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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진주강씨시조, 진주강씨조상인물,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영남(嶺南)의 고도(古道)로서 백제(百濟)때에는 거열성(居烈城)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30대 임금, 재위기간 : 661~681)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고 하였다.
그후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 통일신라 때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와 5소경으로 구획할 것을 말함) 의 실시로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 신라 제36대 임금, 재위기간: 765~780) 때 청주(淸州)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에 강주로 환원하였다.
서기 995년(고려 성종 14) 에 전국(全國)이 10도(道)로 개편되면서 진주(晋州)로 되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한때 진양(晋陽)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의 무장(武將)인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며 수(隋:중국의 통일왕조, 581~618)난 문제(文帝:초대 황제, 재위기간:541~618)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원(中原) 통일한 후 국경에 상접한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실패하자, 양제(陽帝:문제의 둘째 아들 2대 황제, 재위기간: 604~618)는 부황(父皇)의 유한(有限)을 풀기위해 침략의 야욕으로 사신(使臣)을 통하여 「수(隋)나라에 지성(至誠)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 고구려 왕이 친조(親朝)의 예을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치겠다」는 내용을 담은 국서(國書)를 보내왔다.
이때 왕이 신하를 모아놓고 회답을 논의 하였는데,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 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합니다.” 하고 무력대결을 주장하자 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서기 612년(고구려 영양왕 23)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고 113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해 올 때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출정하여 요동성(遼東城: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옛 고구려의 요충지)과 살수(薩水:평안북도에서 황해롤 흐르는 청천강의 옛 이름) 등지에서 수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러 지략과 용맹을 떨쳤다.
그후 그의 6세손인 택인(擇仁)이 서기 839년(신라 문성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낸 후 진안후(晋安厚)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진은 헌강왕 때 과거에 장원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와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역임한 후 진양후(晋陽厚)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군 강이식(姜以式)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박사공파(博士公派:파조 계용)․소감공파(少監公派:파조 위용)․관서공파(關西公派:파조 시중 원용의 손자 원로)․은열공파(殷烈公派:파저 민첨)․인헌공파(仁憲公派:파조 해동의 명장 강감찬) 등 크게 다섯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박사공파(博士公派)의 파조(派祖)인 계용(啓庸)이 고려(高麗) 때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1274년 통신사(通信士)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감찰어사(監察御使:감찰사의 종6품 벼슬) 사첨(師瞻)의 현손(玄孫) 시(蓍)는 공민왕(恭愍王) 때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한편 박사공파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회백(淮伯)과 회중(淮仲) 형제는 찬성사 시(蓍)의 아들로서 맏아들 회백이 고려말에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정2품 으뜹 벼슬)을 역임한 후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동북면 도순문사를 역임했다.
그는 특히 문장(文章)에 능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저서(著書)로「통정집(通亭集)」을 남겼다.
서기 1382년(우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회중(淮仲)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太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회백(淮伯)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네째 석덕(碩德)이 세종(世宗) 때의 영의정(領議政) 심 온(沈 溫:세종의 장인)의 사위가 되었고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한편 1441년(세종 23) 25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희안(希顔)은 돈령부 주부(敦寧府主簿)와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등을 지내고 1455년(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58년(세조 3)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하여〈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世宗)이 지은 〈훈민정음(訓民正音)〉28자(字)에 대한 해석을 달았고 금인(金印) 소신지보(昭信之寶)와 세조(世祖) 때 을해자(乙亥字)의 글씨를 썼다.
그의 동생 희맹은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5463년(세조 8) 진헌 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성종(成宗) 때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이 당대에 으뜸이라 하여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찬토록 하였다.
그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귀손(龜孫)은 음보(蔭補)로 군기시 주부(軍器侍主簿)가 되어 성종(成宗) 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사재감정(司宰監正)․좌통례(左通禮) 등을 거쳐 1485년(성종 16)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가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후 1497년(연산군 3)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등을 가볍게 벌하도록 주장하였고, 1500년(연산군 6) 진원군(晋原君)으로 봉해졌다.
그후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1506년(중종 1) 56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명종(明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사상(四尙)은 사인(舍人)을 지낸 온(溫)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로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으며 선조(宣祖) 때는 실록청동지관사(實錄廳同知館事)로「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우참찬(右參贊)․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급제한 신(紳)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정한 공(功)으로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왜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난이 끝나자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병조(兵曹)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소감공파(少監公派)에서는 파조(派祖) 위용(渭庸)의 아들로 검교(檢校)를 지낸 문로(文老)와 군기시사(軍器侍事) 충(冲)이 유명했으며, 상장군(上將軍) 희령(希齡)과 좌의정(左議政) 사덕(思德)이 뛰어났다.
그외 감찰(監察)을 역임한 중인(重仁)․뢰(賚)․순(洵) 등과 충순위(忠順衛) 육동(淯東), 교위(校尉)를 지낸 휴(眭)가 이름을 날렸다.
관서공파(關西公派)는 시중공(侍中公) 원용(遠庸)의 손자(孫子) 원로(元老)를 파조(派祖)로 하고 8세손 국흥(國興)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된 행(行)의 아들 문회(文會)는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여 동생인 문우(文遇:장령을 역임)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문회(文會)의 손자 언홍(彦弘)은 좌통례(左通禮)를, 별제(別提) 언굉(彦宏)의 아들 필문(弼文)은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여 현감(縣監) 공운(公雲), 좌승지(左承旨) 칭(偁), 감찰(監察) 응황(應璜), 수찬(修撰) 호 민(好敏)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파조(派祖)인 민첨(民瞻)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무훈을 세운 명장(名將)으로 1018년(고려 현종 9) 거란(거丹)의 10만 대군이 침입해오자 강감찬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고 개경(開京)의 싸움에서도 크게 이김으로써〈해동(海東)의 명장(名將)〉으로 일컬어졌다.
