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주님의 영적인 몸 그래서 교회는 계속해서 다양한 단계를 거쳐서 자라납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두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였어요.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란 어떤 모습을 가져야 되느냐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안디옥교회는 그 교회가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 교회의 사명 그것이 선교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리고 초대교회를 지나서 고대 교부 시대가 되면 교회는 더 많이 발전하고 많이 생겨서 5개의 교구가 생깁니다. 예루살렘 교구, 안디옥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그리고 로마 교구 그러면서 이때는 교리 신학이 발전하는 기관입니다.
교회가 세팅이 되고 조직을 갖추고 또 교리와 신학을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는 안디옥 교구와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이제 맞장을 뜨는 거예요. 이 교리가 발전해 가는 과정에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신앙과 교리 신학이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 교회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되느냐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첫째는 한마음 한 뜻 공동체가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32절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말은 쉬운데 이것처럼 어려운 게 없어요. 프랑스 초대 대통령이었던 샤를드골이 프랑스를 다스리면서 국정을 진행하면서 어려움을 토로할 때 이런 말을 했다고 그러죠. 246종이나 되는 치즈 프로마주를 먹는 이 사람들을 이 국민들을 내가 어떻게 통치할 수 있을까 지금은 제가 인터넷 찾아보니까 이 치즈 프로마주의 종류가 천 종류가 넘는다고 그러더라고요. 다양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 특별히 여러 개 살아보니까 이 프랑스인들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개성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그렇죠. 말씀도 많이 하시고 아주 아주 개성이 강한 분들이에요. 제가 여기 프랑스에 와서 올림픽 이런 국제적인 경기를 치를 때 우리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어떤 분은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자기 세계를 가는 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서 한 뜻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그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토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 어려운 거예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한마음 한 뜻 되기가 어려워 두 사람인데 부부간에 어려워요. 누가 부부 싸움하고 지지고 벗고 싸우려고 결혼했겠어요 그런데 마치 부부 싸움을 할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처럼 싸우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게 한마음 한 뜻이 안 맞아 내가 낳은 자식도 나를 낳아준 부모도 마음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다 우리가 그런 과정을 겪어왔어요. 지금 겪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형제 간에도 형제 자매 간에도 같은 피를 같은 배에서 같은 피를 받았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없어요. 한마음 한 뜻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교회는 또 오죽하겠어요? 피를 나눈 부모 형제 자매도 그런데 교회는 정말 남남이 모인 거예요.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한국 사람이 주로 있지만 여기 프랑스인 분도 계시고 또 오랫동안 여기서 사분 계시고 또 한국에서 가온 사람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고 나이 드신 분도 있고 또 우리 장 같은 이태리가 아니고 이집트 형제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이 한마음 한 뜻이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성격과 생각과 기질이 달라요. 다 스타일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조용히 앉아서 예배드릴 때는 다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지만 이제 마음을 열고 가령 셀 모임이라든가 구역이라든가 이런 데 가서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이때부터 이제 골때리는 상황이 연출되는 거예요. 오히려 더 그때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이 전혀 나하고 다른 입장과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대교회 특별히 초대교회는 우리 교회보다도 훨씬 더 격차가 심했어요. 초대교회 안에는 귀족도 들어왔어요. 그 안디옥 교회 같은 경우는 헤롯의 젖동생 만화인도 들어왔어요.
