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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첫사랑)
정현수
연한 붉은 조명 불빛이 화장기가 별로 없는 그녀의 뺨에 더 짙은 홍조를 그리고 있다. 사뭇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연민이 서린 듯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말했다.
"당신은 내게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막연이 느꼈던 묘한 연의 얽힘이라고 생각했다. 인연은 묘한 것이다. 누군가의 평범하고 싶어 했던 삶에 순리를 거슬려 반항이라도 하듯 애타하는 이들 삶에 파고 들어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편하고 돌발적이지 않는 순한 인연이 아닌, 불공평하고 마땅치 않는 만남이었다. 덤불 속에 살고 있는 엉겅퀴 같은 가시 나물 인연 같은 것이다.
섣달 막바지
눈 내리는 오후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적막한 촌가,
하이양 고적(孤寂)이 쌓이고 있습니다.
건너 황량한 잿빛 들판 덩그러니 볏단 위
싸늘한 냉정도 헤어지고 있습니다.
언덕 마루길 솜사탕 같은 사랑 흩어지고
그 너머 뒷동산 소쩍새 우는 자작나무 숲
마른 가지 위 쌀쌀한 고독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냇가, 깍아 세운 태고(太古) 같은 절리
과감히 버릴 수 없는 미련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를 잊은 채
정적을 감싸 냉정한 고요로 흩날리고
한 가닥 염치도 벗어난 몹쓸 양심에도
회오(悔悟)의 가책이 눈 되어 내립니다.
혼돈의 방랑자 마지막 꿈
은빛 머리 위 회오리치며
고통의 절규와 아쉬움의 미련이
소슬한 눈과 함께 그리움이 쌓이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일우'는 자기가 행운아라고 생각하곤 했다. 거슬리지 않는 그 바람 소리에 허무를 느낄 때, 그는 맘속 한 언저리에 꼭꼭 숨겨둔 잊히지 않는 오래전 기억을 떠 올린다. 아스라한 그때 그 기억이 처연하다. 어스름의 스산한 기운에 그 옛날 첫사랑의 추억이 잔잔한 설렘으로 다가온다. 절대 잊지 못할 일우의 첫사랑 이야기다.
78년 인가? 어수선한 여름 8 월 초였던가? 일우는 친구 K와 둘이서 여행을 떠났다.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한가운데 어떤 의미에 대해 추상적이었으며 시대의 이상적 관념에 머물러 우리와의 상관관계에 있는 모든 것들에 반항하거나 세상사에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 젊음의 표상이기도 하고 간섭받기 싫어하는, 세상과 부합되지 않는 우리의 퍼스낼리티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금은 철학적이고 센티하고 싶은 젊음에, '제임스 딘'이 방황에서 저항하듯 무작정 어디론가 가고 싶었던 때였다. 잠시 자유의 방종을 만끽하고 모든 것을 방관하려는 구경꾼으로 보내고 싶던 생각에 친구 K와 뜻이 일치해 여행을 떠났다. 그저 잠깐이라도 다 잊은 채 방임의 자유로 편안한 마음과 함께 곳곳을 돌아보며 작은 행복에 취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지불식간에 로맨틱한 감성으로 경험했던 소중한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냥 헐렁한 배낭 하나씩 매고 기차를 타고 내린 곳은 그의 고향 전주였다. 전주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무주 구천동으로 들어갔다. 며칠을 머물렀던 그곳 구천동과 전주는 일우의 인생에서 아쉬움이 많았던 곳이다. 어쩌면 죄책감까지 들게 했던 아련하고도 애처로움이 만들어진 곳이다. 원래 구천동에서 이틀, 지리산 근처 친구 집에서 한 사날, 그리고 여수를 돌아 친구 K의 고향 하동 집까지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우는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연히 일어나고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그만큼 소중한 것이 아닌가? 그녀와 함께 했던 짧았던 6 일이 오래전 기억이 됐지만, 이제는 그의 마음 한편에 새겨 저 지금까지도 깊게, 아주 깊게 그때의 추억이 깃들어 저 있다. 지금 그는 첫사랑의 로맨틱에 자부심과 함께 겸손과 온유를 느끼지만, 그 여인에 대해 함부로 글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조심성이나 한편 죄스러운 생각까지 든다. 그저 가련한 그녀와 함께 했던 시절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둘은 구천동 유원지의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고 덕유산 산행을 시작했다. 쉬엄쉬엄 온갖 것 구경하며 올라간 산행은 자연에 순종하며 거기에 휩쓸리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자연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었다. K가 일러 준 들꽃이었고 정상 올라가기 전, 분지의 올망졸망한 '에델바이스'의 군락은 평생 잊지 못할 슬픈 사랑을 상징할 것 같은 애련의 꽃이었다. 정말 쓸쓸하고도 수수하고 꾸미지 않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일우는 그 꽃이 하도 가엾게 처량해 보여 몇 송이를 케, 솜털이 상할라 종이에 곱게 싸 배낭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우린 내려와서 유원지 입구 한편에 있는 맥줏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고 술고래인 K는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사정없이 들이키고 있었다. 오늘 당장 막차를 타고 떠나야 함을 까맣게 잊은 채……
