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빛 <작가와 함께> 제3호를 펼쳐 <행호관어도>를 본다.
행호관어도
- 행주나루
차용국
크루즈가 지나간 물길이 잦아지자 작은 카누들이 줄지어 올라온다. 멀리서 다가오는 카누들은 흐릿해서 작고 느린 오리 떼처럼 보인다. 나는 하류의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카누들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리 사라지는 경로에 시선을 찍으며 바라보았다. 카누마다 1~2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카누 양쪽으로 번갈아 노를 저어 물을 밀어내며 전진했다. 그들의 팔 동작은 규칙적이며 역동적이다. 카누가 지나간 물 위에 요트가 뜬다. 요트마다 1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데, 그들은 돛을 움켜쥐고 맞바람과 옆바람을 이용하여 지그재그로 이동한다. 그들의 몸동작은 섬세하며 기민하다.
강변 모래톱으로 새들이 찾아온다. 새들은 떼 지어 몰려오거나 홀로 은근슬쩍 날아온다. 새들은 강물과 모래톱을 오가며 분주하다. 새들이 모여 퍼덕이는 강물은 활기차고 새들이 떠난 모래톱은 고요하다. 능수버들은 푸름을 더해가는데, 강 건너편 가양산은 미세먼지에 가려서 흐리고 멀어 보인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강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탄다.
하류의 강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만물은 제각각의 속성과 방식으로 진지하고 열성적이다. 나는 이 다채로운 풍경과 삶의 방식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림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나의 언어의 붓은 무뎌서 문장은 제모습을 갖추며 쭉쭉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매듭짓지 못한 허약한 미완의 풍경을 접고 수변을 달렸다. 쌩쌩 달려드는 신형 자전거에게 길을 비켜주면서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터덜터덜 달리는 내 구형 자전거는 느리다.
강 건너 양천 현감으로 부임(1740년, 영조 16년)한 겸재 정선(1676~1759년)은 이듬해 궁산(宮山, 76m)에 올라 행주나루를 바라보며「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를 그렸다. 궁산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강변의 나지막한 봉우리다. 겸재는 이곳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담아있는 한강 주변의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는 양수리에서 시작하여 행주나루에서 마친다. 겸재의 시선은 행주나루보다 더 하류의 강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행주나루는 겸재가 보고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마지막 하류의 강이다.
「행호관어도」에서 원경의 산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낮아진다. 오른쪽에 우뚝 솟은 산은 북한산 준봉과 능선의 형상처럼 보이는데, 거기서부터 겹겹의 산들이 출렁이며 왼쪽으로 흐른다. 산세는 한강의 흐름을 닮았다. 그곳은 아득히 먼 여백의 하늘을 배경으로 고요하다.
강 건너 행주나루 수변에는 능수버들이 숲을 이루고, 덕양산(행주산성) 산자락에는 기와집이 즐비하다. 이 저택들은 고관들의 별서다. 숙종의 사돈 김동필(1678∼1737년), 좌의정을 지낸 송인명(1689∼1746년) 등, 여러 고관이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별서는 농지에서 떨어진 한적한 터에 지은 집으로 지금의 별장과 비슷하다. 예나 지금이나 별서니 별장이니 하는 가옥을 따로 지을 만한 사람은 흔치 않고, 그것들이 지어진 주변의 풍광은 빼어나다. 행주의 강을 ‘행호(杏湖)’라 부른 것은 ‘강폭이 넓고, 물살이 잔잔하여 호수와 같다는 뜻’이니, 행주 산수의 수려함에 사족을 덧붙이면 문장이 민망하다.
행호에 배가 떠 있다. 지금은 사라진 돌방구지 바위 아래에 낙엽같이 작은 14척의 어선이다. 배마다 개미보다 더 작은 3~5명의 어부가 타고 있다. 배와 어부가 하도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고기 잡는 몸짓을 겨우 찾아낼 수 있다. ‘행호관어(杏湖觀漁)’는 행호의 고기잡이를 구경한다’라는 뜻이니, 고기잡이가 그림의 중심일 듯한데 그게 돋보이지 않는다.
