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암사는 1717년 숙종 39년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다.
1770년과 1874년 그리고 지난 1972년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탑의 균열이
다시 발견되어 1995년 다시 보수공사를 시행한 바 있다.삼국유사 제4권 자장정율(慈藏定律)
조에는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645), 이곳에 석남원을 세웠고, 그 석남원이 지금의
정암사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얽힌 설화가 실려있지만
언제 무었 때문에 정암사로 바뀌었는지 그 밖의 세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암사는 경남 양산에 있는 영축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과 함께 자장율사께서 모셔온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5대 적멸보궁'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칠보중의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은 탑으로 이 안에 부처님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칠보중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거만하지 않게 수수한 빛깔로 가슴에 와 닿는다.
바람이 불면 뗑그렁거릴 귀퉁이의 풍경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적멸(寂滅)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본래의 마음자리인 고요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고 한다. 법신인 부처의 세계에서 육신으로 인한 마지막 장애까지
훌훌 털어 버리고 영원한 진리 그 자체로 돌아가면 곧 적멸인 것이다.
적멸보궁이란 그 깨달음의 성인인 부처의 뼈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는 보배로운 궁전이란 뜻이다.
수마노탑이 칠보중의 하나인 마노석으로 되어 있다하니 엄청 화려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백색을 띤 수수한 색깔에 은은함이 아리랑에 담겨있는 이런저런 정겨움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 하여
정암사(淨岩寺)라는 이름이 붙였진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5년 선덕여왕 14년에 계곡 깊고 산이 높아 산세 웅장한 태백산 서쪽 기슭인 현재의 터에 창건하였다 한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때 대국통(大國統)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경주를 떠나 강릉에 수다사(水多寺:지금 평창에 빈터가 있음)를 세우고 살았다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너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하였다.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다시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한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을 짓게 된다.
자장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 들고와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스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귀에 거슬렸던 자장의 시중이 호통을 치니,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했다. 자장은 이 말을 전해 들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늙은이를 쫓아버리게 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아상(我相,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요' 하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곧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푸른 사자로 변하고 그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바로 그 늙은이가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그 뒤를 곧바로 쫓았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 가버린 뒤였다.
이후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달 뒤 다시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하고
당부하였다 한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라고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죽은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은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나의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정암사는 석가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기도 하지만 자장율사가 일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영남호서 그리고 관동사이에 높이솟아넉넉하면서도빼어난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태백太白이라한다. 백두대간의 정맥正脈은 처음그기운에
장백長白에 모였다가 중간에 오대를이루고 마침내 이곳에서 다한다.
그래서 이산을 태백천太白天 또는 대여산貸與山 이라고도 일컬으니 천상천하의
명산대지임을 알만하다. 뿌린처럼서린삼백리남짓의 산자락엔 그산줄기에의지하여
자리잡은 주州나 군현郡縣만도 무려열을 헤아리니,그웅장하고깊고높고큼이 비할바없다.
이산의 서쪽에 오래된옛절이 있으니 정암사淨岩寺가 그곳이다. 신라의 자장법사께서
당 태종 정관19년 을사乙巳(645년)에 세존의 수마노보탑水瑪瑙寶塔을 창건하여 비로소
사십팔방지처四十八房之處를 열었으니,숲과 골짜기는 해를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으므로 '정암사'라 이름했다.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사적)
적멸궁 입구에는 '자장율사주장자'라 쓰여진 표지석이 있는 고목이 있다.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주목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라는데 범상치 않은 나무임에 틀림없다. 나무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시각으로 느끼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촉감으로 만져질 듯하다.
검버섯 피어나듯 이끼 낀 외피 고목에 새로운 나무가 안쪽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고목이 되어버린 외피의 주목은 천년쯤은 묵었을 자장율사의 손때처럼 고색이 완연하다.
그런 고목 속에 청년색 뚜렷하며 그 굵기가 족히 서너 움큼이 될 신목이 자라고 있다.
신목의 가지들은 고목의 틈새를 헤집고 무성히 자라고 있지만 결코 고목의 세월무게를
감하려는 경솔함은 보이지 않는다.나무의 꼭대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도사나 고승들이 짚고 다니던 전형적인 지팡이 끝 부분이다. 틀어지고 꼬였으며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그 주장자를 들고 금세 자장율사라도 출현할 듯하다.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590∼658)는 김씨의 성을 가졌으며 선종랑(善宗郞)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자장율사의 아버지 무림(茂林)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한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 초파일에 아들 자장을 낳았다고 하니
자장율사는 태생부터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듯하다. 한국불교의 도입과 융성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자장율사의
마지막 숨결은 바로 태백산 정암사에 그가 모셔온 진신사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다.
신라의 자장법사께서 당 태종정관19년 을사(645년)에
세존의 수마노보탑을 창건하여 비로소 사십팔방지처를 열었으니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으므로 '정암사'라 이름했다
-이호신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