그리고 일우의 사랑은 에델바이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절에도 휴가철에는 관광객이 몰리던 때였다. 시즌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의 오후 늦은 평일인지라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쥔 장은 보이지 않고 여자 종업원 둘이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넷이서 술을 마시며 하찮은 화제들로 시작한 우리들의 어설픈 대화는 돌고 돌아 문학에서 합의를 이루어 냈다. 친구 옆자리에 앉았던 여인의 처량한 "달맞이꽃" 노래는 퍽이나 사연이나 의미를 둔 듯 애처로웠다. 그녀는 슬픈 멜로디와 그리움의 가사에 취한 듯 한참을 조용히 울먹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걸 느낄 수 있었고, 잠깐의 침묵과 여인의 지난날의 처지(?) 때문이었을까? 차분한 분위기의 애처로운 여운이 허공으로 천천히 흩어지는 연기처럼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듯했다. 이에 웬만한 시를 외우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분위기를 뛰우는 K는 분위기에 편승해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아주 애달프게 읊고 있었다. 달맞이꽃의 그리움과 기다림의 하소연에 윤동주의 시의 미련의 아쉬움으로 화답함은 그리움이나 아쉬움의 연관관계에서 서로의 공감을 공유하자는 뜻이었던 것이다. (일우는 그 당시는 몰랐지만 서울에서 다시 만난 K의 말에 의하면 그 시가 나라 잃은 윤동주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깊게 배어있는 고뇌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자연스레 이입하여 남녀 관계의 속성에 의도적으로 맞춘 것이었다. 여기에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두 단락만 적어본다.
돌아가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그들 모두의 자연스럽게 이어진 화음은 분위기를 그리 멋쩍지 않은 낭만으로 이끌었다. 때마침 밖에는 보름인 듯 밝은 달빛과 싸라기 같은 별빛이 가게들이 둘러싼 중앙 광장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건너 숲 위쪽의 별똥별이 별들에 싸인 하늘을 가로질러 빠르게 지나고 있다. 그 순간 모든 의미는 달빛 아래에서 아쉬움의 별을 헤는 환상의 밤 인양 우리의 단출한 파티는 따스하게 서로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모르고 K의 시 낭독과 여인의 노래는 계속 이어 저 갔고 드디어 그 여인, '은경'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뭇 조용했던 그녀는 그 당시 젊은이들의 이슈였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도마 위에 오르자 좀 더 적극적이지 못한 '베아트리체'의 삶에 연민을 느낀다며 '싱클레어'의 멘토인 데미안의 헌신은 어쩌면 여자의 희생과 인내의 삶에 일치할 수 있다는 듯 그 시대의 여인의 풍습들을 빗대 이야기했다. 어쩌면 자기의 어떤 사연의 경험에서 이야기하는 듯도 했다. 그러므로 터득한 삶의 무게를 조심스럽게 비유적으로 또는 삶의 지혜로 돌려서 이야기했다. 한 잔 술과 분위기에 말문이 터진 그 여인의 해박한 문학적 지식은 같이 생활했던 여인을 비롯, 우리 둘을 놀라게 했다. 결코 이야기가 비속하지 않았고 아는 체나 잘난 척이 아닌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흡인력이 있었다. 문학을 전공한 듯 시나 소설 등에서 자기 생각, 주장을 또렷하게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현대 시작(詩作)이 궁극의 도전이 아닌 너무 감정에 취우 쳐 자칫 센티멘털 연민의 굴레에 빠질 수 있다느니, 시어가 형식이나 회화적 요소로 치중해 자칫 독자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을 했다. 그러니 때로는 독자들이 이해가 쉬운 서정시를 많이 씀으로 호응을 얻는 것도 한 방법이라 말하며 자기 견해를 소상히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나도 세상도 우린 서로 몰라요. 서로 호기심을 가지면 좋으련만……"
일우는 그녀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날고 싶어 하는, 비상(飛上)에서 실패한 뒤 또 한 번 날고 싶어 하는 한 마리의 작은 새 같이 말했다. 귀를 쫑긋하거나 머리를 갸우뚱하며 잔뜩 두려움에 빠진 작은 박새가 희한의 세계에 빠져보고 싶은 듯 말한 것이다. 그녀는 멍한 모습으로 흠뻑 취해 있던 일우의 시선을 외면한 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그런 그녀가 마주 보기가 왠지 쑥스럽기도 했고 비로소 애틋했으며 가끔 스치는 살결의 부딪침은 들키고 싶지 않은 설렘이기도 했다. 그는 함부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지성이 깊은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막돼먹은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구차함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집 막걸리는 일찌감치 동나 있었고 맥주까지 넘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분위기에 젖어 마냥 행복하고 흐리멍덩한 몽롱 안에서 로맨틱한 분위기에 덤으로 취해 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자연스레 편이 갈라져 은경은 그의 어깨에 기대 즐거운 듯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K와 여인은 둘만의 대화에 진지하게 빠져 있었다. 뭔가 내 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나는 낮에 케 온 에델바이스를 그녀에게 주었다.
