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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Gervase
2009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Take my yoke upon you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위대한 분이시다. 하늘의 별들을 창조하셨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께는 피곤함도, 지치심도 없다. 오히려 힘겨운 이를 위로하시고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는다(제1독서). 예수님의 멍에는 그분의 가르침이다. 서로 사랑하며 용서를 베풀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기에 멍에라고 하셨다. 힘들지만 지고 가야 한다는 암시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삶의 멍에가 무거울 때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삶은 누구에게나 힘겹습니다. 쉽고 편한 인생은 없습니다. 곁에서 볼 때 아무런 고생 없이 사는 듯해도 그 나름대로 어려움은 있습니다. 돈과 재물이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만이 느끼는 공허가 있는 법입니다. 아픔과 기쁨이 ‘함께 얽혀 있어야’ 건강한 인생이 됩니다. 너무 풍족하기만 해도 행복한 삶은 아닌 것입니다. ☆☆☆ 무거운 짐을 지지 않는 인생이 있을는지요? 누구나 ‘힘든 짐’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나 혼자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생각은 유혹입니다. 물론 실제로 무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마음먹기’입니다. ‘지고 갈 수 있기에’ 주셨음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힘든 짐을 지지 않으면 인생의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봄날 ☆☆☆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가야 합니다. 빨리 가다 보면 쉽게 지칩니다. 삶의 무게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삶이 되었습니다. 천천히 가고자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믿음의 길에 들어선 것이지요.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이 복음을 가지고는 관상을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복음서 내용이라도 모두 다 관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뭔가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이 복음관상을 하기에 적합하고, 단순한 가르침의 내용이나 비유 또는 설명만 있는 곳은 묵상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부초처럼, 연기처럼> -양승국신부- 대나무는 참으로 재미있는 나무입니다. 태풍이 불면 여기저기 커다란 나무들이 뿌리 채 뽑혀 쓰러지지만 대나무만큼은 여간해서 쓰러지지 않습니다. 가늘고 길며 속마저 비어있는 대나무가 쓰러지지도 않고 견뎌내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가로마디입니다. 세로 방향을 일정한 간격으로 끊어주는 가로마디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나무에는 신기하게도 일정한 거리마다 세로 방향의 약함을 보완하고 지탱해주는 가로 마디가 있으므로 강도를 유지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같은 이치인 듯합니다. 세로 방향이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 가로 마디는 일상의 느슨함을 끊고 다시금 힘을 주는 시기, 휴식이기, 기도의 시기, 피정의 시기, 세상의 번잡함을 떠나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시기입니다. 대나무의 가로 마디가 연약하고 긴 세로 방향에 강도를 부여하듯이, 우리 삶 안에서 주님 안의 휴식, 주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은 우리에게 힘을 주며, 다시금 원기를 회복하게 합니다. 일상적인 권태의 사슬을 끊게 하고, 다시금 새 출발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 안에 참 휴식, 참 위로가 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겠다." 여기저기 뭔가 위안거리를 찾아 숱하게도 헤매 다녀 보았지만 다 부질없는 것들, 부초 같은 것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사라져 갑니다. 우리가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인연 역시 덧없이 끊어집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주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위로와 휴식을 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실 때에만 우리는 아무런 아쉬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치고 고달플 때 누구를 찾아갑니까?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갑니까? 세상의 풍파에 시달릴 때, 여러 가지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당할 때마다 어디를 찾아갑니까? 인간적인 위로, 세상이 주는 위안도 중요하겠지만 그 누구에 앞서 우리의 영원하신 목자, 참된 위로자인 주님께로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추구권 -김현태 신부- 고통을 없애는 것, 이는 모든 종교가 바라는 바입니다. 모든 인간은 눈송이의 무게 - 최용진 신부- 예수께서 사셨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십계명에서 파생되어 나온 613가지의 율법이 있었는데 이 많은 율법은 개인적 양심의 역할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무조건 지켜야 했습니다. 게다가 율법학자들의 권위에 대한 복종까지 요구되었으니 보통 사람들의 어려움은 그야말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양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으로부터의 안식을 위하여 예수께서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제시하셨으니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법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특히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을 사랑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다림 -장재봉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오로지 그분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꼭 오실 그분을 깨어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충분한 은총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분의 명령대로 “눈을 높이 들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는 이 때 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매일 기다리고 해마다 거듭해서 새롭게 기다리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는 모든 곳에서 그분을 뵈옵는 은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소청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곧 대림이라는 뜻입니다. 그 좋은 날을 위해서 지금 우리는 간절히 기다리는 중입니다. 오늘,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누구와 비교”하며 “누구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일이 가장 소중하며 하느님을 깨닫는 일이 지혜라는 말씀이라 짚어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에 투신한 사람만이 세상이 ‘눈을 높이 들어’ 보기를 권하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잃고 하느님의 복음을 쫓아 살 줄 모르는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는 일이지요. 이야말로 주님께서 메어주신 편한 멍에이며 가벼운 짐을 지는 참 좋은 선택입니다. 믿음이 없어 지치고 곤고한 세상이 그분의 능력을 깨닫게 되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뜻에 의탁하는 삶이 늘 기다림인 까닭을 알았으니 그분의 약속, 그분의 축복, 그분의 사랑의 짐을 지기위해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설레입니다. 