위에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지중추사(知中樞事)․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태부(太子太父)에 추증되었다.
은열공파 중에서도 특히 조선조(朝鮮朝)에 명성을 떨친 후손으로는 백년(栢年:문정공)과 현(鋧), 세황(世晃)의 3대(三代)를 들 수 있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백년(栢年)은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강 빈(姜 嬪:소현세자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한때 사직되기도 했으나, 1646년(인조 2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이듬해 전국 향교(鄕校) 재흥(再興)을 상소하였고 대사간(大司諫:사간원의 정 3품 으뜸 벼슬)에 올라 다시 강 빈의 신원(伸寃:원통한 일을 풀어 버림)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다.
현종(顯宗)이 즉위한 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서 동지 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숙종 때 좌참찬(左參贊:의정부의 정2품 문관 벼슬)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1690년(숙종 16)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아들 현(鋧:이조 참의를 거쳐 좌참찬․대제학․한성판윤 등을 역임) 손자 세황(世晃)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1772년(영종 48) 61세로 늦게 벼슬에 등용된 세황(世晃)은 1776년(영종 52)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으로 기로과(耆老科)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67세 때는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서화(書畵)에 뛰어난 그가 1784년(정종 8)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北京)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인들이 많았다 하며,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미 불(米 芾) 등의 서체(書體)를 본받아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비롯한 모든 체가 신묘한 경지 이르렀고, 산수(山水)․사군자(四君子) 등에 뛰어나「난죽도(蘭竹圖)」․「산수도(山水圖)」․「송죽모란도(松竹牡丹圖)」등을 남겼다.
한편 철종(哲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노(㳣)는 세황(世晃)의 증손(曾孫)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위유사(慰諭使:지방에 천재나 지변이 있을 때 어명으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내던 임시 벼슬)에 중용(重用)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로 피폐해진 강화도(江華島)를 다녀왔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872년(고종 9)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반대하다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되었다가 1874년(고종 11)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인헌공파(仁憲公派)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오른 궁진(弓珍)의 아들 감찬(甘贊)이 당대에 이름난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983년(고려 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중추원사(中樞院事)․이부 상서(吏部尙書)․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등을 지낸 후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할 떼 71세의 고령으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고 쫓겨가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소탕하여 개선(凱旋)할 때 영파역(迎波驛 : 의홍역)까지 마중나온 왕의 영접을 받았다.
그 공으로 검교태위(檢校太尉)․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3백호(食邑三百戶)를 하사(下賜)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模安國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석기(碩期)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등용되었으나 문란한 정국과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한 일)을 개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 반정(仁祖反正) 후에 댜시 등용되어 예문관 박사(藝文館博士)․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640년(인조 18) 61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1593년(선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항(沆)은 우계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남원(南原)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량 보급에 진력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인 영광(靈光)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日本)에 끌려가 일본의 학자(學者)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 곳의 지리(地理)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군사정보를 고국에 전했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석빈(碩賓)은 숙종(肅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진선군(晋善君)에 봉해졌으며, 1714년(숙종 40) 절일제(節日製: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던 시험)에 장원한 박(樸)은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수찬(修撰)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으나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벼슬을 내놓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외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영조가 당쟁을 없애기 위해 쓴 정책)을 반대했던 필신(必愼)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著書)로 「모헌집(慕軒集)」을 남겼고 시인(詩人)으로 유명한 위(瑋)는「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하고 김택영(金澤榮)․황 현(黃 玹)과 함께 한말의 3대 시인(詩人)으로 불리웠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姜氏)는 남한에 총 968,1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득본(得貫) 유래(由來)
1662~1685 사이에 간행된 강문(姜門)의 박사공(휘 啓庸)가 최초(最初)의 족보(族譜)인 남한보(南漢譜)에 의금부도사 석로(碩老)가 쓴 글 중에서 진주(晋州) 땅에 큰 강물이 두 줄기로 갈리어 하나는 은렬공(殷烈公), 나머지 하나가 박사공(博士公)의 후예가 되었다고 했다.
1747년(정묘년) 계향청(桂香廳)에서 발간한 세덕지(世德誌) 발문(跋文)과 1937년 간행된 박사공파 갑산보(甲山譜. 경남 합천 갑산에서 간행) 발문에 통일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정순공(貞順公) 진(縉)이 진양후(晋陽侯)로 피봉(被封)되어 이로부터 관향(貫鄕)을 진주(晋州)로 하게 되었으며, 진산(晋山), 진양(晋陽), 청주(淸州), 청성(菁城)은 다같은 이름이다.
시조유래(始祖由來)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에서 무장(武將)을 지낸 이식(以式)이다.
서기 597년(고구려 26대 영양왕 8)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침략의 야욕으로 사신(使臣)을 통해 「수(隋)나라에 지성(至誠)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왕이 군신(群臣)을 모아 놓고 회답할 것을 논의할 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던 그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서 답해야 합니다.(以劒可報)”하고 주장(主張)하자 왕은 이를 쾌히 받아들여 출정을 명했다.
