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무아/공성의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왜 모든 불경의 첫머리에는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하는 것일까요?
뭔가 이율배반적이지 않습니까? 뭔가 모순적이지 않나요?
이것 뿐만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어떤 때에는 세속법에 따라 말씀하셨고,
또 어떨 때에는 진제/제일의제/승의제의 측면에서 말씀하셨다라는 것 입니다.
왜 이렇게 구분해서 말씀하셨는가 하면,
언제나 윤회와 열반 두가지 측면에서 설법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걸 구분 못한다면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는 아주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래의 대지도론 인용 내용은,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이며 공성이 핵심인데,
왜 불경의 첫머리에 "나는"이라는 용어를 썼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입니다.
왜 불경의 첫머리에 "나는"이라는 용어를 썼는가에 대해서
용수보살은 다음과 같은 대답하십니다.
비록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 없음을 알기는 하나
세속의 법을 따라 "나"라 할지언정 실제의 "나"는 아니다.
비유하건대 금화로 동화[銅錢]를 사더라도 아무도 비웃을 이가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고파는 법이 의례 그렇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도 그와 같아서 무아(無我)의 법 가운데 나를 말함은 세속을 따르는 까닭이니,
힐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세간의 법[世界法]에서 나라고 함은
제일의제의 진실한 뜻 가운데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하여 나가 없으나,
세계의 법에 따라 나라고 말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불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에서 그 나는 세속법을 따랐다는 말씀입니다.
세속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달리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진제의 측면에서는 나도 없고, 듣는 자도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글로써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간의 방식 그대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아/공성을 완전히 깨우치시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이실지라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자신을 "나"라고 표현 하실 수 밖에 방법이 없지요.
만약 진제의 측면에서는 "나"라는 게 본래 없으므로,
다른 언어로 표현하셨다면 그것도 참 우스웠을 겁니다.
세속법을 따를 때는, 세속법을 따라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세간의 말에는 세 가지 근본이 있으니,
첫째는 삿된 소견이요, 둘째는 교만이요, 셋째는 이름이다.
이 가운데서 두 가지는 깨끗하지 못한 것이요 한 가지는 깨끗하다.
모든 범부들은 세 가지 말을 하니,
삿된 소견과 교만과 이름이 그것이다.
견도(見道)의 학인은 두 가지 말을 하니, 교만과 이름이요,
성인은 한 가지 말만 하니, 이름이 그것이다.
삿된 소견을 가지고 말하면 더러운 것이고
또 교만을 품고 말하면 그것 역시 더러운 것이지만,
이름이나 명칭 그 자체엔 아무것도 없으니 깨끗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인들께서는 번뇌가 없으시니,
오로지 명칭/호칭으로써의 이름이나 언어를 사용하신다는 의미지요.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속을 따르기 때문에 나라고 말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이제 모든 불제자들은 모든 법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고
여기에 집착되지도 않는다.
또한 모든 법의 실상에 집착되었다고도 말할 수 없거늘
하물며 나 없는 법에 마음이 집착되리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나라고 말하는가?”라며 힐난해서는 안 된다.
일체가 실체가 없이 공하여, 그 자체엔 아무것도 없음을 알지라도
이 세속법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나"라고 한다한들 아무런 과오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세속법을 따랐는가,
아니면 진제의 측면인가를 반드시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라는 말도 세속법을 따라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진제의 측면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자도 없고, 얻을 만한 깨달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깨달음/진제의 측면을 세속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