근데 거기에는 노예 출신도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이고 사회적 지위가 다른 사람들이 모이고 생각과 기질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한마음 한 뜻을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어요. 얼마 전에 성전 비문에서 사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보다 더 큰 기적이 뭐야?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한 마음을 이루고 한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 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너무나 기가 막힌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모여서 한마음 한 뜻이 되었더라. 역사에 딱 한 줄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마음 한 뜻 되는 것은 사실 인간적인 계획과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해보셨잖아요. 다 가정에서도 해보고 어디 동아리에서도 해보고, 모든 모임에서 해보셨다는 결국은 깨지게 돼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되는 거예요. 인간적인 노력, 인간적인 힘, 인간적인 조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좋은 프로그램에서 한마음 한 뜻 될 것 같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한마음 한 뜻은 한 복음 안에서 한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우리 마음이 모아지고 뜻이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는 영입니다. 마귀는 갈라놓는 영이에요. 디아볼로스 갈라놓다는 뜻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면 모양은 성령의 역사 같지만 마귀가 역사 영 분별이 어떻게 되느냐 열매로 알지니 갈라놓는 일을 하면 그건 마귀의 역사예요.
성령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사입니다. 에베ㅅㅎ서 4장 3절에도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이 역사하면 마음이 평안해요. 여러분 성령 충만한 예배를 드리고 가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막 불안하고 화가 나고 잠을 못 자는 사람도 성령이 역사하시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근데 성령 충만하고 뭐가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 같은데 자꾸 마음이 괴롭고 그렇다. 그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에요. 성령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길 원하세요. 부활하신 후에도 평안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이 평안해져요. 그리고 하나 되게 하십니다. 모든 벽을 넘어서, 모든 차이를 넘어서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일단 그렇게 그다음에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뭐냐 우리가 하나 되려고 인간적으로 애쓰고 하다 보면 조작이 되고 거기에 더 큰 상처가 와요. 우리가 모두 은혜 안에 잠겨 있으면 하나가 됩니다.
그다음에는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깨지 않아야 돼요. 그걸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외부에 이런 박해가 초대교회는 대단히 많았어요. 박해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는 무지막지한 300년의 박해를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교회와 성도는 박해를 받는 것이 운명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박해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 박해를 받음으로 하늘의 상이 크니 너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박해는 우리가 상받는 비결이었어요. 박해가 없어지자 박해를 안 하니까 박해를 받아야 상을 받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이게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중에 국교가 되면서 박해가 없어지자 아이고 내가 이 박해를 받아야 되는데 해서 스스로 박해 현장으로 나간 것이 광야 사막으로 나간 교부들이에요. 거기서 수도원이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만큼 외부로부터 받는 박해는 우리 교회와 기독교에게 굉장히 영적으로 유익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특히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유익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울은 계속해서 바로잡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후서가 그 내용이에요. 갈라디아서가 그 내용이에요. 바울 서신의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 다시 말하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책망도 하고 가서 조정도 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이 교회의 공동체를 평안의 공동체, 온전한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초대교회고 예루살렘 교회인 것이 우리가 밖에서 살면서 얼마나 세파에 시달리며 또 직장생활하며 학업하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아요. 그러나 교회에 와서는 서로 위로하고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힘을 얻어가지고 돌아가야 돼요.
그게 교회입니다. 근데 워낙 다양한 우리가 모이다 보니까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때가 있어요. 전들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안 주겠어요. 내 스타일이 다 맞는 사람들이 있겠어요. 내가 하는 표현이 어떤 분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어요. 내가 오늘은 안 쳐다보고 지나갔더니 왜 오늘은 목사님이 나를 외면할까 그리고 일주일 동안 고민하는 사람도 있어요. 왜 목사님 오늘은 저 사람만 쳐다볼까 마음에 막 질투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게 막 진짜 그런 예들이 있습니다. 그러고 가면 이 주일이 즐겁지 않은 거예요.