"어머! 에델바이스, 내가 좋아하는 꽃인데……"
그녀는 이 꽃을 솜다리라고도 했고 다행히 그 꽃을 좋아했다. 날이 새면 꼭 화분에 옮겨 심는다고 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그녀는 '아! 소담한 솜털'이라 말했고 솜털로 싸인 이파리를 더 좋아했다. 덕유산 정상 밑 분지에 널려 있다는 일우의 말에 그녀는 그 꽃의 군락을 보려 꼭 한 번 가고 싶다 했다.
일우와 K는 밝아오는 새벽녘에야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고 늦은 아침, 먹을거리를 준비한 은경의 상냥한 외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주인장 언니는 휴가철이 끝날 때라 월요일 오전에 영동 집으로 가면 토요일 점심쯤 온다 한다.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이틀만 장사하고 평일에는 술 손님이 오는 대로 둘이서 장사한단다. 이것도 8 월 중순, 앞으로 열흘 후 즈음에는 끝난다고 했다. 그러니 산에 데려다 달라는 은경의 말에 우린 오늘 떠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일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 여인은 집을 지키기로 했고 K는 덩달아 오늘 들어올 막걸리를 끝장낸다 하니 그로서는 그녀와 오붓한 한때를 보낼 것 같아 가슴 쿵쾅거리는 설렘이었다.
그녀가 정성껏 만든 주먹밥을 싸 들고 올라가는 산행은 엊저녁 마신 덜 깬 술도, 모자란 잠도, 또 한 번 올라가는 피곤함도 이겨낸 가뿐한 산보인 듯 몸은 가벼웠다. 어떤 기대감이나 막연한 설렘 때문에 아니었나 싶다. 지금 일우는 들꽃 이름들과 풀들에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아마 그때 그녀의 해박한 들꽃과 풀들의 대한 안목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올라가면서 주위의 널브러진 모든 들꽃과 풀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그녀의 고상을 조용하게 풍겼고 옆에 있는 그를 의식하지 않은 듯 편안함을 주었다. 얌전하게 쪼그려 앉아 예쁘게 그를 쳐다보며 말하는 모습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격에 맞는 그녀의 잔잔한 웃음은 해맑은 그곳에 자연스레 어울렸고 일우에게는 애틋했으며 마냥 온기를 느끼는 흐뭇함이었다. 그러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야릇한 체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때 올라가는 중턱의 못생긴 괴불주머니며, 노루오줌풀, 막 단단한 껍질 속에 싸인 알(도토리)을 가진 신갈, 또는 떡갈나무라든가 또 곳곳에 널린 조릿대 이름도 처음 알게 됐다. 벌개미취와 구절초의 구분도 확실히 그녀의 덕분에 알게 됐다. 나뭇잎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토록 아름다운지, 그것을 볼 수 있는 중간중간에 나란히 걸터앉을 수 있는 작은 바위들이, 연인들의 사랑을 키워주는 의미 있는 쉼터인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또 실 빛의 의미, 그녀가 마지막 소망하는 삶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저 실 빛의 햇살이 왜 더 환한지 아세요."
"뭐, 해와 틈새의 나뭇잎이 마침 그 자리에 있어 일어나는 자연 현상 아닐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비치는 그곳에 무언가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감춰진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더 환한 빛으로 그곳을 비추는 게 아닐까요."
일우는 회한이 있는 듯 말하는 그녀의 말과 표정에서 고독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 밝은 빛 뒤의 그늘진 어두움에서 그녀를 아프게 하는 아련한 기억의 아픔이 서려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올라가면서 드문드문 손을 잡아주는 것도 짜릿하고도 꿀맛 같은 달콤함이었다. 그렇게 많이 널려 있는 건 아니지만 간간이 퍼져있는 에델바이스의 싸늘하고 청승맞음의 느낌은 그녀를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구천동에 들어온 지도 석 달이라 했고 그동안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누구든 이런 풍광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중학교까지 작은 동산에 둘려 싸인 시골에서 자라 이렇게 높은 산은 처음 올라왔다고 하며 모든 걸 신기해했다.
