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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집단 : 구체적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인사, 조선총독부 및 산하 기관의 직원, 식민 수탈 기구(동척, 조선은행, 조선 식산은행 등) 근무, 기타 친일 단체 활동 경력이 있는 자
(나)집단 : 일제 경력 혐의는 있지만. 구체적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
(다)집단 : 항일 투쟁 경력자(변절자 제외)
(라)집단 : 행적 미확인
앞의 도표는 1~3공화국(이승만 정부~박정희 정부)에 이르는 시기의 파워 엘리트 즉 국가의 핵심 권력 집단에서 친일 협력 세력과 독립 운동가들이 차지한 비율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행정부와 사법부, 군대, 경찰 분야의 최고위직에서 친일파였거나 친일적 성향을 지녔던 (가)와 (나) 집단의 합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독립 운동가인 (다)집단은 4.8%에 불과하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친일 세력이 주축을 이루었다는 세간의 주장이 명백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독립 운동가인 (다)집단이 이승만 정부, 장면 내각, 박정희 정부를 거치면서 그 비율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데 비하여, 친일파인 (가)집단은 거의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친일파 득세, 항일 세력 위축 현상이 갈수록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광복 이후 30년 동안이나 친일파 또는 그 옹호세력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반민주적 독재 체제의 유지와도 관련이 깊다. 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에 잘 길들여진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18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을 왜곡한 박정희의 경우 만주군 중위 출신이라는 사실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이 널리 알려졌다. 박정희가 1948년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이를 구명해 준 백선엽은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 토벌로 악명 높던 간도 특설대 중위 출신이다. 그는 합참의장과 교통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거쳐 10년(1968~78) 동안이나 대법원장을 역임한 민복기는 일제 강점기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 아버지 민병석은 한일 합병에 깊이 관여하여 이른바 ‘경술국적’으로 불리는 매국노이며, 조선 총독부 자문 기관인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한 대표적 친일민족반역자이다. ‘친일 매국의 영광(?)’이 ‘가문의 영광’으로 이어진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독재정권 시절 사법부가 언론과 더불어 권력의 시녀 노릇을 충실히 수행한 집단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친일 매국노의 자식이 그 수장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친일파들이 살아서 누리던 권세가 죽은 뒤의 영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 권세를 누리던 친일파들, 특히 군 장성 경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았고 죽어서도 국립묘지의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정일권은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국립 현충원 장군 묘역에 묻혀있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 장교 출신으로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까지 지목되는 김창룡은 각계의 줄기찬 이장 요구에도 불구하고 대전 국립 현충원에 매장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친일파가 독립 유공자나 국가 유공자로 변신하여 국립묘지에 묻힌 경우도 있다. 광복 후 연세대학교 총장까지 역임한 백낙준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데 앞장섰던 대표적 친일 지식인 중의 한 명이다. 그런 그가 국립현충원의 제1유공자 묘역에 묻혀있다. 친일 승려 이종욱도 마찬가지다.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사찰의 범종까지도 거둬들이면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던 이종욱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혀있다. 오죽하면 임정 요인으로 마지막까지 생존하셨던 백강 조경환 선생(1900~1993)이 별세하면서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묻혀있는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남겼겠는가.
