할 수 있는, 그러한 객관적 실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물질의 어떠한 특정 형태로 고정되어 파악되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범위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너무 추상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추상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물질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자각적으로 확정할 때 비로소 세계의 모든 영역에 참으로 유물론을 관철시키는 구체적인 과제,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무한한 전진을 보장하고 그것을 이끌어간다는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유물론의 원칙적인 관점을 유물론자로서의 원칙적인 태도의 문제로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관념론적인 선입견, 어떠한 주관주의적인 독단도 배척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즉 어떠한 '신비'를 가정하거나 '마음가짐'의 문제로 모든 것을 해소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객관적인 본질에 확고하게 눈을 돌린다. 주관적인 의도, 바람, 특정의 경험, 교조 등으로부터가 아니라, 개관적인 사실에 확고하게 입각하여 거기로부터 출발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세계는 알 수 있다는 확신, 미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그것에 의해서 부단하게 윌들의 인식을 전진시켜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힘을 확대하여 간다.
이상이다. 이러한 유물론의 원칙적 관점·태도야말로 우리의 인간다운 생활의 실현, 그를 위한 올바른 활동방식을 확립시켜 주고, 인간의 인식과 실천의 진보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특정한 경험, 특정한 이론적 명제를 절대화하여 그것으로부터 출발하고 그것만을 가지고 현실을 결론지어 가려는 태도를 경험주의, 교조주의라고 부른다. 경험주의, 교조주의는 모두 실제 활동에서 관념론 - 주관주의라고 불리는 것 - 에 불과하다. 관념론의 관점은 더욱 다양한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의 주위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반복해서 주장되며 일상적으로도 상당히 넓게 퍼져 있는,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세상만사가 모두 운명이다" 따위의 사고방식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주관적 관념론 및 객관적 관념론과 통하는 사고방식이 아니겠는가. 거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대개 "그러므로 방법이 없다"는 체념이다. 체념이라는 형태를 가지지 않고 "그러니까 계속 분발하라"고 하는 경우에도 "마음가짐을 바꾸어도 결국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계속 분발하라"고 하든가, "불평불만을 하지 않고 노력하고 있으면 운이 돌아온다. 계속 분발하라"고 하는 식이다. 이때의 분발은 환경변혁의 분발이 아니라 환경순응을 위한 분발일 뿐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와 같은 종교에서, 또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와 같은 봉건적 악덕에서 보이는 노예적인 생활방식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