그는 정병(精兵) 5만 명을 인솔하고 임유관(臨楡關)의 대전(大戰)에서 수(隋)나라 군사 30만 명을 대파(大破)하여 크게 무공(武功)을 떨쳤으며, 그후 수(隋)나라 양제(陽帝 : 문제의 둘째 아들, 수나라 2대왕, 재위기간 604~618)가 백만 대군으로 재침해 올때 다시 출정하여 요동성(遼東城 : 중국 동북 지방에 있는 옛 고구려의 요충지) ․ 살수(薩水 : 청천강의 옛 이름, 평북에서 황해로 흐르는 강) 등지에서 수군(隋軍)을 격파하여 명성을 날렸다.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1)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세아에 있어서 비록 많은 종족이 대립(對立)하였으나, 다 무무미개(貿無未開)한 유목(遊牧)의 만족(蠻族)들이라, 혹 일시(一時) 정치상의 세력을 가진다 할지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그 붕괴(崩壞)하는 날에는 다시 계속(繼續)할 터 까지 없어질 뿐이거니와, 토착(土着)의 민족으로 장원(長遠)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支那)와 조선이니,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세아의 양대 세력으로 만나면 서로 충돌이 많았다.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피차(彼此)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시기였다.
상고(上古)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건국이래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상태에 있어, 열국(列國)이 서로 침벌(侵伐)하므로 다른나라를 침범(외정:外征)할 힘이 없었고, 지나는 한(漢)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한(漢)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고, 태·차(太·次) 양 왕위쟁탈의 난(亂)이 중첩(重疊)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僚東)으로서 공손도(公孫度)에게 항(降)하여 고구려대왕때에는 고구려가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 거의 대등(對等)될 세력이 없으므로, 한을 쳐 요동(遼東)을 점령하는 동시에, 직예(直隷), 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가 되었고, 말기에는 가 가장 인민(人民)이 많이 모여살고 기름진 토지를 잃어 약국(弱國)이 되었으므로, 그 약국의 지위(地位)를 면(免)하려 하여 조조(曹操) 자손의 위(魏)나 모용씨(募容氏)의 연(燕) - 곧 지나 북방나라를 향하여 도전(挑戰)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방(南方)에서 궐기(蹶起)하여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가졌었고, 고국양(古國壤), 소수림(小獸林), 광개삼대왕(廣開三大王)이 일어나 요동을 쳤고, 또 서북(西北)으로 거란(契丹)을 정복(征服)하고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며, 장수왕(長壽王)이 70년간 민력(民力)을 휴양(休養)하여, 인구가 번성하고 국력이 팽창하여 지나와 견줄만 하였다. 그러나 남방서국대(南方四國對)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생겨 후면(後面)의 견제를 받았으므로, 장수왕 이후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방통일에 전력하였다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2)
만일 이때 지나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도 남북으로 분립(分立)하여 산해관이동(山海關以東)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초발(魏招跋)씨의 백제 침입과 주자문(周字文)씨의 고구려 침입과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 흥망(興亡)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血戰)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 경에 이르러, 주자문씨의 제위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강남 6조중 한나라)을 병합(倂合)하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었고,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없인여겨 북방의 돌궐(突闕)이나 남방의 토속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하여 신하의 예(신례 : 臣禮)를 취하였고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피(彼) 편오자존(騙傲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았겠는가<수(隋)의 황가(皇家)와장상(將相)들이 거의 해비종(解卑種)이나 지나에 동화(同和)한지 기구(己久)>. 이것이 수병(隋兵) 입관(入冠)의 제 1의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년 서로 풀지 못할 만한 원수(구수 : 仇讐) 관계였으나, 돌연히 옹서(翁壻)의 나라가 되어 서로 친선을 맺고 양국이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양국이 매양 사자(使者)를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를 칠것을 청(請)하였고, 또 가끔 고구려 국력의 허실(虛實)을 일으키어 수나라 군신(君臣)의 야심을 조장하였나니, 이것이 수병입관 제 2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그 구구(區區)한 반독립이나마 유지해온 것은, 고구려가 오랜 세월동안 굳건하게 참고 저항하였던 점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던 까닭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망하였더라면 백제나 신라가 다수의 군현(君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古史)를 읽을 때에 신라와 백제가 수에 청원(請援)한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역사일 것이다.
임유관(臨關)의 전역(戰役)
?년(翌年)에 고구려의 요서(遼西)에 침입(侵入)하여, 수나라의 요서총관(遼西摠管) 위충(偉沖)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 나오니, 수나라 임금, 문제가 30만 대병(大兵)을 동원,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라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總管)을 삼아 바다로 맡게하니, 주라후가 비록 평양으로 향한다고 말은 하였으나, 사실은 군량미를 실은 배를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대병(大兵)에게 군량(軍糧)을 전해 주려 하였으나 강이식장군이 수군에게 바다에서 격퇴할 것을 명령하여 군량미를 실은 배를 격퇴하고, 군중(軍中)에 명령하여 벽루(壁壘)를 지키고 출전치 아니하니, 수병이 식량이 없는 중에 또 6월에 장마를 만나, 기아(飢餓)와 질병으로 죽은 적군이 무수히 발생하여 후퇴하자, 강이식장군이 이를 유수(水)상에 격퇴하여 수나라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많은 노획물을 얻고 개선하였다.
<육서(陸書)>에는 '양량의 군대는 장마와 질병으로, 주라후의 해군(水軍)은 풍랑을 만나, 해군(水軍)이 후퇴할 때 「살아남은 군인의 숫자가 10명중 9명」밖에 되지 않은 것은, 천재지변으로 진 것일 뿐 고구려에 패한 것이 아닌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하여 자존심을 감추려는 것으로 이는,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니 임유관 전쟁은 물론이요. 곧이어 침공하는 살수전쟁(薩水戰爭)의 기록도 이같은 춘추필법을 따른 기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임유관 전쟁 이후에 수나라 임금,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서로 휴전을 맺고, 상품교역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는 10여년 동안이나 전쟁없이 지냈다.
