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한 두 가지 오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독수리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경험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하고 있는 한가지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경험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본성(마음)을 주신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한 후일지라도, 때때로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옛 본성으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과 회개를 받지 않으셨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다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떠나고 만다. 옛 본성의 요구에 굴복하는 죗된 생애를 살다보면,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철저하게 합리화 시키게 된다. 즉, 자신이 거듭나는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리가 요구하는 순종과 자아 희생을 거절하는 생애를 살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개 그러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향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완전하게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죄를 범해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면서, 인류들에게 죄짓기를 중단하라는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호소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권위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17.
2.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Once saved, Always saved)”: 옛 본성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잃어 버릴 수 없으며, 심지어는 거절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한번 구원받았으면, 나의 믿음과 생활이 어떻하든지간에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늘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도 요한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요한계시록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번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한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옛 본성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 그렇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 기 때문이다(갈라디아 5:17).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소욕 즉 옛 사람(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속에서 계속 부르짖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나 당근처럼 유익하고 선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썩고 부패한 것을 원한다. 비록 독수리가 그러한 것들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유혹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유혹에 굴복하여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끌려다니기로 선택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죄는 성립된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유혹과 우리 속에서 그 유혹에 굴복하라고 종용하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가 굴복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승리하느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건이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독수리의 요구를 듣지 않기로 선택해야만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 이 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 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도록 모신다면, 옛 사람 즉 독수리 같은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시험과 유혹이 접근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대답한다면, 자신 속에 있는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돼”라고 대답하는 것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해야 할 생애인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하여“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수리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박으려고 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지는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독수리와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모시고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 보좌에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모시며, 십자가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을 못박는 사람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일 뿐이다. 못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범하기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댄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달라고 애원하며 절규한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박아도 되쟎아요!” 못에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논리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오늘은 독수리를 못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피곤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 독수리를 구태어 힘들게 못박을 필요가 어디있나?” 라는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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