우리 둘은 그곳의 모든 것을 섭렵했고 험한 바위나 비탈진 길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둥 이미 연인 같은 행동을 자연스레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정말로 사랑이 고팠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각만 했었다. 젊음을 함부로 소비하기 싫어서였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여러 가지를 같이 해야 하는 것에 집중과 성의가 필요하고 그것에 가치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이 하는 사랑이 수단이 아니어야 하고 목적만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고 완성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일우의 끌림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고 어떤 의식으로 꽉 차 있었지만 그녀의 아무렇지 않다는 리드에 그의 이기와 편견은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마치 오래전 연인처럼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오고 경험이 풍부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때론 거침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는 팔짱을 끼거나 어깨를 감싸며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
K는 취해 있었고 누구든 이별을 먼저 얘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린 그렇게 해서 또 하룻밤을 그 술집에서 보내야 했다. 첫째 날보다 이야깃거리가 시들었지만 그와 은경은 밖에 나와 달빛 쏟아지는 평상에 앉아 삶에 더 아름답게, 더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든 것에 이야기했다. 그때 우리 나이에 어울릴만한 왜 사느냐부터 꿈, 사랑, 삶, 영화라든가 등 여러 화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우는 그녀가 본 영화 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타라의 테마' 음악이, 그중에서도 마지막 코러스가 애잔하다는 것과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게 인상 깊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안갯속에 사라지는 남자가 참 불쌍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사랑은 엇갈리는, 서로 쫑긋하게 귀 기울여야 하는 어설픈 두려움 같아요. 그래서 오는 막연한 기다림이기도 하고요. 평범하고 순탄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나요?"
자기의 지나간 사랑을 빗대어 말했는지는 몰라도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리고 작은 한숨 소리가 은경의 입에서 흘러나와 퍽이나 안쓰럽게 보였다. 자연스러운 그런 모습이나 말들은 결코 서투르고 어설프지 않은 정돈이 잘 된, 감성 어린 경험에서 얻어진 더 없는 신선 함이었다. 자기 자신의 어떤 것에 혼란스러운 모습도 보였지만 내면 깊숙이 숨겨 저 있는 순수한 본성을 다시 찾으려는 몸부림 또한 있다는 걸 그는 느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통적 이해나 상식이 일치할 때 그들은 기쁨, 또는 즐거움이나 하물며 노여움, 슬픔조차도 같이 해야 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아무 간섭도 의심도 없이 오직 순수 그 자체만으로 하는 사랑은 서로 힘에 겹고 감정을 단절하는 스스로의 소외가 아닐까?
그녀는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저쪽 친구들의 사정은 무시한 체 내일 부안 채석강에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일우의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한 느낌은 애매한(?) 사랑으로 변화해 모험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일우와 K는 그녀가 준비해 준 잠자리에서 창문에 스미는 달빛을 받으며 별을 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기억으론 가냘프고 정말 곱고 예뻤다. 성격이 모나지도 않았고 그녀 현실의 삶에 자책하지도 않았다. 무언가의 고통에서 넘어선 듯 고집스러운 끈기도 보여 강성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보다 한두 살 위로 보여 모든 것을 감싸고 이해하려는 긍정적 모습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별말이 없었으며 바라보는 모든 것에 감성이 풍부한 그런 여성으로 보였다. 고향도, 성(姓)도, 정확한 나이도, 그녀에 대해서 느낀 것 외에 별 아는 게 없어 아쉬웠지만 그는 지금도 그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 대해 그의 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태우고 재로 남아버릴 따스한 모닥불 같은 것이었다. 비록 짧은 사랑이었지만 순수성을 잃지 않은, 구름 위 하늘처럼 신비이기도 했다. 그녀와 만남은 우연이었지 만 자연스럽고 아무 조건도 없는, 스스럼없이 지나칠 수 있는 지고(至高) 해야 할 존경이고 야릇한 떨림의 사랑이었이다.
