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63
(선조 13)
紅衣將軍 郭再祐와 의병들
조선은 士大夫의 나라였다. 사대부는 의무는 적고 (병역의무도 없고), 권리는 많았다. 그 많은 것들을 누리던 사대부들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도 도망치기에 바빴고, 방어의 책임자들 조차 대부분 倭軍의 모습만 보고도 도망쳤다.
이러한 때에 士大夫의 명예를 지킨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바쳐가며 倭敵과 격렬하게 싸운 義兵將 들이다.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는 倭敵이 釜山浦에 상륙하고 열흘이 지난 뒤 경상도 宜寧(의령)에서 家産을 털어 의병을 모집한 애국지사다.
郭再祐의 본관은 玄風이다.
宜寧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왜군 보급로의 중요 지점이었는데, 郭再祐는 치고 빠지는 (요즘으로 말하면 게릴라전)작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버리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곽재우는 적의 보급 수송선단이 지나가는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두었다가 敵船이 여기에 걸려 우왕좌왕하거나 전복될때,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倭敵의 수송선단을 괴멸시키는 등, 임진왜란의 방향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곽재우는 다른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망토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하늘이 내린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 부르며 신출귀몰한 특수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홍의장군이라는 명칭이 유명해지자 여러 의병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복장을 하게한 뒤 사방팔방에서 출현하도록 함으로써 왜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술을 구사했다. 連戰連勝으로 홍의장군 곽재우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으로, 적들에게는 공포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 외에도 高敬命, 趙憲, 金千鎰, 金沔, 鄭仁弘, 鄭文孚, 李廷암 등, 외에도 상당수가 있었으며, 1593년(선조 26) 正月에 明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 여 명에 달하였다.
의병이 官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이정암은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8개 항목의 軍律을 정했던바, 그 내용은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臨賊退敗者斬).
민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民間作幣者斬)”는 등, 엄격하기가 그지 없었다.
義兵은 그 어떤 代價도 보상도 바라지않고 무능한 官軍 대신 지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열세의 戰力임에도 불구하고 목숨바쳐 싸웠으며, 임진왜란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큰 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으나 그중에는 장렬히 산화한 분이 상당수에 이르렀으니 사대부 중에서도 이렇듯 爲民盡忠報國의 정신을 가진 이들이 다수였음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