이것이 온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대림의 소망이며 대림의 과제이며 기쁨의 이유입니다. 아멘 대림 2주 수요일 새벽을 열며 오래 치료해야 할 난치병에 걸린 환자가 있었습니다. 환자는 슬픔에 잠겨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판공성사를 보시기 전, 꼭 깊은 성찰을 하세요. 빠다킹신부 초대 -조명연 신부-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를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김명희-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사에게 칭찬도 듣고 싶습니다. 아랫사람들한테 존경도 받고 싶습니다. 세상의 명예도 다 가지면 마음이 더 흐뭇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한테 칭찬을 듣기 위해, 존경을 받기 위해, 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늘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할지 요리조리 궁리합니다. - 김현 신부 - 철부지 아이 같은 나의 투정을/ 언제나 말없이 받아 넘기고/ 부드러운 미소로 날 반기는/ 그대는 내 인생의 동반자/ 그대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의 샘터엔/ 행복이 가득/ 목마른 꽃잎 위에 촉촉한 이슬/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가수 엄선영씨가 부른 ‘내 인생의 동반자’란 대중가요의 노랫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노랫말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맺기 위한, 평생의 동반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 위한 힘겨운 여정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바로 우리들이 힘들고 지칠 때, 기대어 위로를 받고 편안한 쉼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인생의 동반자를 곁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멀리서만 찾아 헤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당신 자신이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반자는 곁에 있는 사람과 보폭을 맞추며, 같은 곳을 향해 서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헤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힘겨워하는 우리들에게 먼저 손 내밀며 우리들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다가오신 예수님과 우리들이 언제나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얼마 전 한 요양병원에 병자 방문을 갔다가 그 곳에 쓰인 글귀가 너무 좋아서 메모해서 온 것이 있는데, 바로 이 글귀 속에 들어있는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이 아닐까 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마음씨 따뜻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언제나 손 내밀며 다가오시는,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홍성만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의 시작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주님의 초대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하며, 때론 비틀거리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초대에 응하지 않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압니다. 주님과 진솔한 관계 안에서만이, 삶에서 우러나오는 작고 큰 짐들을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지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렇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가벼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멍에와 집은 궁극적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보람찬 일을 할 때, 힘이 생기면서 마음이 뿌듯해지는 원리와 비슷합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걸머지면 주님의 죽음과 부화의 신비를 깨우치게 됩니다. 삶의 무게, 내 삶의 짐, 나의 십자가가 주님으로 인해 가벼워져서, 즐거이 지고 갈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방법 참다운 안식 -민경철 신부- 놀러 가고 싶은데 주일이라서 못가고, 조금만 달리 해보려고 하면 양심을 -오영숙 수녀- 주님은 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젖어 그분을 까맣게 잊고 지낼 때도, 끝없는 나락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항상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분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다른 일 때문에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시며 우리가 초대에 응하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인내가 많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회진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때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시며, 당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을 찾고 있고, 성당에 들어서서 성체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릴 때 “평화와 안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와 안식”이 영속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단 하루도 지속시키기가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체 앞에서 돌아서면 다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앙이 “평화와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위안”을 주는 마약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의 일부만 듣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당신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죠. 준주성범 11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름에 대해 이야기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이들 중에 천국을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십자가를 따르는 이들이 적고, 위안을 받고 싶은 이들은 많으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이는 적다. 또한 누구나 다 예수님과 더불어 즐기려 하지만, 그분을 위해 고통을 참겠다는 이는 적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어려움을 겪지 않을 때만 사랑한다는 것이죠. 평화와 안식을 얻고 싶은데 예수님의 멍에는 배우고 싶지 않고,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네 마음입니다. 흔히 이 멍에를 우리는 십자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멍에는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도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버겁고 무거운 이 삶의 멍에들을 어떻게 하면 가벼운 주님의 멍에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처럼 멍에를 메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삶의 멍에를 메고 간다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 맡겨진 멍에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받아 안고 간다는 것을 의미하죠. 다시 말해 당신에게 맡겨진 현실을 외면하거나 피하려 하기보다 끌어안고 마음으로 품어 안으면서 자신의 삶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도 지고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흔히들 사제는 두 개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말합니다.