<반성하지 않는 지성(知性)>
친일 세력의 영향력은 국가 권력 집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교육계와 언론계, 문화 예술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서울대 미술대학의 교수 한명이 자신의 논문에서 미술대학 초대 학장인 장발의 친일 행위를 언급한 것이 빌미가 되어 재임용에서 탈락한 일이 있었다. 그 교수는 비록 6년 반에 걸친 법정 소송 끝에 복직되기는 하였으나, 최고 지성인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 서울대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발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들은 이미 1996년 장발을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하고 미술대학 안에 동상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 병원 100주년 기념행사와 흡사한 상황이라 하겠다. 친일 협의가 있는 인물이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되고, 그 동상까지 설립된 것은 한국 지식 사회가 지닌 왜곡된 과거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친일 세력의 영향력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요즘은 CEO 총장 시대라는 말도 있지만, 대학 총장은 고매한 인격과 학문적 업적을 두루 갖춘 지성인의 최고봉으로 존경받던 지위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대학 총장들 예컨대, 유진오(고려대), 백낙준(연세대), 김활란(이화여대), 임영신(중앙대), 고황경(서울여대) 등은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 협력하는데 앞장섰던 친일 인사들이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귀한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내지(內地. 일본)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 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 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 김활란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1942. 9)-
정녕 이러한 글을 쓴 사람을 대학 총장으로, 사회 지도자로 존경하고, 동상까지 세워가며 그 업적을 기려야 하는 것일까? 비단 대학 총장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친일파들 중에는 사립학교를 설립한 경우도 많다. 예컨대 민영휘는 국권 피탈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까지 받은 대표적 매국노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설립한 학교(휘문학교)에서는 아직도 그의 가르침에 민족의 부강을 달성케 하는 실천 철학이 담겨있다고 칭송한다. 친일파들이 설립한 대부분 학교의 경우 설립자의 친일 행위는 철저히 은폐되고, 심지어 교내에 동상이 버젓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은폐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한 교육자로의 변신을 꾀한 것이다. 대학 총장으로, 사학의 설립자로 친일 세력들은 미래 사회의 주역을 육성하는 교육계에서도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국민 여론 형성의 핵심 역할을 하는 언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가장 유력한 일간지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 찬양하면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쟁 참여를 적극 독려하던 신문이다.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는 이미 반민 특위에서 친일파로 지적된 인물이며, 동아일보 사주였던 김성수도 친일인명 사전에 수록될 1차 명단에 올라있을 정도로 친일 행위가 명백하다. 그런데도 김성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수상하였다. 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는 고려대학교에서는 그의 아호를 딴 '인촌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여하고 있으며, 부근에는 '인촌로'라는 길 이름까지 지정되어 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였을 때, 자진 폐간으로 나치 협력을 거부한 ‘르몽드’는 오늘날 가장 유력한 프랑스 일간지가 되었지만 나치에 협력했던 신문들은 나치 청산 과정에서 모두 폐간 당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했던 신문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 신문이 광복 이후에도 독재 권력의 충실한 시녀가 되어, 현실에 대한 왜곡 보도를 서슴지 않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 신문이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친일과 친독재로 점철된 자신들의 과거를 뉘우치고, 사과하려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 삽입 설명-친일, 5ㆍ18 보도 사진?)
<친일까지 기념하라>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한 망각은 국민들의 문화생활과 정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문화 예술계에서 더욱 심각하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시인, 소설가, 음악가, 화가 등 문화 예술인들 중에도 과거 친일 행위는 망각된 채, 중ㆍ고교 교과서 등에 널리 소개되거나, 매스컴에 의해 칭송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친일 문인들의 아호를 딴 문학상이 제정되고 기념비나 기념관의 설립이 추진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친일 미술가들이 독립운동가의 영정이나 동상을 제작하는 비이성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사후에는 과거 친일 행위는 완전히 배제된 채 훈장이 추서되기도 한다. 이 심각한 역사의 기억 상실증은 민족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것은 물론이요, 기회주의를 만연시켜 우리 사회의 건전성을 크게 훼손하였다.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광수, 최남선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경력도 있고 친일 행위도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광복 후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한 여류 시인 모윤숙은 화려한 친일 활동에도 불구하고 3ㆍ1 문화상과 예술분야 최고의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오장 마쓰이 히데오 송가> 삽입