■ 저자 : 신채호(申采浩) 1880∼1936年 한말(韓末)의 역사학자, 언론인 호는 단재(丹齊). 본관은 고령(高靈) 13세때 사서삼경을 읽은 천재로서 20세에 성균관학사(成均館學士)를 지냄. 황성신문,대한 매일신보 등에 강직한 논설을 실어 독립운동을 북돋우기에 전념하였다. 한일합방후에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와 북경 등지로 다니며 독립운동에 관계하는 한편 국사연구와 저서(著書)에 힘쓰다가 무정부 주의자 비밀결사 사건으로 일본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언도받고 복역중 8년만에 여순 감옥에서 돌아가심. 한국 언론의 선구자로서 그 업적이 길이 추모되고 있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姜以式 將軍은 어떤 人物인가?
고구려 영양왕때 명장(名將)이며 진주강씨(晉州姜氏) 시조(始祖)이신 강이식장군은 서기 597(영양왕 8)년 수나라 문제(隋文帝)가 고구려를 침범할 야욕으로 사신(使臣)에게 국서(國書-외교문서)를 고구려에 보내 왔는데 국서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스러운 내용이었다.
영양왕이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신할 내용을 의논할 때 군신간의 의견이 여러 갈래였으나 강장군만이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 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전쟁할 것(개전 : 開戰)을 주장하여 영양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명으로 하여금 요동에 있는 임유관(臨關)으로 출전하여 첨예병 1만으로 요서(遼西)를 공격하고 수병을 유인, 글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쳤으며, 이듬해 다시 대병(大兵)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정벌, 수나라 요서총관 장충(張沖)과 접전, 임유관으로 거짓 퇴병(退兵)하자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대총관(大摠管)으로 삼아 임유관을 향하게 하고 주라후(周羅喉)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는 척 속였으나, 강 장군은 주라후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양량에게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한 속임수 임을 미리 탐지하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즉각 요격하여 주라후의 양선을 격파하니 수병은 군량미 보급이 끊어지고, 또 6월의 장마를 만나 기근과 질병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후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 하고 강화를 맺고 상품 교역을 재개, 십 수년이 지난 뒤 수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영양왕 23년) 고구려를 재 침공하자, 강 장군이 수륙양군(水陸兩軍)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고, 왕제(王弟) 건무(建武)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한편 수양제는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키자 을지문덕은 거짓 패하여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까지 유인하자 속은 것을 알고 회군하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대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강 장군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으며 봉길선(奉吉線) 원수림 역전(元帥林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 이란 큰 비가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 당시 소멸되었고 현재 묘역(墓域)은 밭으로 개간되었고 묘지(墓趾)에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있다.
시조 사적탐구
수나라 문제의 모욕적 외교문서와 강이식의 북벌(北伐) 논의(1)
기원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陽王) 8年이요, 수문제가 진(陳)나라를 병합(倂合)하여 지나를 통일한지 17년이니, 수나라가 이즈음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갑병(甲兵)이 매우 충족하여, 고구려와 힘을 겨루고자하여, 무망(誣罔)과 오만(傲慢)을 극(極)한 모욕적 서신(書信)를 보내왔다.
국서의 내용=「짐(朕)이 천명(天命)을 받아 솔사(率士)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해우(海隅)를 위임함은, 교화(敎化)를 선양(宣揚)하여 원?방지(圓?方趾) 각(各)히 천성을 수(遂)케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使節)을 보내서 해마다 조공(朝貢)을 하니 무릇 타국에 유사(遺使)를「조공」이라 씀은 책(冊)중에 그렸을 뿐이요, 대등국(對等國)에 보내는 국서에 쓰지는 못하는 것인데, 지나춘추(支那春秋)이래 상례(常例)이다.
이를 그 사(史) 이제 고구려의 노(怒)를 격(激)하여 일전(一戰)을 구(求)하려 하므로 비록 번부(藩附)라 칭(稱)하겠지만 성절(誠節)이 미진(未盡)하다.
왕이 이미 짐의 신하 인즉 짐의 덕(德)을 닮음이 가(可)하거늘, 그런데 왕이 말갈(靺鞨)을 구핍(驅逼)하며, 거란을 고금(錮禁)하여, 왕의 신처(臣妻)를 만들고, 짐에게 내조(來朝)함을 저(沮)하여 선인(善人)의 의(義)를 모(慕)함을 분하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독해(毒害)가 심하뇨. 짐의 태부(太府)에 공인(工人)이 불소(不少)하니, 왕이 용(用)코자 할진대 진문(秦聞)하면 얼마라도 보낼지어늘<그 부강(富强)을 과장하는 말>, 왕이 석년(昔年)에 가만히 재화(財貨)를 행하며 소인(小人)을 이용하고 노수(弩手 : 궁수)를 사장(私藏)하며, 병기(兵器)를 수리하니, 이것이 무엇을 위하여 함이냐... 고구려 한나라가 비록 토지가 좁고 인민(人民)이 소(小)하니, 이제 왕을 출(黜)하면 반드시 다른 속관(屬官)을 보낼 것이다. 왕이 만일 심(心)을 세(洗)하고 행(行)을 역(易)하면 곧 짐(朕)의 양신(良臣)이니, 어찌 반드시 다시 관속(官屬)을 두랴 왕은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양자강)과 어떠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陣國)과 어떠하랴.
