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봄은 집에서 시작되고 있었네
기억과 추억 사이/발길 닿는 데로 여행
2006-02-18 20:36:02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올해도 꽃샘추위가 지독히 매서웠다. 폭설이 무릎까지 쌓여 호남지방을 휘저어 놓고 폭풍이 영동지방을 헝클어 놓더니 또 다시 꽃샘추위를 몰고 왔다. 얼마 전에는 가랑비가 촉촉이 내려 봄이 오는 가 했더니 그새를 못 참아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는 걸 보면 꼭 사람들을 희롱하는 것만 같았다. 날씨가 이러니 봄을 기다리는 건 당연하다. 아마 눈길이 닿지 않는 먼 산 너머엔 봄이 사뿐사뿐 발걸음을 떼며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도착하려면 얼마 남지 않아 그것을 시샘이라도 하듯 꽃샘추위가 몰아치는 모양이다. 봄이 보고 싶어 봄을 찾아 길을 나섰다. 혹시 대전의 변두리에 봄이 발길을 얹어놓고 쉬고 있지는 않을까. 빨리 보고 싶어 백고을로 접어들었다. 사정공원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백고을은 예상대로 을씨년스러웠다.
백고을의 산자락엔 온통 까치소리로 시끄럽다
아무리 둘러봐도 봄은 보이지 않았다. 낙엽조차 홀랑 벗고 맨몸으로 서있는 굴참나무들이나 산 도로변의 가로수들, 그리고 짓 푸른 잎을 매달고 있는 침엽수에서 봄의 흔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날씨마저 쌀쌀해 산자락의 비탈 밭에 일렁이는 폐비닐이 고적한 외딴집에서 뿜어올리는 연기와 어울려 마음을 보통 심란하게 하는 게 아니었다. 나무옆에 바싹 붙어서서 훑어 보아도 봄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지금 남녘에는 동백이 꽃잎을 열었네, 매화가 꽃봉오리를 터뜨렸네, 호들갑을 떨지만 내륙지방인 대전, 그것도 변두리인 백고을은 남의 일인 양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인지도 몰랐다.
약수터엔 사람하나 없어 고요한 정적만 감돈다
떡 줄 사람은 없는데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처럼 아직 나무는 순도 틔우지 않았는데 봄을 찾으러 나선거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희망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까치들은 왜 그리 많은지 하늘로 쭉쭉 벋은 나무가지마다 까치집 투성이고 이웃 나무들을 날아다니면서 깍깍 거리는 까치소리에 귀청이 따가웠다. 그래, 지금 저 까치들은 봄을 부르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목청이 터져라 저렇게 깍깍거리는지도 몰라. 아마 저 까치들 부리 끝이 파랗게 물들면 그 때서야 봄이 와 있는 걸로 알아도 늦지는 않을 거야, 까치가 깍깍거리며 해맑은 목청을 산자락까지 쓸어 내리자 산 아래의 백천사 목어가 공중의 물살을 가르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는 필시 무슨 뜻이 담겨 있으리라. 나는 단번에 마음으로 그것을 알았다. 옆 길로 들어 까치재 약수터로 발길을 돌리라는 뜻 일게다. 백천사를 바라보며 산자락과 다랑이 밭들을 사이에 두고 맘씨 좋은 시골농부처럼 풀어져 있는 길을 역마살 인생처럼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약 500미터를 걸어와도 약수터가 눈에 띄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을까. 테니스 치는 학생에게 물어봤더니 옆에 앉아있던 아줌마가 대신 말을 받았다
“바로 여기에요. 턱을 올라서면 바로 보여요”
테니스장 턱을 밟고 올라서자 바로 까치재 약수터가 나타났다. 초라했다. 약수터라 해서 사람이 붐빌 줄 알았는데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사람하나 없는 약수터에서 본 물맛도 텁텁하긴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도 봄은 없었다. 약수터의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나무들마다 한층 물이 오를 것 같았지만 봄은 보이지 않았다. 테니스장을 둘러싼 산자락의 나무들 모두 꺼칠한 살결만 드러내고 있었다.
따먹고 싶어라, 망개열매
길을 헤매어도 봄을 찾지 못한 내 마음을 알았을까. 망개나무가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눈빛 시리도록 황홀한 저 열매들, 겨울 추위에도 살아남아 한 점 불빛으로 얼어붙은 산자락을 녹이고 있었다. 망개열매의 붉은 빛깔이 어느새 내 마음도 뜨겁게 데워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온 몸을 소름 돋게 했던 추위도 조금은 풀어진 듯 했다. 그러나 저수지를 본 순간 마음이 확 달라졌다.
봄을 기다릴까. 외딴집은 적막하기만 하다
저수지의 얼음처럼 나무도 아직 꽁꽁 얼어 있다
산길 도로를 타고 조금 오르자 모습을 드러낸 저수지, 맨살 거칠하게 드러낸 버드나무들이 서로 손을 잡아 길쭉한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녹지 않는 살얼음이 저수지의 반을 깔고 있었다. 몸이 가벼운 물새라도 발을 잘못 디디면 물에 빠질 것 같은 얄팍한 얼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몇 해 전 한 사내가 한많은 삶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산길도로를 따라 빙 둘러친 철망이 이채롭다. 한참을 두런거렸지만 저수지에도 봄을 찾을 수 없었다. 허리가 완전 꺾여져 반은 물 속에 잠겨있는 버드나무에 차가운 햇살만 내려앉고 산자락 숲에서는 또 까치들이 나무를 옮겨 다니며 갈매빛 날개를 털며 울부짖고 있었을 뿐, 집에 오는 길은 우울했다.
빨갛게 핏기가 도는 작약 대궁
마른 가지끝이 붉은 햇불을 달고 있는 듯하다
날씨는 아직도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전히 살을 에이는 추위다. 아직 봄은 멀었나 보다. 햇살이 조금은 풀어질 때 더 기다렸다가 다시 봄을 찾으러 가야지, 마음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뒤숭숭한데 어느새 발걸음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사람처럼 마당을 한번 썩 둘러보는데 어라 저게 뭐지, 말라 비뚤어진 작약 대궁에서 붉은 새싹이 비쭉이 고개를 내민 걸 보았다. 언뜻 보니 대궁끝에서 햇불이 붉은 빛을 뿜으며 활활 타오르는 것 처럼 보였다. 그 옆의 진달래나 철쭉, 장미, 감나무, 모두 까칠한 살갗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는데 유독 작약만 홀로 봄을 맞고 있었다. 이미 봄이 우리집 화단에 뿌리를 내리고 봄내음을 풍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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