다 이해를 해야 돼요. 오늘 무슨 일이 있겠지 제가 이 체류증을 할 때 그 게스에 앉아 있는 분이 멀쩡한데 어느 날은 잘해주다가 어느 날은 막 안 해줄 때가 있어요. 그건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집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왔구나 오늘 기분이 안 좋구나 그렇게 하고 이해하면 되는데 왜 저게 오늘 나한테 뭐 하지? 이렇게 하기 시작하면 이게 도무지 해결이 안 돼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조금 더 이렇게 바운더리를 넓게 치고 우리가 서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아멘 나하고 다른 사람이 있어요. 다른 건 틀린 게 아니에요. 다를 뿐이에요. 다른 것을 틀리다고 생각하고 서로 교정하려고 하면 갈등이 생겨요. 큰 폭에서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지 않는다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든가
저는 처음에 한국에서 왔을 때 교인들이 모자를 쓰고 청년들이 모자를 쓰고 예배드리고 막 이런 거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가더라고 왜 모자를 쓸까 근데 그전에 어느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막 여기 러시아 모자를 쓰고 있어요. 여름에 그래가지고 저분이 아니 예배 시간까지 러시아 모자를 그 나중에 그분을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이 국제를 결혼하신 분인데 아기를 낳는데 이 프랑스 분들은 애를 낳고 산후 조리하는 걸 몰라요. 그래가지고 이제 자기는 좀 있다. 애기가 좀 시원찮아 았나 봐요. 그래서 퇴원을 했는데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를 보러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몸을 조리를 했더니 막 비바람이 치는 날 남편하고 갔던 거예요. 왔다 갔다 하면서 바람이 들어버렸어요. 그래서 여름에도 러시아 모자를 써야 보존될 만큼 힘든 거예요.
그리고 내 뒤에서 그것도 모르고 아이고 저분이 왜 그럴까 근데 알고 보니 러시아 모자 2개는 더 쓰셔야 되겠더라고 충분히 이해가 돼요.
그러면 되는 것이 그래서 우리 안에서는 그런 다른 거 내 스타일하고 여기는 또 패션의 나라 아닙니까? 또 여기는 스타일이 얼마나 서로 달라요. 근데 한국 사람들은 너무 남에게 관심이 많아 그러니까 남에게 너무 저 사람 오늘 저렇게 입었을까 그러지 마 지가 그러면 지도 입어 그렇게 그렇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려를 해야 돼요.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것이다. 그렇게 또 우리끼리 내부 총질하지 말아요. 프렌들리파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은 우리가 당하면 상급이야. 근데 우리끼리 서로 갈등하고 그러면 저는 목회 1호 목회 철학이 뭐냐면 싸우지 말자입니다. 20년 동안 그 얘기는 교회는 항상 갈등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만 안 해도 부응한다. 프랜들리 파이어 옛날에 이라크에서 미군끼리 잘못해가지고 아군 폭격을 했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얘기는 뭐예요? 내부 총질이에요. 그렇게 하면 우리만 서로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건 상급이 없어 외부로부터 받는 고난은 상급이지만 이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말을 하나 된 걸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돼요.
첫째는 말을 적게 하는 게 좋아요. 그래서 국제 결혼한 분들은 덜 싸울지 저는 그 생각이 들 할 것 같다. 별로 말을 많이 하다가 이게 싸우는데 그렇지 않은가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가 말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말을 부드럽게 해야 돼요. 저도 어려서부터 우리 아버지가 말이 거친 건 아닌데 말이 세 우리 송 씨 집안이 그래가지고 나도 모르게 말이 세 그 어느 날 같이 사는 사람이 싫어하는 거예요.
근데 말투가 싫대 내 말투가 왜 명령주에 나는 절대 명령한 게 아니고 상당한 배려의 마음이었는데 그게 싫다는 거예요. 너무 그러고 보니까 우리 종자가 말이 세더라고. 우리 씨가 말을 부드럽게 겸손하게 예의 바르게 서로 나는 무심코 던진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힘들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가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하고 가능하면 적게 하고 그리고 내가 한 말이요.
교회는 다 말 때문이거든요. 말은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성서적인 건 아닙니다. 알라디네 거기 나오는 거니까 거기에 있는 진이 같은 거예요. 또 동양의 호리병에 있는 어떤 세력 같은 거 그 안에 있을 때는 통제가 돼요.