짐(朕)이 만일 생육(生育)을 포함하지 아니하고 왕의 죄과(罪過)를 책(責)할진대, 장군 한명을 보냄이 족(足)하
무슨 큰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은근히 깨우쳐 일러줌이니 왕의 자신(自新)을 바라노라.」
수나라 문제의 모욕적 외교문서와 강이식의 북벌(北伐) 논의(2)
<삼국사기>에는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 수 문제가 평원왕에게 보낸 것으로 기재하였으나.<수서(隋書)>에는 수문제 개황(開皇) 17년에 평원왕에게 보낸 것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평원왕 32년은 수문제 개황 17년이 아니니,<삼국사기>에는 년조(年條)를 잘못 표기하였으며,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붕서(崩逝)한지 7년 뒤니, 수서(隋書)에는 그 왕대를 잘못 기록하였다. 인국(隣國) 제왕의 붕서를 매양 그 보상(報喪)의 년(年)으로 기(記)하고, 따라서 그 서실(書實) 발생의 년조(年條)를 이개(移改)함은, 지나(春秋)이래의 습관인 고로,<隋書>에 이같은 잘못 기록되어 있음이거늘,<삼국사기>는 평원·영양 양본기(兩本記)의 년조(年條)는 고기(古記)를 좇고, 피아(彼我)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수서>를 베껴 기록한 한겄이므로, <수서>에 이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글이라 한 고로, 삼국사기에 드디어 이 글을 평원왕 32년에 이재(移載)하여 년조(年條)를 잘못 표시한 동시에, 사실의 관계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영양대왕이 이 모욕의 글을 받고 크게 노(怒)하여, 군신들을 모아 회답할 문자를 보내려 하더니, 강이식(姜以式)이 가로되,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을 붓으로 회답할 글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글이라」하고 개전(開戰)함을 주장하니, 대왕이 이를 낙종(樂從)하여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師)를 삼아, 정예병 5만을 뽑아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병(濊兵)(<수서>의 말괄) 1만으로서 요소를 침우(侵擾)하여 수병을 유인하며, 거란병(契丹兵) 수천으로써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양국의 제 1전쟁이 개시(開始)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 삼자(三字)도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이는<수서>만을 초록(抄錄)한 문자인 까닭이거니와,<대동운해(大東韻解)>에는 강이식장군을 살수(薩水)전쟁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師)라 하고,<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장군을 임유관(臨關) 전쟁의 병마원수(兵馬元師)라하여, 두 책이 같지 않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동생이 해안(海岸)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 육지를 맡았으니,어찌 병마도원수의 강이식장군이 있었으랴. 그러므로<서곽잡록>을 믿노라.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공 휘 이식 사적비명 및 서문
강이식 장군 사적비명(事蹟碑銘) 및 서문(序文) (1)
晉州는 삼한이래의 옛고을이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영남의 명승지인데 고을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 남쪽기슭 만인이 우러러 보는 곳에 높이 지은 이 사당(祠堂)을 처음 세운 것은 조선 선조(宣祖) 3년 서기 1570년이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진주성이 무너졌던 계사(癸巳)년 서기 1593년에 불타 버렸다가 백여년후 숙종 40년 서기 1714년에 중건(重建)했으나 순조때 또 타버리고 뒤에 다시 개축이건(改築移建)을 거듭한 나머지 이같이 장엄한 새 집을 이루어 놓았다.
사당에 올라 옷깃을 여미고 참배한 다음 물러나 옛 역사를 멀리 상고하건대 우리 민족은 일찍이 백두산, 흑룡강 1만리 평야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悠久)한 세월을 거쳐오면서 민족으로서의 집단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대륙의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피로서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 본적이 없었다.
한무제(漢武帝)가 수륙으로 군사를 이끌고와 침공했을 때 희생된 이가 얼마였던지 강토의 일부 일망정 저들에게 빼앗겨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침해(侵害)를 보았던 것이나 400년동안 끈질긴 항쟁끝에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수복(收復)하고야 말았다. 대륙의 세력이 바뀔적 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기에 일찍 공손씨(公孫氏) 또 혹은 위구(위寇)와도 싸우면서 장열한 유혈을 아끼지 아니했으며, 마침내 수당(隋唐) 양조(兩朝) 오제(五帝) 70년동안 연 인원 7백만 대군의 침략을 겪으면서 매번 그들을 물리친 민족의 의기는 우리들의 혈관속에 박혀 내려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는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冬佳江) 유역을 무대로 하고 일어선 뒤 만주와 연해(沿海), 그리고 남쪽으로 요하 유역에까지 세력을 펼쳐갔던 대강국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대륙에서는 수문제 양견이 일어나 남북조를 통일시킨 다음 그의 세력을 멀리 몽고와 서역(西域)에까지 뻗어나갔던 막강한 제국이었으므로 서로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민족항쟁이 벌어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평원왕(平原王) 마지막해 32년 서기 570년에 수문제가 남조진(南朝陳)을 평정하자 일찍부터 친선관계를 맺어왔던 고구려로서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어 평원왕 다음 영양왕(陽王)이 즉위(卽位)하여 두나라 사이의 충돌을 미리 내다본 나머지 성곽을 수축(修築)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군량을 비축하기에 모든 힘을 다하던 중 수문제로부터 고구려를 협박하는 내용의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왔던 것이니 그 국서의 내용은 진작 삼국사기 평원왕 마지막해 본기(本紀)에 실려있음을 본다
강이식 장군 사적비명(事蹟碑銘) 및 서문(序文) (2)
영양왕은 모욕적인 국서를 받고 군신(群臣)을 불러모아 회답할 말을 논의했을 때 강이식 장군이 글로써 대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대답하자고 주장하므로 영양왕도 거기에 찬동(贊同)하여 왕의 9년 수문제 개황(隋文帝 開皇) 18년 서기 598년에 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말갈병(靺鞨兵) 1만명으로 지금의 만리장성 서쪽 요서(遼西)로 나가 요서총관 위충(韋沖)의 군사와 접전하여 임유관, 곧 산해관(山海關)으로 수병을 유인했다.