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이 입고 있는 제의의 앞과 뒤 혹은, 제의 위에 걸치는 영대의 앞과 뒷면에 각각 십자가가 있습니다. 두 개의 십자가는 바로 자신의 십자가와 자신에게 맡겨진 교우들의 십자가를 의미하죠. 그런데 이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모두 등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두 무겁게 자신의 등과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영대)를 앞으로 끌어안고 제대 즉,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은 사제들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모두 남이 주는 것, 남의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멍에는 등에 지고 가야할 남의 멍에가 되어 우리의 삶을 짓누를 것입니다. 자신의 것은 자신이 끌어안고 가야합니다. 그것을 자신이 끌어안지 않고 남의 짐이라고 계속 뒤로 물리면 앞은 가볍지만 뒤는 무거워 우리네 삶을 붙잡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온유함과 겸손함의 마음으로 삶의 멍에를 남이 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고 가신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이미 그 짐과 멍에가 가볍고 편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때문이죠. 오늘 하루 그렇게 자기 주위에 널린 선물들을 남의 것이 아닌, 하느님이 내게 주신 나의 멍에로, 바로 나를 위한 선물로 끌어안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십자가를 가슴에 가만히 안고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강영구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박동진 신부- 이익을 보면 의를 저버린다는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거짓된 목자에게 -하유설 신부- ◆남자들은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다른 이들에게 안식을 주는 사람으로 생각할까? 혹은 이러한 모습은 여성이나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가? 남성학에서 ‘남자다운 행동 틀(남자처럼 행동하기)’이 있다. 이는 사회가 남자에게 바라는 모습으로 울지 않는다?, 성에 대해서 안다?, 물러서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다?, 성공적이다?, 강하다?, 여성에게 주도적이다… 등이다. 반면에 ‘여자다운 행동 틀’도 있다. 이는 남자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잘 보살피고 복종적이고 너무 똑똑하지 않고 예쁘고 돈 잘 벌고 섹시하고 아이들을 잘 기르고 자기의 요구를 접어두는 것… 등이다. 사실 남성이나 여성이 이런 사회적 틀 안에서 24시간 생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남자가 이 틀에서 벗어나려면 아마 다른 사람의 놀림감이 될 것이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양승국신부-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미사에서 영성체가 끝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습관대로 잠깐 묵상시간을 가졌습니다. 영성체의 순간, 너무나 은혜로운 감사의 순간이기에 그냥 후다닥 일어날 수가 없지요. 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신자석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제 눈에 ‘확’ 띄는 자매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다른 신자들에 비해 표정이나 자세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다른 분들의 모습은 천태만상이었습니다. 꽤 긴 침묵시간을 못 견뎌 몸을 뒤채는 사람, 심심하다보니 주보를 뒤척이는 사람,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 하는 얼굴로 자꾸 시계를 보는 사람, 기다리다 못해 먼저 일어서는 사람... 그러나 그 자매님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습니다. 그 얼굴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찬 나머지 광채까지 났습니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미소 짓는 듯 했습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위로, 참된 평화, 참된 휴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우리가 행복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 다니지만 미사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지만 성체성사보다 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찾아 정처 없는 순례를 거듭하지만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입니다. 매일의 미사 중에 우리는 기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에로, 슬픔에서 환희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가는 은총의 파스카 축제, 기적 중의 기적이 바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매일 기적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데, 또 다른 기적을 찾아 헤매 다니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이른 아침, 일출 무렵, 풀잎 끝에 맺혀진 이슬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참으로 영롱합니다. 정말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즉시 말라버립니다. 이른 아침, 강가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단합니다. 정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찰나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눈앞에서 그 자취를 감춥니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인간적인 위로가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위안거리를 찾아 숱하게도 헤매 다녀보지만 대체로 다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부초 같은 것들입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입니다.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오래 가는 대상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자취 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인연들도, 우리가 목숨처럼 놓기 싫어하는 물건들도 덧없이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오직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영원히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자이십니다. 주님만이 영원한 안식처이십니다. 연인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휴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겠지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휴식은 그분 앞에 자리 잡고 앉는 것입니다. 그분의 좋으심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일입니다. -박상대신부- 매일미사의 준비를 돕기 위해 신자들이 손쉽게 쓰는 소책자 <매일미사>의 오늘 미사로 봉독되는 복음을 보면, 그 첫 부분이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는 덧붙인 말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복음의 본문으로 들어가는 전주(前奏), 또는 인트로(intro)의 역할을 맡아 연결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덧붙여진 말이다. 