다음 날 K와 일우, 은경은 전주로 나와 K는 하동 집으로 가고 우리는 부안 곰소행 버스를 탔다. 터덜거리는 버스에 시달리며 온갖 곳을 다 들르며 도착한 곰소항은 오정이 훨씬 지나간 뒤였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그곳은 사랑의 열정이 상징으로 남아 있는 듯 태양이 이글거렸다. 그리고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돛대 위의 갈매기는 사랑의 온유를 돋보이게 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맑은 하늘에 할 일 없이 떠도는 조각구름과 바다 저 건너 작은 섬들의 풍광은 물감을 퍼부은 듯 옥색과 파란색이 조화를 이룬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머금은 바다가 조용히 출렁이고 있다. 마치 원인은 원인을 낳고 그 원인은 또 다른 원인을 낳듯이……
다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채석강의 적벽은 태고의 성채(城砦)인 듯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웅장함 같았다. 또 푸른 바다는 사랑의 격정의 비밀을 감춘, 어쩌면 다가올 우리의 혼란인 듯 더 짙은 푸름이 었다. 오후의 어촌은 기대와 두려움을 함께 주는 오래된 이야기의 연극 무대 같았다. 허기진 배고픔으로 맛본 그녀와의 젓갈 반찬 식사는 아주 정갈한 일미였다. 그녀가 얹어주는 젓갈 반찬과 함께 먹는 흰쌀밥이 그렇게 고소하고 짭조름해, 후딱 두 그릇을 해치웠다. 지금도 나는 그녀가 밥 위에 얹어주던 그 젓갈 맛들을 잊지 못한다.
밥을 먹을 때나, 걸을 때나, 가벼운 장난을 칠 때도 예쁘게 생글거리며 무심하듯 하는 모습이나 행동은 정말 귀엽고 오래된 연인처럼 사랑스러웠다. 그곳 포구 바다의 잔잔한 물결처럼 순진무구했고 파란 하늘처럼 티 없이 맑고 청아했다. 그 바다와 하늘빛이 어쩌면 그렇게 나에게 청순하게 모자람 없이 다가왔을까? 지금 생각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녀의 맑음이었고 가냘프게 예쁜 청순함이었다. 각진 면으로 구성된 채석강 적벽은 유화의 붓 터치인 듯 오래된 기억이었다. 저 멀리 바다와 맞닿은 수평선은 아득한 그리움 같은 애달음이었고, 넘실대는 파도는 어떤 순간, 우리 둘을 불안하게 할 때, 그 기억과 그리움이 두려움으로 바뀌어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위태로움이었다.
다행히 간조 때라 채석강을 걸을 수 있었다. 울퉁불퉁한 채석강 바위들의 깊은 골은 태곳적 기억이던가? 우리를 더 가까워지게 했다. 걷는 어려움에 자연스레 나는 그녀를 안게 되고 그녀는 내 허리를 감싸 이제는 고스란히 서로의 애인이 됐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처음으로 가벼운 키스를 했다. 부드러웠으며, 짜릿하고 달콤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오롯한 우리 둘만의 시간이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막차를 놓칠세라 서둘러 전주로 돌아왔다. 이미 무주 가는 마지막 차는 떠난 지 오래이고 하릴없이 배회하다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탁자 위의 스탠드 조명이 꽤 큰 방을 어둡게 밝히고 어색한 공기가 어떤 기대와 합쳐 저 아련한 그 무엇들이 아득한 소원(疏遠)으로 느껴졌다. 왠지 편안함도 없고 서먹한 미련이 방 안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우리는 나란히 엎어져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사랑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자기 물음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녀는 또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해 보았습니까?"
나는 결코 해 보지 않은 것에 거짓으로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 몰래 혼자 좋아해 본 적은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피식 웃어 버리고 가여운 듯 나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사랑은 5 월의 온기에 막 돋아난 첫 잎사귀를 감싸는 상큼한 공기 같은 청신함이 아닐까요."
그즈음이 배란기라고 분명 말했던 그녀와의 그날 밤은 가슴 저미는 아픔만은 아니었다. 그건 사랑의 아름다움이었고 진정한 사랑이 달아오르는 청춘이었다. 또 사랑의 완전체(完全體)였다. 그 사랑은 서로를 확인하려 깊은 심연에서 올라오는 희열이기도 했다. 숨겨진 사랑의 잠재의식인지, 봄비에 기운 받은 바위 밑 각시붓꽃인지, 서로에게 여리며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그 행위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추잡하지도, 몹쓸 애정 행각도 아니었다. 충분한 친밀감 만이 서로에게 스미는 서정적 교감이었고 뜨거운 사랑의 행위일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무주로 돌아가자 하지 않고 웃으며 사랑의 도피를 하자 했다. 예전에 그녀의 어머니와 자주 가봤던 백양사에 가자고 했고 그 절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 저 있다 했다. 우리는 장성에서 백양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입구에서 내려 쥔 손을 다시 놓지 않으려는 듯 꼭 잡고 연인들의 전유(專有)인 장난치며 걷는 희희낙락이었다. 그 짓은 연인들이 서로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하는 의무인 듯 우리 둘에게 살며시 스며오는 감미로운 친화력이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이없어하면서도 웃음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고 그러면서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오롯하게 흡수되는 듯했다.