‘국화 옆에서’의 시인 서정주는 ‘오장 마쓰이 히데오 송가(頌歌)’, ‘일장기 앞에서’ 등의 시와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스무 살 된 벗에게’ 등을 통해 학병 지원을 권유하고 징병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자신의 친일을 ‘하늘과 태양의 뜻에 따른(종천순일 從天順日)’ 행동일 뿐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또한 독재 권력에 영합하여 이승만의 전기를 집필하고,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고의 지도자로 추켜세우는 ‘처음으로’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죽자 예술 분야 최고의 훈장인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고, ‘미당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의 고향에는 시비와 문학관도 건립되었다. 미당 문학상은 제정 과정에서 서정주의 친일, 친독재 행위로 인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그 업적이 허물을 덮고도 남는다는 논리에 따라 제정되었다. 이밖에도 동인문학상(김동인), 청마 문학관(유치환), 채만식 기념문학관 등의 친일문인에 대한 기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음악 분야에서도 ‘희망의 나라로’의 작곡가 현제명은 ‘음악으로 나라(일본)에 보답’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친일 어용단체인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을 주도하며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광복 후 서울대학교 음대 초대 학장으로 재직하였고, 학교 내에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현제명과 더불어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한 홍난파는 광복 이전에 사망하였지만, 노래비와 동상이 세워지고, 난파 음악상이 제정되었으며, 기념관 설립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미술 분야에서는 친일 작가 본인에 대한 기념사업도 문제지만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애국지사의 영정이나 동상이 대다수라는 것은 더 심각하다. 유명 화가 중에 친일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자는 김은호(이당)와 그의 제자 김기창(운보)이다. 김은호의 화려한 친일 경력 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금차봉납도(사진)’가 있는데, 이 그림은 친일 매국노의 부인과 김활란 등이 참여한 애국금차회라는 여성 친일 단체의 결성식 때, 즉석에서 모은 금붙이 등을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에게 증정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김은호의 제자인 김기창도 ‘총후병사’,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적진 육박’ 등의 작품을 통해 일제 군국주의와 침략 전쟁을 찬양, 고무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적진 육박’은 적진을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병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인데, 김기창은 베트남 전쟁 기록화인 적영(敵影,적의 그림자. 1972)에서 마치 친일의 기억을 되새김질이라도 하려는 듯 이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여 그렸다(그림 삽입). 김은호는 광복 후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화가로 활동하면서, 이순신 장군 초상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서울특별시문화상, 3ㆍ1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김기창의 경우 과거의 친일 행적은 덮어둔 채, 귀머거리(청각장애인?) 화가로 매스컴에 의해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조명되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고 그의 아호를 딴 운보문화재단이 설립되었으며, 해마다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운보전국미술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김은호의 또 다른 제자인 친일 화가 장우성(월전)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현충사의 이충무공 영정을 비롯, 윤봉길, 유관순 등 애국 열사의 영정을 그렸다. 특히 그가 그린 유관순 열사의 영정은 갓 스물이 안 된 이화학당 학생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중년의 부인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 청산의 실패와 친일에 대한 망각이 결국 친일의 붓끝을 놀려 항일 투쟁을 모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항일 애국지사의 동상이 친일 조각가에 의해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친일 조각가 민복진과 김경승이 공동 제작한 서울 남산의 김구 선생상이다. 또 서울 영동 도산 공원 내의 안창호 선생상은 김경승이 제작하였고, 윤봉길 의사상(대전)도 역시 친일 조각가인 강태성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것은 실로 애국지사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며,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 항일 투쟁이라는 유산
<짧은 가방끈, 가난의 대물림>
소학교 졸업 후 진학을 포기했던 외동딸은 오라비와 함께 대구 보육원에 보내서 중학교 졸업시킨 일이며, 막내는 사범병설중학에서 납부금을 못 내서 졸업 못하고 1년 농사짓게 한 일 등을 생각할수록 무언가 억울한 생각이 든다. 잘못된 세월 탓으로 돌려버리기엔 너무 어이가 없다.
부모가 되어 남겨 준 것 하나 없는데도, 남 앞에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 보며, 그래도 선대(先代)의 긍지가 그들 핏속에 자존심으로 살아 있구나 싶다.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위 내용은 독립투사 석주(石洲) 이상룡의 후손(증손자)들이 광복 이후 중등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상룡은 국권 회복의 원대한 꿈을 안고 남만주(서간도)의 삼원보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한인 자치 조직인 한족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또한 만주 지역의 대표적 민족 학교인 신흥학교의 설립하였으며, 군정부 조직인 서로 군정서의 총책임자(독판)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역임하기도 하였다(1925~26). 이상룡 집안의 독립 운동은 3대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건국 훈장을 포상한 인물이 9명이나 된다. 그 중 석주 선생과 그 손자 이병화 등 세 분에겐 제 3등급인 ‘독립장’이 추서되었다.(석주 선생에게 3등급을 부여한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의 공적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상한 대부분의 인물들에 비하여 그 공적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집안의 후손들이 학비가 없어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다녀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본래 이상룡의 집안은 경북 안동의 임청각(사진)에 터 잡고 살던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국내에 남아 적당히 일제와 타협만 하면서 살았어도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막대한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고, 오로지 독립을 위해 험난한 가시밭길을 마다 않고 살아왔건만 해방된 조국에서 남은 것은 오로지 가난뿐이었다. 위 인용문의 지적처럼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가난이 계속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이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 기회마저 상실한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에게는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없어 보인다.