우리 안에 말이 많아요. 막 욕도 하고 막 하여튼 우리가 혼자 막 설거지하면서 또 얘기하잖아요. 자기 막 자기도 상황 등에 이렇게 들어가가지고 중얼중얼 아마크 찍어놓으면 미친 사람 같을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말이 많아요. 근데 그 말을 내 안에 가지고 있으면 통제가 돼요.
그래서 톨스토이는 내가 화가 나거든 열을 새라 그래도 화가 안 되거든 100을 새라. 그래도 화가 나면 천을 새라. 그때는 움직이지도 말고 걷지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러면 이게 통제가 돼요.
그런데 이게 안 될 때가 있어요. 또 또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화 통 못 들면 한 4시간 하는 분 있어요. 여기 아파가지고 나중에는 이게 펴지지 않아 하도 많이 해가지고 그런데 그러다 보면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이 뱉어지고요. 그러면 이게 이게 슬렘프에서 탁 나왔기 때문에 통제가 안 돼 그때는 막 너도 다치고 나도 다치고 교회는 모든 게 우리 말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혀를 혀를 다스릴 수 있으면 그게 경건이에요.
그것만 잘해도요. 우리가 거의 성인의 박열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함으로 가정도 교회도 하나 된 것을 지키는 거예요. 가정도 부부 싸움이 뭐 별개 있습니까? 다 말 때문에 그렇죠 말 잘못해요.
왜 왜 그렇게 말해요? 당신은 왜 그렇게 말해 하면서 그때는 가만히 있으면 서로 되는데 뒷짐하겠습니다. 이게 참 아니 저도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저도 우리 집에서 내가 나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이 셌구나 회개할지어다 어딨어 누구예요? 오늘 한 사람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그 부인은 행복할 거예요.
이렇게 하나가 되면 힘이 있어요. 영향력이 있어요. 세상에 대하여 두 번째는 은혜의 공동체라고 그러 은혜의 공동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큰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은혜가 있었어요. 메가톤급 은혜 그냥 그냥 조금 느끼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완전히 은혜의 도가니 그런 곳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이 은혜라는 카리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어요. 호의 친절 선물, 아름다움 즐거움, 미덕, 감사, 돌봄, 보답 온갖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것을 다 포함하는 단어가 카리스입니다. 이 카리스라는 원래 단어를 사도바울이 이제 사용하기 시작해 그래서 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계속 은혜를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은혜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구원의 선물 이게 은혜예요.
우리가 은혜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이걸 강조하는 분들은 예배 끝난 다음에 은혜 받았습니다. 이러면 혼나요 잘못 이해했다고 그러나 이 은혜 안에는 다양한 뜻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첫째는 구원받은 은혜 그다음에 온갖 좋은 것들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데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배 끝난 다음에 은혜 받았습니다. 큰 은혜 받았습니다. 서로 나눠도 그게 무방해요. 특별히 누가는 이 더 넓은 의미의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주어지고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그들에게 큰 감동이 있었어요. 구원과 감동이 있었어요. 그로 인해서 엄청난 영적 에너지가 생겼어요.
그 모든 것을 뭐라고 하냐 은혜 큰 은혜가 있었어요. 이 큰 은혜가 있는 교회 똑같은 공동체도 은혜가 없는 교회는 딱 들어가면 기도도 안 나와 탁 막혀 여기저기 집회를 가보면 어떤 교회는요. 들어가면 캄캄하고 기도가 다 막혀요. 어떤 교회는 탁 앉기만 해도 가슴이 막 그 성령이 감동을 하면서 벌써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해 그거 감동입니다. 그런 큰 은혜의 공동체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서 십자가의 은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공간에 가면 그런 역사가 일어나요. 그런 영적 에너지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초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요즘은 이제 여행객들이 많이 오는데 여행 중에 오시는 분도 여기 와서 잠시 예배 드리고 가지만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새롭게 돼서 돌아가는 라마라오 같은 다윗을 쫓아갔던 사울도 거기 가자 하나님의 은혜에 취해서 예언을 하는 그런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다른 길이 없어요. 복음이 선포되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 이런 은혜가 임하는 거예요. 은혜는 조작할 수 없어요. 좋은 프로그램 해가지고 막 기쁘게 만든다고 은혜받은 건 아니에요.