대웅전에 들어간 그녀는 108배를 시작했고 나는 밖에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 사람, 아니 한 여자가 부모에게 태어나 살아가는 가지가지의 모습들의 변화에 연민을 느꼈다. 깊은 생각에서 떠 올린 유추는 아니지만 그녀의 기구(崎嶇)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아마 그녀의 예쁜 얼굴과 문학적 깊은 소양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절과 정신의 일치는 정확했다. 나도 어렴풋이 절의 숫자를 헤아렸지만 그녀의 고독하고 신중한 작업인 108배의 절은 정확하게 나와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피곤한 듯 나에게 의지해 계단을 내려왔고 한참을 한쪽 마루에 앉아 내 어깨에 기대어 말없이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리고 경내를 산책하자고 했고 우린 오밀조밀하고 아담한 사찰을 구경한 뒤 다시 내려갔다. 그녀는 내려가는 도중 자기 말을 들어주어 고맙다며 한가로운 듯한 곳에서 목을 감아 내게 키스했다. 정말 짜릿하고 황홀했다. 그 입맞춤은 어제와 또 다른 일종의 최면이었다. 그녀를 떠나지 않도록 내가 나를 붙잡아 두는 숨 막히는 떨림 같은 것이었고 상징으로 남는 의지적 목적인 것 같았다. 나는 서서히 그녀의 끌림에 휩쓸리는 걸 느꼈다.
우린 배고픔을 달래며 전주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 무주 가는 차는 있었다. 하지만 일우는 그녀에게 여기에서 하루 더 묵고 내일 가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작은 합의지만 서로 숨겨져 있던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고 서로의 뜻을 일치하는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른 저녁과 함께 술을 먹기로 했다. 선술집 같은 작은 술집에서 그는 그녀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했다. 그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난 당신을 좀 더 많이 알고 싶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그게 그녀에게는 부담이었나? 울기 시작했다. 졸졸 맥주병에서 쏟아지는 액체 소리에 묘한 안타까움에 빠지는 듯했다. 가슴속 깊숙이 숨겨저 있던 아련한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 갑자기 현실의 어떤 부담으로 다가올 때 느껴지는 복받치는 서러움과 케 묻는 그의 말이 섞여저 갑자기 조용한 흐느낌으로 아깨를 들석인다. 그저 아무 말없이 술만 마시며 눈물만 그렁이고 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한 체 겨우 지탱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듯했다. 조금 전의 유쾌했던 서로의 분위기가 조금은 경직되어 서로 해맑었던 모습이 술집의 좁고 답답한 허공으로 스며버려 어색함만이 닦아세우 듯 함께 한다.
자신이 없는 무력감으로 산다는 것, 늘 그늘 속에서 사는 것이다. 한 자책자가 자기 주변 환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생각지 못한 현실이 다가올 때 이제는 안정하고픈 게 그녀의 입장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을 멋쩍게 하는 관용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스스로 존귀함을 망각해 버려 그러지 못한다. 그것 또한 그녀였다. 그를 밀어내려는 듯 말이 없다. 도저히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는,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저 밑 깊숙이 숨겨 저 있었던 그의 이기와 교만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어떤 선입견에 꽉 차 있었고 어정쩡한 정신구조에 위선만 가득했다. 그건 진정 그녀를 위함이 아니었다. 두려움 없는 사랑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그는 막연히 은경과 자신이 어떻게 될까 하는 부정적 의문 속에 있었다는 걸 솔직히 인정했다. 그녀에게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제는 그도 말이 없어졌다. 침묵만이 둘 사이를 동정하듯 뻔뻔스럽게 맴돌고 있었다. 그는 뭐가 미안한지 말하지 않은 체 그녀에게 미안하다 사과했고, 거기까지도 위선이라 생각했지만 굳이 변명해 그녀의 기분을 더 이상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 그는 은경을 꼭 안아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 은경은 그때의 매 순간마다 그와 자신에게 충실했다고 생각된다.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는 몰라도 너무나 스스럼없었고 친절했으며 상냥했다. 적어도 세상에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인 듯 깍듯이 생각한 것 같았고 소중하게 대했다. 우린 숙소로 돌아와 벽에 기댄 채 한참을 아무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어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지지 못하는 인연을 간접적으로 설득하듯 이야기했다.
"순리, 그걸 저버리면 이제는 다시는 채워지지 않을…… 서로의 삶이 헤어나지 못할 덧이 될 수도 있지 않을… 까요."