2004년 2월 민족문제연구소가 경향신문과 더불어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생활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국가로부터 보훈 혜택을 받고 있는 독립 유공자 후손 5,154명 중 4.4%(225명)를 전국 각 지역별로 표본조사 하여 다음의 그래프와 같은 결과를 얻었다.
구분 |
상 |
중 |
하 |
계 |
상류층 |
0 |
1 |
0 |
1명(0.5%) |
중산층 |
5 |
37 |
48 |
90명(40%) |
하층 |
74 |
50 |
9 |
133명( |
학력 |
대졸(중퇴포함_ |
고졸 |
중졸 |
초등졸 |
무학 |
계 |
인원 |
36 |
80 |
31 |
48 |
30 |
225 |
백분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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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가)그래프를 보면 자신의 생활수준을 묻는 항목에 ‘하층’에 속한다고 응답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무려 60%에 이르는 반면, 상층부에 속한다고 응답한 경우는 단 1명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사 대상 독립유공자 유족의 학력과도 관련이 깊어 보인다. (나) 그래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중졸 이하의 학력이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109명에 이르고 있다. ‘짧은 가방끈’이 가난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학력과 직업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국가 보훈처의 발표에 따르면 2006년 6월말 현재 총 5834명의 독립 유공자 유족 중 학력이 중졸 이하인 유족이 3259명으로 전체의 55.9%에 달하며, 직업이 없는 유족이 3784명(64.9%)인 반면,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804명(13.8%) 밖에 되지 않는다.
광복 이후 친일파의 득세와 그로 인한 국가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항일 투쟁에 생명과 재산을 바쳤던 독립유공자들의 유족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배움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였다. 빈곤의 악순환이다. 오죽하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떠돌겠는가? 이러한 불우한 삶을 두고 ‘조상이 독립운동을 한 죄’라고 말하는 유족들도 있다. 다음은 한 독립 유공자 유족의 언론 인터뷰 내용이다.
“독립유공자에게 나오는 연금이 30만 원 정도 나와. 그걸로 생활해. 나랑 아들이 일을 못하니까. 방값 10만원에 수도세, 전기세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다행이 교회에서 쌀, 반찬 같은 걸 갖다 주니 끼니는 그런대로 해결해. 며칠 전엔 전화비를 못내 전화도 불통됐어,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이제 죽어야 하는데, 안 죽어진단 말이오, 먹을 게 없어 일주일 동안 굶었는데도 안 죽어져. 왜 이렇게 명이 긴지 몰라.”
<가족 해체와 되찾지 못한 국적>
왕산(旺山) 허위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가 고종을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노골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어오자, 전국 각지의 항일의병 부대를 연합한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서 서울진공작전의 선봉에 섰다. 허위가 이끄는 의병 부대는 동대문 밖 30리 부근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허위는 임진강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고 활발한 유격전술로 일제를 괴롭혔지만 결국 국권 회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일제에 체포되었다.
“나는 그대들의 심문에 응할 수 없다. 일본인의 재판에 응할 수 없다.……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
허위는 일제의 재판을 끝내 거부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1908).
허위의 숭고한 항일 의병 투쟁은 경북 구미시 금오산 자락에 살던 김해 허씨 일가의 전폭적인 뒷받침 속에서 이루어졌다. 허위가 의병을 일으키자, 집안에서는 수많은 전답을 팔아 군사 자금을 대었고, 형제들이 함께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고 일제의 감시와 핍박이 갈수록 심해지자, 그의 일가족은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특히 허위의 형 허겸은 이상룡, 이회영 등과 더불어 남만주 일대의 한인 사회를 이끌면서, 자치조직인 부민단의 초대 단장으로서 항일 전선의 기틀을 세웠다.