제가 처음 교회 개척했을 때 많은 분들이 경직돼 있었어요. 하도 안 웃어가지고 근육이 굳어 있었어요. 찬양하라고 해도 손을 못 올려 이게 안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좀 이것 좀 풀어야 되겠다. 그래서 예배 마지막 송 하기 전에 웃음 훈련도 했어요. 배웃음 가슴 웃음 길길 웃음 모든 그래서 이제 많이 자유롭게 됐지만 사실 그걸 은혜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고 나면 기분도 좋아지고 하는데 그건 은혜가 아닙니다.
근데 그런 노력까지 했다고 우리가 진정한 은혜는 뭐냐 하면 복음이 선포되고 깨달아지고 그 복음이 역사할 때 성령이 함께 역사할 때 우리 속에 임하는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그런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들어야 되고 성령의 감동을 사모해야 되고 찬양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은 찬양대의 찬양도 우리 찬양대원들이 노래 자랑 우리 교회는 노래 잘하는 건 그냥 기본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는 처음 개척에서부터 지금까지 성탄절이나 칸타타 하는데 무슨 긴장을 해가지고 뭐 그렇게 준비 안 하고 그냥 거의 올라가면 다 됐어요.
여러분의 실력은 이해를 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은혜가 있어야 돼요. 큰 은혜가 그럼 그 찬양은요. 구원과 치유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지금도 좋은데 앞으로 계속해서 더 이 은혜의 공동체 안에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은혜받으니까 이 한 남자가 변하잖아요. 그거 참 저도 변합니다. 저도 옛날에는 점점 은혜로 제가 여기까지 왔지 저도 파란만장했어요. 이런 말 저같이 생긴 얼굴에 그런 얘기하면 안 어울린다고 하겠지만 돌아보면 다시는 그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정말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조 목사가 안 됐으면 나는 교회도 안 나왔을지도 몰라. 나 같은 놈은 그러니까 목사로 만들어서 주의를 지키게 하신 거예요. 이게 은혜 이 은혜 안에 있다 보니까 그나마 이 정도가 되는 것 같아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큰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이게 이게 초대 교회예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자발적 나눔 공동체 32절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다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 두고 그들이 각각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라 이거 쉬운 일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 의혹이 있어요.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있는 사람은 더 갖고 싶어서 내 거 뺏어갈 때는요. 이거 엄청난 저항을 일으킵니다. 약간 나누는 건 괜찮아요. 몇 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거 가지고는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는 모든 것을 팔아 각자 누구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
이건 정말 천국이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거예요. 모든 물건을 나누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다.
여러분 부모 자식 간에도요. 이렇게 못합니다. 다 부모가 자식 줄 것 같지만 자식이 어지간히 해야지 너무 다 뺏어가면 부모도 열받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저도 이제 나이가 좀 들어가는지 이 유튜브의 노후 대책 프로그램을 봐요. 이 은퇴 후에 노후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거기에 그 전문가들이 나와서 하는 1호 리스크 이걸 극복하라 그게 뭐냐면 자녀 리스크입니다.
한국 부모들은 자녀에게 다 준 거예요. 다 줬어. 사업할 때 주고 뭐 결혼할 때 아파트 사주고 나중에 저놈이 그래도 방 한 칸이라도 주겠지 했는데 자식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알거지가 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현대의 노후 대책은 1호 자식에게 주지 마라. 죽을 때 줘라. 그래서 참 얼마나 비정한 세상이에요. 자식이 지금 어려운데 자기 노후를 위해서 막 그 소유를 붙들고 있어야 되는.