수문제는 한왕 양량(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주라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하고 수군은 요서 유역까지 나왔다가 장마를 만나고 군량(軍糧)도 떨어졌으며 주라후의 수군은 산동성 동래(山東城 東萊)에서 출병하여 바다를 건너 영평지방인 평양을 향하다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파선(破船) 혹은 표류(漂流)로 요수(遼水)를 건널 수도 없었거니와 실상은 강장군이 벽루(壁壘)를 지켜 항전하고 수군을 풀어 거의 전군을 격침(擊沈)시켜 수병은 30만명 중에서 열의 여덟, 아홉을 잃어 버리고 9월에 헛되이 돌아가니 이것이 수(隋)와의 제 1차 전쟁이었던 임유관 전투요, 강 장군의 큰 공적이었다.
그러나 전쟁기록은 역사책(사서 : 史書)에 적혀있으면서도 강 장군의 성명은 적히지 않아 우리 모든 국민들은 1100년이 지나도록 그의 사적(史蹟)을 아는이가 없었으나 국사학계의 태두(泰斗)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이 "조선상고사"에 처음 밝혀냄으로써 민족적 영웅의 이름과 업적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흔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재는 그의 저서속에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解) 등 두가지 문헌을 인용했는데 잡록에는 임유관 전투때 병마원수로, 운해에는 살수대전(薩水大戰)때 병마도원수로 각각 달리 적혀 있는데 이 중에서 단재는 서곽잡록의 기사(記事)를 쫓는다고 말하면서 임유관 전투로부터 30년뒤 수양제(隋煬帝)때에 일어난 살수대전때에는 왕제 건무(王弟 建武)가 해군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군을 맡아 있었기 때문이라 했었다. 물론, 그같이 희귀한 문헌을 발굴해낸 단재의 견해를 따라야만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제 1차 임유관 전투때 병마원수로 지휘했던 강 장군이라 제 2차 살수대전때에는 병마도원수로 지휘한 것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구태여 장군의 지위를 따져야 할 필요를 느끼기 보다는 그때에 그같은 민족적 대 영웅이 계셨던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수문제 뒤 양제 양광(煬帝 煬廣)이 대업팔년 영양왕 23년 서기 612년에 2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쳤다가 참패(慘敗)한 제 2차 살수대전 역사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고 사기(史記)에 자세히 적힌바라 재록(再錄)하지 않거니와 강씨세보(姜氏世譜)에 의하면 본시 장군의 묘소(墓所)가 고구려 심양현 원수림(瀋陽縣 元帥林)에 있다고 했고 지금도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전(滿州 奉吉線 元帥林驛前)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馬元帥 姜公之塚)이라는 큰 비(碑)가 있어 10년전까지도 여러 후손들이 참배(參拜)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강이식 장군 사적비명(事蹟碑銘) 및 서문(序文) (3)
세상에 역사란 오래 지나면 희미해지기도 쉽고 잃어 버리기도 쉬운 것이다. 장군으로써 강씨 시조를 삼아 왔으면서도 자세한 사적(史蹟)을 전하지 못하고 뒷날 신라말엽에 태중대부 내의령(太中大夫 內議令)을 지낸 휘 진(諱 縉)은 시호(諡號)가 정순공(正順公)이요 진양후(晋陽侯)로 봉해진 어른이다.
그로부터 晋州로써 姜氏의 본관(本貫)을 삼게 되었거니와 장군으로부터 130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여러 지파(支派)로 나뉘었으니 각파 역대(各派 歷代)를 통하여 문무장상(文武將相)으로 무수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므로 여기에 세운 봉산사(鳳山祠)는 다만 강씨 일문(一門)의 영광이 아니요 민족 전체의 자랑이라 우리모두 민족의 영웅앞에 예배(禮拜)하고 의기전통(義氣傳統)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역사(歷史) 기록상의 고증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고대의 기본 사료(史料)임은 누구나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수전쟁편(高隋戰爭編)에 姜以式 장군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金富軾)선생은 유학을 숭상하는 유도통치의 성경(聖經) 구실을 하는 수사(隋史)의 문헌을 토대로 한 까닭이다.
그러나 수사(隋史)의 내용과는 달리 대동운해(大東韻解), 서곽잡록(西郭雜錄)등의 문헌에는 당시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강이식 장군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저서인 조선상고사 제 9편에 고구려 대수전(高句麗對隋戰)에서는 강이식 장군이 고구려의 병마원수로 임유관(臨關)에서 수군(隋軍)을 전멸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하여 단재 선생은 서곽잡록과 대동운해를 예로 들고 있다.
물론 서곽잡록이나 대동운해의 기록이 삼국의 기본 사료보다도 고증적(考證的)인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국사기가 유일한 삼국의 역사임은 틀림없지만 편찬과정에서 오직 중화적(中華的)인 경향을 내포한 까닭에 주권국가의 역사로서는 고증을 채택하는 방법에 모순이 내포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때문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야승적(野乘的)인 사료이긴 하지만 서곽잡록과 대동운해 등의 예를 들어서 강이식 장군의 전쟁기록을 수록했다.