일제에 맞섰던 애국지사들은 수없이 많지만 허위의 집안처럼 구한말의 의병 투쟁부터 시작하여 항일 투쟁에 이르기까지 온 집안이 참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으로서 치열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인물이다.(1942, 사진). ‘청포도’의 저항 시인 이육사(본명 원록)도 이 허씨 집안의 외손자이다.
여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앞에 인용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의 저자인 허은은 석주 이상룡의 손부(孫婦, 손주 며느리)로서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만주 망명길을 따라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3대에 걸친 독립 운동의 뒷바라지에 온 청춘을 다 바쳤다. 무장 독립 전쟁사의 한편에는 안살림을 책임지면서 항일 투쟁의 뒷바라지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수많은 여성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온 집안이 항일 투쟁에 나섰던 허씨 일가의 망명 생활은 순탄할 수 없었다. 일부 가족들은 만주까지 뻗쳐온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 한인(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대로 강제 이주 당하였는데, 허위의 세 아들 가족도 끼어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떠돌던 허위의 세 아들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고단한 삶을 마감하였다. 고향을 돌아가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오랜 망명 생활과 항일 투쟁의 여정 속에서 허씨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은 북한, 중앙아시아, 중국 등지로 갈라졌고, 일부는 실종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건국 훈장 1등급이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허위를 비롯하여 여덟 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집안이건만 ‘가족 해체’라는 비극을 넘어설 수 없었다. 최근 중앙아시아에 살던 허위의 두 손자가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다는 사실만으로 겨우 위안을 삼을 뿐이다.
이국땅에 흩어져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유공자의 유족이 어찌 왕산 선생 일가뿐이겠는가? 1990년대 초 소련,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국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의 유족들의 처지가 알려지고, 극히 일부가 한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주선으로 환국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외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종적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채, 여전히 국외에 머물고 있다. 일부 유족들은 귀국하였지만 선대의 독립유공자들과의 관계를 밝히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구실로 국적 회복이 되지 않아,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독립유공자나 그 유족들의 국적 회복은 아주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직후 ‘조선 민사령’을 제정하고, 한국인의 호적을 완전 장악하여 관리하였다. 때문에 국외로 망명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적과 호적을 취득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호적을 회복한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고단한 독립 투쟁의 과정에서 순국한 분들이나 국외에 남아 있는 그 유족들의 경우 아직도 대한민국의 국적이 없는 상태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이미 매스컴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된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근대 한국의 지식인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단재 선생은 국권 피탈 이전 치열한 항일 언론 활동과 민족 영웅전의 집필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에 앞장섰다. 국권 피탈 직전 국외로 망명한 선생은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주장하였고, 오로지 강대국에 의존한 독립만을 추구하려는 이승만을 철저히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또한 의열단의 투쟁 목표를 제시한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여 민중직접혁명을 통해서만이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치열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등의 저술을 통해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을 확립하고, 민족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1930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년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순국하였다(1936). 정부는 이러한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1962).