근데 어쩔 수 없죠. 요즘은 재수 없으면 100살 산다고 그러잖아요. 자기 소유가 없는데 돈이 없으면 비참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소유를 지키려고 하는 그래서 부모 자식 간에도 비정한 시대입니다.
형제 간에도 마찬가지잖아요. 형제 간에 다 소유를 가지고 싸웁니다. 자기 것을 나누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나눔이 사랑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다 주고 싶은 거예요. 나중에 후회할 망정 사랑하는 그 순간은 다 주고 싶은 거예요. 마음이 열리고 하나가 되면 나눔이 시작돼요. 그렇죠.
우리가 연애할 때도 정말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내 목숨까지 주고 싶시오. 근데 그게 영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다 주고 싶지. 그러나 건강한 관계는 이 흐름이 좋다. 가령 몸으로 말하면 어떤 몸이 건강하냐 우리 동양의학으로 말하면 우리 몸 안에 에너지가 있대요. 그걸 다른 말로 기라고 그래요. 기라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잘 곳곳으로 흐르면 막히지 않고 흐르면 건강한 거 그 에너지를 물질적인 걸로 보면 피예요. 피 피가 온몸에 쫙쫙 흘러가면 건강한 거야. 근데 어느 날 피떡이 생겨가지고 쫙 흘러야 되는데 막혔다 그러면 뇌가 막히면 뇌경색이 오는 거예요. 인생 끝나는 거예요. 이게 잘 흐를 때 그래 이 심장이 내가 만드는 피인데 내가 다 줄 수 없다. 그래가지고 내가 딱 안고 있다. 나는 못 쳐 그럼 죽는 거예요.
건강한 몸은 아낌없이 공동체 안에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거얭ㅅ. 기가 막혀 죽겠네 기막혀 죽겠네 뭐 기가 차네 이런 말들이 다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는 흐름이 있는 교회였어요. 다 서로 그렇다고 굶어 죽은 사람이 없어요. 다 골고루 그중에 가난한 사람은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가 팔아 그 판 것을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 두고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라.
근데 이 초대교회 예루살렘의 이 이상을 2천년 기독교에 있어서 계속 이걸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게 공동체예요. 현대 공동체 중에는 영국에 있는 브라더 허프 모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고 한국에는 가령 다일공동체 같은 밥퍼 공동체죠. 그래서 거기 공동체 안에 가면 저는 갈 때 자주 가는데 가면 거기에 멤버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들어와서 기도하면서 섬기면서 삽니다. 농사지으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그 후원금을 가지고 수십 년을 밥을 푸는 거예요. 그 노숙자들을 위해서 그 나눔 그렇게 해서 초대교회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그리고 완벽한 건 없어요.
그 안에도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어요. 교회도 그런 노력을 많이 합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우리가 여기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룰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주님이 보셔 언제 완성되느냐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는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에요.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살아요. 기독교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정치인이라든가 사상가들도 이런 공동체를 꿈꿨어요. 그것이 바로 대표적인 것이 사회주의자들이죠. 이 유럽에서 다 나온 겁니다. 윈스테이 생시몽 샤를 프리에 로버트 오언, 칼 마르크스, 라살레 베른슈타인 이런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이 산업 산업화되어 가는 이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사실 이 산업화는 얼마나 좋은 거 아닙니까?
자본주의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 중에 아주 월등한 제도 중에 하나예요. 자유시장 경제라는 것도 마찬가지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래도 비교적 성공적인 그런 시스템이다 이거예요. 그러나 거기도 문제가 있는 거 그런 걸 본 거예요.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일어나면서 부가 소수에게 가고 노동자들이나 일반인들은 더 가난해지거나 더 어려워지고 좋아져도 약간 좋아질 뿐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시스템들입니다.