이상의 문헌이 비록 야승적인 사료라고 하지만 고려로 부터 전하여 오는 사실적이라면 그것이 구전(口傳) 혹은 문헌 또는 유적(遺跡)으로 전해진 것이던 고증적 입장에서 볼때 오히려 야승적인 사료라고 하지만 정사(正史)의 가치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삼국사기가 중화적인 흐름에 있었으랴... 무릇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우리나라에 전해졌던 세시풍속을 위시하여 문헌등이 많았던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記),조대기(朝代記), 김대문 화랑세기(金大問 花郞世記), 최치원 선생의 문집(孤雲集)과 그밖의 유적 등에서 발굴되는 비문과 조각물 그 밖에 고대 기구등속(器具等屬)의 탑본(榻本) 등이 많았던 점에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화문화를 바탕으로 한 유도통치(儒道統治)를 시행했기 때문에 중국사서(中國史書)를 유일한 고증자료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고수전(高隋戰)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을지문덕 장군 밖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앞으로 종인(宗人)들은 시조사기(始祖史記)를 바로잡는데에 총력을 경주해야 될 것이다.
보사(譜史) 기록상의 고증
우리의 시조 강이식 장군은 서기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고구려를 침입할 야욕으로 사신(使臣)과 국서(國書)를 보내왔는데 국서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써 있었다.
이에 격분한 영양왕이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신할 내용을 논의할 때 군신간의 의견이 여러 갈래였으나 강이식 장군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하여 영양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요동에 있는 임유관(臨關)으로 출전(出戰)하여 첨예병 일만명으로 요서를 공격하여 수병을 유인 글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쳤으며 이듬해 대병을 이끌고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정벌하고 수나라 요서총관 장충(張沖)과 접전, 임유관으로 거짓 퇴병(退兵)하자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증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을 향하게 하고 주라후(周羅喉)로 하여금 평양을 진격하는 척 속였으나 강 장군은 주라후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양량에게 군량미(軍糧米)를 보급하기 위한 속임수임을 미리 탐지하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즉각 요격하여 주라후의 양선을 격파하니 수병(隋兵)은 군량미의 보급이 끊어지고 또 6월의 장마를 만나 기근과 질병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제 1차 고수전쟁(高隋戰爭)이 끝나고 수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서기 612(영양왕23)년 고구려를 재 침공하게 되어 제 2차 고수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강이식 장군이 수륙양군 병마도원수(水陸兩軍 兵馬都元帥)가 되고 왕제(王弟) 건무(建武)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한편 수양제가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키자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패하여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까지 유인하자 수양제는 뒤늦게 속은 것을 알고 회군하다가 살수(지금의청천강)에서 대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수전사(隋戰史) 기록상의 고증
수(隋)나라 전사(戰史)기록에 의하면 임유관은 수나라 한왕 양양(漢王楊諒) 원수의 아성(牙城)의 본거지로 되어있다. 남쪽은 벽해(壁海 : 황해)요 고구려의 영토가 있는 동쪽에는 요하(遼河)의 어구(於口)요 동북쪽에는 수나라의 대군이 집결 공격하여 오는 곳이다.
더욱이 청주에서 원병하여 오는 수나라 수군장(水軍將) 주라후(周羅喉)가 이끄는 대군 선단(船團)이 임유관으로 향하여 동진(東進)하고 있었다. 따라서 임유관은 수나라 대군이 집결하는 철통 같은 진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나라의 요새지(要塞地)에 사랑하는 병사를 남게 하고 또 사지(死地)인 함지(陷地)에 있으면서 죽지않고 살게하는 전술을 능히 선용하였다. 실로 전무후무한 교능성사(巧能成事)의 전술이라 하겠다.
이러한 작전을 계획하여 그 계략을 실천에 옮기기에는 실로 엄청난 모험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조(始祖)이신 강이식 장군은 수군(水軍)의 계략이 추호도 오산(誤算)함이 없이 능숙히 감행하지 않고 수군이 의심없이 임유관으로 집결할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둘리 만무했다.
따라서 수군의 형세가 이루어진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 반드시 고구려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 장군의 작전계략(計略)이 주효(奏效)한 것이다.
원래 전쟁은 항상 상대방의 형세에 따라서 변동하는 즉 적동사지(敵動司之)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강이식 원수(元帥)는 이미 수나라가 요서와 유주 일대를 노림을 알고 이에 대한 방어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주력을 요하의 하구(河口)로 정하여 놓고 연합군을 통하여 수군이 요서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거짓 패배를 꾸며서 영주총관(營州摠管 : 사령관)을 유인하여 임유관으로 집결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강이식 원수가 이끄는 육군과 수군은 이 무렵 요하어구(遼河於口) 동편에서 형세에 맞추어 임유관 연해에 있는 수군을 급습하여 해군기지를 점령하고 임유관 해안에서 배수진을 쳤던 것이다.
임유관 전투는 강이식 원수의 작전에 휘말린 수군(隋軍)은 완전 패전하게 된 것이다.
필자(筆者)는 1993년 6월 3일 - 15일까지 중국 수주(隨州)시 정부 초청으로 염제신농 생신추모제사(炎帝神農 生辰追慕祭祀) 참가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우리의 시조 강이식 도원수의 묘소를 참배(參拜)한 바가 있는데 묘(墓)의 봉분이나 비석은 파손되어 돌 조각만 쌓여 있고 현장(現場)은 밭으로 경작하고 있으며 묘 자리 앞에 비석받침(거북좌대)만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묘 소재지(墓所在地)의 옛날 지명은 만주 길림성 원수림(滿州 吉林城 元帥林)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중국 요령성무순현장당향 고려영자촌(遼寧省撫順縣張堂鄕 高麗營子村)으로 되어있다.