그런데 이 덧붙인 말이 오늘 복음의 진가(眞價)를 다소 흐리게 만들고 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이 가르침 형식의 단순한 "말씀"이기보다 앞서간 "찬양기도"(마태 11,25-27)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이를 찬양하는(25절) 예수님의 기도 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앞의 부분(25-27절)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이고, 오늘 복음(28-30절)은 인간을 향한 초대의 기도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시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그리고는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고 초대하시면서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고 약속하신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다는 말씀이 초대의 이유이고, 초대받은 자에 대한 약속의 내용이다. "멍에"란 아무리 생각해도 편하지 않고 무거운 짐이다. 멍에는 원래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하여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막대로서 그 자체의 무게만 해도 만만치 않다. 그것을 사람의 목에 맨다면 그 무게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어떤 처지나 형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얽어매거나 억누르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서 "율법"을 의미한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제시하는 율법의 멍에는 사람을 옭아매고 무겁게 짓누르고 자유를 속박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율법의 멍에는 편하고 가벼우며 자유와 영원한 안식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멍에도 결코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산상설교(마태 5-7장)에 배웠듯이 예수께서 주시는 율법은 유대교 율법 이상의 정심(正心)과 정의(正義)를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바로 사랑의 멍에라는 것이다. 이 멍에가 가볍고 편한 이유는 예수께서 스스로 지고 가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먼저 이 멍에를 매고 자신을 굽히셔서 우리 죄인의 반열에 서셨고, 우리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에까지 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사랑의 멍에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이웃에게도 이 멍에를 함께 지자고 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마태 11, 28-30) -유 광수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단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럼 언제부터 왜 이렇게 인간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기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 에덴동산을 떠나면서부터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습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간을 구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시다. "구원하다." 라는 말은 라틴어로 Salva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 구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생명을 구하다, 구제하다, 위험으로부터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간을 구조한다, 구출한다, 해방시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나를 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는데 누가 우리를 이런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구해 줄 수 있는가? 대통령이 할 수 있는가? 학교 선생님이 구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부모님이 구출해 낼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내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짐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고 고통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는 분은 단 한분 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이 초대에 응해야 한다. 이 초대는 바로 나를 위한 초대요, 나에게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이기 때문에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작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원의는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런 원의가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간절한 원의는 있으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거기에서 헤메이고 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요, 무기력함이요, 절망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는 복음이다. 우리들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벗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나의 구원은 그동안 나를 얽메어 놓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기 위한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다. 집회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내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어떤 강의를 하든 어떻게 알고 나타나시는지 그 자리에 반드시 와 계신다. 이 할머니와의 인연은 99년도 마르코 복음 강의를 사당동에서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강의를 하든 줄기차게 쫓아다니신다. 지난번 논현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남보다 항상 일찍 오시는데 하루는 저에게 다가 오셔서 "신부님, 저는 요즈음 생기가 납니다. 이 노인네가 생기가 나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다 신부님 덕분이예요.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복음에 눈을 뜨니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가 편안하게 지낼 형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는 소대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할아버지 병 간호를 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서 생활하신다. 그런 형편이지만 그것을 고생이라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하고 가벼운 짐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예수님한테 그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음미해보자. 감사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된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알고 우리는 그분의 참된 자녀라는 것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사는 법을 배우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늘 우리를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갖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거지가 되어 온갖 고생과 굶주림을 겪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할만큼 아버지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여 마치 돼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항상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듯이 오늘도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애타게 기다리신다. |
첫댓글 찬란한 빛두르고 다시오실제
온세상 두려움에 떨고있어도
지은죄 많다하여 책벌마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용서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