그러면서 우린 아직 젊으니까 좀 더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을 했다. 일우는 안정이 안되고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무감각하게 멍하니 있다. 그리고 급히 자신이 가져야 만 하는 뭔가를 다시 찾아야 할 순수한 개연성을 뿌연 안갯속에서 허둥대며 찾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들 미련의 깊은 애달음의 몸부림은 슬픈 절규로 거침없이 이어지고, 말이 필요 없는 애틋한 퍼포먼스였다. 마지막 밤이 되어 한을 남기지 않을 듯, 지금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뜨거운 사랑에 충실했다.
서로에게 불편한 아침은 오지 말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점심때쯤 나가자는 내 말에 우린 그냥 별말 없이 누워 아쉬움만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변화를 내 맘속에 다짐한 채 호소하듯 부탁했다.
"은경 씨, 나를 위해 꼭 하루만 더 같이 있어주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헤어지면……"
그녀는 말없이 허공만 주시하다 옆으로 돌아누워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 아니면 늦어도 내일 오전에는 가게 주인 언니가 영동에서 무주로 들어온다고 했다. 내 낙심의 한숨에 한참 후, 모질지 못한 그녀는 따뜻한 포옹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소를 지으며 일우의 뜻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서둘러 그곳에서 나와 우선 밥부터 먹고 그녀의 제안에 삼남 극장이었던가? '알랑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를 봤다. 역시 그녀도 잘생긴 미남에 끌리는 듯 영화 속 나쁜 남자를 좋아했다. 지금은 기억할 수 없는 그가 주연한 영화를 줄줄이 꽤고 있었다. 질투 섞인 농을 던진 나에게 당신이 훨씬 잘 생겼다고 감싸는 여유와 다정한 눈길도 함께 주었다.
일우는 중학교까지 전주에서 자랐다. 지금 한옥마을인 교동에 살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얼마나 많은 추억이 있었겠는가! 특히 초등학교 때 한벽루 뒤, 지금은 헐린 철길을 참 좋아했다. 철길에 귀를 대고 기차가 언제 오는가도 알았고 철길에 대못을 놓아 납작하게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작살을 만들기도 했다. 배고프면 철길 위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 먹기도 했다. '한벽루' 앞 개천을 비롯해 철길 따라 죽 걸으면 '애기바위', '서방바위', '각시바위' 등, 곳곳의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물이 아주 맑았고 별로 깊지도 않아 헤엄치기에 딱 좋은 개천이다. 유리병 어항으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여름철에는 친구들과 거의 그곳에서 하루 종일 보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가 그녀와 함께 그곳에 다시 갈 때까지만 해도 주위가 빈 듯이 잠잠했고, 그녀와의 기억이 남을만한 호젓한 풍경 그대로였다. 산 쪽으로 참나무는 빽빽했고 철길 밑 냇물은 흐름이 조용했다. 우린 영화 속 연인들이 흔히 하듯 철길 위를 곡예하듯 걸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웬만하면 손을 놓지 않았다. 은경은 정말 그곳을 좋아했다. 우리는 각시바위의 다이빙을 할 수 있는 넓은 바위에 앉아 이후의 변화에 마음이 무거워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일우는 아침에 생각해 둔 막연한 기대를 이야기할 찰나 그의 심중을 알아챈 듯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 특히 원하지 않는 이별일 때 크게 슬퍼하지 말자며 그녀는 일우에게 위로하며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좋은 감정이고 사랑이었다면 그 생각을 가볍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마음으로 서로 오랫동안 기억한다면 앞으로의 삶이 까다롭거나 싸늘해질 것만은 아닐 거예요."
"제약이 되는 문제가 도대체 뭡니까? 서로 하나씩 풀어가면 저쪽의 긍정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그가 강하게 반박하자 그녀는 최후의 통첩을 조용하면서도 또렷하게 말한다.
"세상은 원칙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닌 걸 아시잖아요. 지금 우린 순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이후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어떤 사람에겐 구체적 현실이 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꼭짓점이 같고 당신과 내가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그 안에서 믿음이 생길 수는 있지만…… 지금 까지 저에게 있던 사실들이 없어지진 않아요. 내가 생각하기 론 흐름에 맡겨 놓는 순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객관적 순리… "
또 그녀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살다 보면 꼭 좋은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 말했다. 차분한 그녀의 말은 그의 마음을 치유하듯 살갑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우울해 보이는 그녀의 어깨를 꽤 오래 힘 있게 감싸 안았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제3의 눈으로 즉, 의식이나 관념의 눈으로 가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로가 사랑의 어려움이나 미로에서 헤맬 때 진정 자기 모습이 어땠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상대에게 아무런 차이나 편견 없이 지성을 다해 귀 기울였느냐, 또 존중하며 성의를 다 했느냐 등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불합리하고 헤어나지 못할 모순 등에 휘말릴 수가 있다. 결국 서로 어려운 피상으로 끌려갈 뿐이다.