단재 선생과 같이 독립 운동을 하는 동안 국적이 없었던 분들에 대해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복 60여년이 지났는데도 무국적 독립유공자가 300여명에 이르고, 가족 해체의 아픔을 딛고 환국한 독립유공자 유족이 국적 회복을 못한 채 불법 체류자의 신세가 되어있다. 친일 청산의 실패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마저 망각하게 만든 것인가? 이것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직무 유기이다. 모든 무국적 독립유공자에 대한 국적 회복은 물론이고, 국외 거주 유족들에 대한 제도적, 정책적 배려가 시급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세월이 더 흐른다면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그들을 잊었듯이, 그들도 대한민국을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문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중에는 무덤의 소재는커녕 이름과 행적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국적자로 남아있는 독립유공자, 가난을 대물림하는 유족들, 이러한 현실은 그 동안 독립유공자나 그 후손에게 국가적, 사회적 홀대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는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친일파들은 사회 주도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하였고, 분단국가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반면,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독립 운동 세력은 오히려 사회 주류에서 배제되고, 친일 세력에 의해 핍박받는 일도 많았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친일 문제를 언급하는 자체가 금기시될 만큼 역사의 정의는 실종되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 포상이 시작된 1962년 이후 1980년까지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위원 중에는 백낙준, 신석호, 이병도 등의 다수의 친일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신석호,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날조하는데 협력했던 인물이다. 이와 같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독립유공자들 중에 친일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들 중 친일 행적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서훈이 박탈된 경우는 없다. 얼마 전까지는 친일파의 후손이 일제 때의 기록을 근거로 재판을 벌여 친일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되찾아 가는 일도 있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의 뒤틀린 역사는 후대에 부끄러움만 남기게 마련이다. 부끄러움을 씻고 역사의 바른 길을 열어가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최근 친일파재산환수법이 제정되어 법의 집행이 시작된 것도 그러한 노력의 한가지이다. 독립유공자로 변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서훈은 박탈해야 한다. 반드시 친일파의 동상을 철거하고, 국립묘지에서 내몰아야 한다. 친일 청산은 멈출 수 없는 오늘날의 시대적 과제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 보훈 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독립유공자 유족 한분은 “국가 보훈처 직원들은 독립 유공자 후손을 불쌍해서 도와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보훈(報勳-공적에 대한 보답)이 아닌 시혜의 차원으로 전락하였다.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선대의 독립 운동을 입증해야만 하는 굴욕적 처지에 놓여있다. 프랑스의 경우,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각별하다. 전국 각지의 거리나 광장에 레지스탕스들의 이름을 붙여 기념하고 있다. 유족들에게는 연금 지급은 물론이고 기업체 의무 고용 규정을 마련해 취업을 보장하고 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독립 유공자의 유족들이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면서 이웃과 사회, 국가에서 예우와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의 제도적인 뒷받침과 더불어 사회적 관심도 더욱 필요하다. 독립유공자,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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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일한 인긴보다 더못한 사람은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를 비롯해서 제대로 심사치못한 무능하고 나태하고 한심한 심사관들입니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당신들이 얼마나 큰 과오를 범했는지 알게될것입니다.
태송님 님의 글을 보니 아주 화가 많이 나신듯 합니다 저도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보훈처 누구에게 글과 녹음된 테잎( 중국에서 녹음을 함) 을 동봉 하여서 보냈는데요 주 내용은요 중국의 어느 할머니의 시어르되는분께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증언의 음성인데요 보훈처 관계자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였지요 독립운동사의 자료라는것이 워낙에 오래된 자료와 증언이고 하니 이제라도 그렇게 증언을 할수 있는 로인들이 있을때에 자료 수집을 해달라고요 또한 증언된 부분에 대하여서 보훈처에서 곧 바로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해달라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러한 중요한 자료가 필요 할테니 자료가 수집이 되면
따로이 자료를 보관 하였다가 언젠간느 필요로 할때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는데요 아직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네요 그래서 혹시 몰라서 그 테잎은 아직도 저는 보관을 하고 있어요 그 테잎에 보면 보훈처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참 그 테잎을 광복회에도 보냈는데요 나중에 광복회에 연락을 해보니 그 테잎 자체가 보내여 졌는지를 의심 할정도로 모르고 있어요
분명한것은 그러한 증언을 할수 있는 로인들이 이제는 몇분이 안게시고 돌아 가신다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런지요 저도 보훈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울 뿐이에요
업적에비해 공훈이 잘못되었으니 재심청구하라는 통보를받고 지금은 서울에 갈수없는 형편이니 후일서울에 가면 심사위원회에
재심청구를 신청할테니 보훈처에 연락을 하라고 이르고 서울에가서 우선담당했던 지방보훈처 공훈심사과 와 보훈처장을 만나보니 3개월이내에 재심청구하게 되어있어 공소시효가 지나서 할수없다고 하여 서울보훈처 공훈심사과 들려알아보니 답은하나이더군요.
공훈심사가 잘못된것을 인정하면서도 보훈처 법이 그렇다고하니 화병나 죽을지경입니다.
광복회도 그렇읍니다 자신의 밥그릇챙기기 급급할정도를 보아야 되겠지요.
리선생께서도 잘아시겠지많 자료하나 찾는데 수십년식 걸려도 찾을까 말까한데 일하는 사람ㄷ
이 그귀중한 자료들을 아무렇게 취급한다는것은 독립운동하신 분들에대한 모독이라고 저는생각합니다.
활동많이 하고계시며 많은일을하고 계심 잘할고있읍니다.
부디 강건하시고 좋은말씀많이 들려주시기 바라는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