또 1976년 6월 1일 발행된 강씨종감(편집인 강신창)에는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 장군의 묘소는 고구려(황해, 평안, 함경, 봉천, 길림, 흑룡강)땅이던 현 만주 봉길성 청원헌 원수림 서쪽 언덕, 원수림역 동쪽700 m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 물
高麗時代人物(고려시대인물)
강민첨(姜民瞻): 고려시대장군, 현종 3년 1012년 5월 동여진(東女眞) 침입 격퇴함. 1016년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으며 1018년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의 10만 군사를 물리쳤다.
강진보(姜晋寶): 예종 17년 1122년 집현전 학사가 되고 18세에 송산관시에서 한림원에 뽑혀 시강문학이 되었다.
강계용(姜啓庸): 문과(文科)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으며 원종 15년 1274년 10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아들 인문(引文)과 함께 일본 정벌에 참가하였다.
강창부(姜昌富): 충혜왕 2년 1341년 음보로 정용위 대장군을 지냈으며 진양군(晋陽君)에 봉 해졌다.
강창귀(姜昌貴): 충목왕 2년 1346년 판도정광을 지냈으며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강군보(姜君寶): 충숙왕 5년 1336년 남궁민방에 급제하고 1346년 정랑(正郞) 우왕 3년 1377 년 중추원 첨서 예문관 대제학 등을 거쳐 문하좌시중에 이르렀으며 봉산군(鳳山君 )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경(文 敬 )이다.
강 시(姜 蓍): 고려말 조선초 문신으로 공민왕 6년 1357년 성균시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를 역임한 뒤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이 되고 청성군(菁城君)에 봉해졌다.
강회백(姜淮伯):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자는 백부(伯父) 호는 통정(通亭)으로 우왕 2년 1376년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1389년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 )의 호를 받았으며 이조판서 정당문학겸 사헌부 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고 태조 7년 1398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겸 병마수군절도사 영흥부운을 지냈으며 숭정대부 좌찬성겸 춘추관 성균관 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증직되었다.
강회중(姜淮仲): 우왕 2년 1376년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다.
朝鮮時代人物(조선시대인물)
강석덕(姜碩德): 조선초기 문신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로 호조참판, 대사헌, 개성부유수, 동지중추원사,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등을 역임하였다.
강맹경(姜孟卿): 세종 11년 142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부승지 좌부승지 도승지 예문관제학 판한성부사 의정부 우참찬 좌참찬 이조참판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겸 영예문관 춘추관 선운관사 세자사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등을 역임하였다.
강희안(姜希顔):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로 세종 23년 1441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고 한글창제에 참여하였으며 집현전 직제학, 호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인순부윤(仁順府尹) 사은부사(謝恩副使)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으며 그의 저서로는 최초 원예전문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 그림으로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등이 있다.
강희맹(姜希孟):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국오(菊塢) 만송강(萬松岡)이며 세종 29년 1447년 별시문과에 18세로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 예조정랑, 예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판중추부사, 이조판서, 판돈녕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하였고 영의정(領議政)으로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경국대전(經國大典) 세종․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저서에는 최초의 농서(農書)인 금양잡록(衿陽雜錄)과 사숙재집 촌담해이 사시찬요 등이 있다. 중국 남경에 다녀오면서 연꽃을 채취하여 처음 시험재배를 하여 퍼지자 읍호를 연성(蓮城)으로 하였고 현재는 시흥시 하중동 208에 향토유적 제8호 관곡지로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다.
강구손(姜龜孫): 성종 10년 147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재감정(司宰監正) 상주목사 승정원 동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좌찬성,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강학손(姜鶴孫): 성종 10년 1479년 생원시에 합격 조지서 별제를 거쳐 내섬시 사온서 의주부 감찰 사평 등을 역임하였다.
강태수(姜台壽): 중종 6년 1511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공조좌랑 예조정랑 등을 역임함.
강 항(강 항):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좌랑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휴가로고향인 전남 영광에 내여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으며 일본 포로가 되어 오쓰성(大津城)에 유패되었다. 1598년 교토(京都) 후지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일본에 성리학을 전하여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일본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등 원성화 임라산에게도 전수하는 등 일본의 명유들을 배출케 하였다.
강세황(姜世晃): 조선시대 무인서화가로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이 있고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거쳤으며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진다.
정일당강씨(靜一堂姜氏): 조선후기 여류문인 호는 정일당(靜一堂) 경서에 두루 통하여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깨달았고 시문에도 뛰어나 당시에 문명(文名)이 높았다. 글씨에도 능하여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近代人物(근대인물)
강우규(姜宇奎): 1855(철종6)-1920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만주 노령 등지에서 만세시위 전개하였으며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 일행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우국지사이다.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증산교의 창시자
강명규(姜明奎): 1896-1983 독립운동가, 1933년 대한혁명당(大韓革命黨) 위원 역임. 광복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韓國獨立黨) 중앙감찰위원 반민특위조사관(反民特委調査官)을 지냄.
강근호(姜槿虎): 1888-1960 1919년 3월 만주 춍정촌(龍井村)에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1920년 청산리(靑山裏) 전투와 1921년 서백리아(西佰利亞) 쥬유시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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