우리는 어설프고 궁상스러운 여관방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쓰잘데기 없는 하찮은 예기들에 치중하려 서로 애쓴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릴 적 이야기를 별로 안 했지만 나는 아까 낮에 갔던 냇가에서 어릴 적 친구들과 놀았던 이야기를 주로 했다. 물속에서 팬티를 벗겨 도망간다든가, 벗어 놓은 옷을 몰래 감추어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든가 하는 등의 이야기들을 했다. 어떡하든 시간만 때우고 어설픈 마음을 감추려는 그런 속셈뿐이었다. 일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그녀 은경은 그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말없이 맥주만 마시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생각하면, 그녀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며 자신의 심경이 더 아프고 속상할 수도 있었다는 걸 그는 짐작해 봤다. 한여름 밤의 좁은 방에서 마신 술에 금방 취한 듯 그녀는 일우 무릎을 베고 누워 한참 올려다보고 울먹이기도 하며 갖가지 자기가 아는 노래는 다 했다. 그리고 그의 무릎을 베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은 여관을 나와 식당 쪽으로 아무 말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햇살이 가로수 사이로 밝게 빛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 모든 모습이 아름답다거나 고혹적이지 않고 그들의 등 뒤가 쓸쓸하다. 그들은 늦은 아침을 먹고 그녀는 전화를 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길거리 빨간 공중전화통 앞에 서 있던 그녀의 예쁘고 상큼한 모습이 아직 선하다. 전화를 끝낸 그녀 모습이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심상치 않아 그가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별일 아니라고 말하며 지금 무주로 가봐야 한다 했다. 그런 그녀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주까지 동행한다 해도 부득부득 혼자 간다며 여기서 헤어지자 했다. 일우는 막무가내로 말했고 그녀는 결국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당신과 내가 거기에 가서 혹시 일어날 어떠한 일의 내 모습을 당신에게 보이고 싶진 않아요. 그냥 지금까지의 나만 기억해 주세요."
은경은 사랑이 시간의 정화를 이루고 모든 것이 걸러지면 세월이 흐른 뒤 그 사랑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듯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분명 들리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그 말속에서 그녀의 마음까지 들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 처지의 솔직한 말과 모습에 그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좋았던 것만 추억으로 남기자 하는 의도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항상 행동과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의지는 그녀의 생각이 믿음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신념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그에겐 현실이 됐는데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한 무엇이 뭉쳐 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일까? 지금 그녀를 떠나보내고 이제 혼자 남을 그에게 의문만 있는 이쪽과 보내야 하는 저쪽이 한데 어울려 혼란으로 마음이 심란해진다. 일우는 어젯밤 써 준 연락처와 주소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꼭 연락했으면 좋겠다 하며 차창 안 마지막 보이는 그녀의 예쁜 얼굴에 처량한 그의 눈 빛을 보냈다. 그것이 그녀 은경과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은경과 만나기 전 만났던 여느 여자들과 몇 번의 만남은 있었다. 그건 평범한 만남이었고 진정 사랑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인생사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온갖 것을 경험하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과 만남에서 진정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러므로 일우는 진정한 첫사랑의 정석을 경험한 행복한 사람이고 행운아 라 생각했다.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준 그녀에게 진정 애정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는 에델바이스도 절대 못 잊고, 달맞이꽃 노래도 가끔 들으며, 윤동주 시 자화상도 가끔 읽는다. 한데 무주 구천동과 전주 각시바위는 그 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서울 살 때 덕유산 등반을 권유받을 때도 왠지 그 산은 가고 싶지 않았고 전주는 한옥마을만 들려 갈 뿐이다. 그 혼자만이 간직하고 싶었던 오래전 추억이고 잠깐의 사랑이었지만 또다시 그곳에 가서 애처로웠던 그녀를 생각하며 시린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지 않아서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나 울적할 때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지금까지 오래도록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아직 숨어 있는 걸 보면 분명 은경과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그의 진부한 러브 스토리일 수 있지만 그에게는 안쓰러움이 충분했고 고적한 낭만이었으며 아름다웠고 참다운 첫사랑의 정석이었다. 그 사랑은 삶에서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조금은 우울했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는 여러 기도 중에 그녀의 안녕을 항상 기도하며 건강을 염원한다.
이제 곧 있으면 장미나무 곁가지에서 새 잎이 돋아나고 이어 꽃봉오리가 움터 군더더기 없는 빨간 장미가 내 마음을 사로잡겠지!
그리고 여름이 와 그 장미가 만발할 때 높은 산에는 솜다리 꽃이 하얀 솜털로 싸여 애잔한 추억으로 따뜻하게 남게 되겠지!
또 밤에는 둥그런 보름달이 회한의 그리움으로 밝아 오겠지!
그 여인 은경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2015.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