겸재가 65세(1741년)에 그린 「행호관어도」의 행주나루 풍경은 양반들의 목가적인 이상향처럼 보인다. 그곳은 행주 강촌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눈과 가슴에 비친 풍경이 아니다. 「행호관어도」에는 저지대에서 홍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움막 같은 초가집이 없고,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몸부림과 그 속에서 울리는 서정의 소리가 없다. 그들의 삶의 소리는 강 건너 궁산에 닿지 않아서 겸재는 듣지 못했던 걸까. 삶의 현장에 들어가 자세히 보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과 서정은 실제와 다르고, 심지어 사실이 왜곡되기도 한다. 나는 자연과 삶의 배경으로 깊이 들어가 그 속에서 휘젓고 다니는 날것의 언어를 만나고 싶었다.
행주는 높은 산이 없고 낮은 구릉성 산지가 듬성듬성한 평야 지대다. 한강과 창릉천이 수천 년을 실어와 쌓은 토지는 비옥하고 물이 풍부해서 질 좋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제방 시설이 견고하지 못했던 시대에 범람하는 강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야트막한 산자락은 홍수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지대였다. 곳곳의 구릉을 중심으로 여러 명문 세족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들의 토지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사패지(賜牌地)였다. 봉대산 자락의 강매마을은 보성 신씨, 무원마을 번데미공원 주변은 진주 류씨, 소만마을 주변은 청주 한씨 등등…….
행주의 민중은 저지대에 납작 엎드려 살았다. 그들은 습지를 일궈 생산한 쌀, 보리, 콩 등을 생산했고, 행호에 남루한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았다. 그들은 생산한 곡식과 어류를 봉대산 아래의 강매석교를 통해 창릉천을 건너 수색을 거쳐 서울로 내다 팔며 살았다.
행호에서 최고로 치는 물고기는 웅어였다. 웅어는 2월에 하류의 강 갈대밭에 알을 낳는데, 맛이 일품이어서 임금에게 진상하는 행주의 특산물이었다. 조선은 사옹원 소속으로 4명의 위어소(葦魚所) 관리를 두어 웅어 진상을 맡겼고, 정조 9년(1786년)에는 행주에 웅어 보관용 얼음창고인 석빙고(石氷庫)를 설치했다. 이 귀한 웅어가 행주 민중의 삶에 번영을 견인할 수 있었을까?
양반집 처녀 난사를 사랑한 행주 어촌의 어부 금원은 난사가 병에 걸리자 행호에서 몰래 웅어를 잡아 난사에게 먹였다. 웅어는 행호의 어부도 함부로 잡아 처분할 수 없는 특산물이어서, 금원은 이를 어긴 죄로 석빙고에 갇혀 죽고 말았다. 웅어를 먹고 병이 나은 난사는 이 소식을 듣고 행호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 후로 행호에는 유독 아름다운 은빛 웅어 두 마리가 나타나 사이좋게 헤엄치며 다녔다고 한다.
행주나루에서 전해오는 이 전설은 애달프다. 행호의 웅어는 임금이나 고관들이 극진한 별미였고, 그들의 전유물이었다. 행호의 웅어는 행주의 것이지만 행주 민중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다. 겸재가「행호관어도」를 그린 18세기 중엽의 행주나루는 영세한 어촌이었고, 수려한 산수의 이면에서 민중의 삶은 고달팠다.
지난겨울 끝 무렵에 행주나루에 나갔을 때, 늙은 어부는 쇠꼬챙이로 작은 어선의 어창(魚艙)에서 얼음을 쪼아 걷어내며 출항을 준비했다. 내가 웅어를 잡느냐고 물으니 그는 손을 내저으며 요즘 행호의 웅어는 고약한 냄새가 나서 사람이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염됐기 때문이란다. 나는 깨진 얼음조각을 밀어내면서 행호로 나아가는 그의 주름 깊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때 임금과 고관들이 극찬한 행호의 웅어를 가축 사료용 포대에 던져버리는 어부들의 볼멘 몸짓이 떠올랐다.
18세기 강 건너 궁산에서 바라본「행호관어도」이면에 숨어있는 귀한 웅어나, 21세기 갈대숲을 떠도는 천덕꾸러기 웅어는 여전히 민중의 삶과 멀다. 나는 본성을 회복한 은빛 웅어가 맑은 행호를 헤엄쳐 어부들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노을을 등지고 만선의 기쁨이 출렁이는「신행호관어도」가 행주나루에 펼쳐지기를 소망했다. 수변에서 살구꽃 봉오리가 터질 듯 팽팽하다. 곧 활짝 필 태세다.
첫댓글 늘 지적 욕구를 채워주시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