그중에서 라샬레와 베르슈타인 같은 사람은 독일이라는 사회에서 이것을 정치 현장에서 실현한 사람이에요. 독일의 사회민주당 같은 경우는 이 현실화된 이런 사상이 현실화된 그런 시스템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훨씬 균형을 이루면서 좋겠죠. 그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칼 마르크스라는 사람. 그 사람이 쓴 자본론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그 갈증이 있다는 거예요. 고민이 있고 이 자본론의 핵심은 그런 거예요.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 큰 문제가 하나 있는데 여러 가지 중에 제일 큰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 소외라는 거죠. 이 소외라는 단어는 원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립해서 더 낯선 것이 되고 나중에는 그것이 나와 대립하다가 나를 지배해버리는 거예요. 가령 옛날에 아주 옛날에는 산업화가 되기 전에는 내가 일해서 내가 일한 것을 내가 먹어 내가 그걸 지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산업화가 되고 세상이 이렇게 바뀌면서 노동자로만 전락을 해요.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해서 좋은 물건을 만드는데 그걸 쓰는 놈은 다른 놈이야. 나는 거기서 주는 월급으로 그것 또는 다른 것을 겨우 사서 써야 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는 부가가치는 주로 자본가들이 가져간다. 일부는 겁나게 부자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더 잘 사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이 사람들에 비해서 소수가 대부분의 불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죽도록 일만 하고 속는 거다 이거죠.
제가 이해한 자본론은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점점 노동자들은 억압과 비참함을 경험하고 자본가들은 필요 이상의 부를 갖게 된다. 그래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산을 하는 수단의 주체인 노동자들에게 생산 수단과 그 자본의 지배권을 주어야 된다. 참 좋은 말이죠. 그런데 그 방법이 뭐냐 그걸 돌려주는 방법이 뭐냐 계급 투쟁이라는 거예요. 있는 놈들 잡아서 죽이고 강제로 뺏어서 나누자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문제죠. 그걸 실험한 것이 유물론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우리가 역사 속에서 상당 기간 실험했지만 실패했어요. 사회주의 공산주의 좋다고 하지만 그건 실패한 이론 중에 하나, 오히려 공산주의를 실현했던 나라들은 더 비참해졌고 참혹해졌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지만 소수의 권력자들은 더 배불러졌어요. 더 강력한 권력을 갖고 나머지는 비참하게 됐어요.
그게 동부권이고 러시아고 북한인 것입니다. 그게 이제 문제예요. 뭐가 문제냐 이 방법을 이 성서적인 초대교회의 이 모습을 꿈꿨지만 그 방법을 잘못 계급 투쟁이라고 하는 강제적인 방법을 선택한 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 사람들도 다 욕심이 있어 권력을 가지면 더 갖고 싶고 재물을 가지면 더 갖고 싶고 그 탐욕 우리 속에 있는 탐욕을 간과하고 그걸 제도화시키자 그 탐욕이 괴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이에요. 왜 내가 타락해 있고 내 속에 아직 욕심이 있으니까 목사도 욕심이 있어요.
여러분만 욕심이 있는 게 아니야 이게 다 죄성입니다. 어떻게 실현을 돼야 되는 상처 없이 이것을 잘 실현하는 길은 자발적 나눔 공동체 자발적 너는 왜 부자냐 너는 왜 많이 가졌냐 뺏는 게 아니고 니가 많이 가졌던 내가 많이 가졌던 관계없이 나부터 조금씩 지금부터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할 때 점점 나눔의 공동체가 되고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거예요. 오늘 나가면서 여러분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또 어디 커피숍에 가서 마시더라도 맨날 얻어먹던 사람들은 오늘 한번 내기도 하고, 또 저 사람은 왜 항상 그냥 먹기만 하냐 열받지 말라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또 이렇게 하고 하면서 이렇게 자기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면 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어떻게 되느냐 은혜받을 때 되는 거예요.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됐습니다. 도상 그 지금 도중에 있어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다. 교회는 그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이에요. 이상적인 교회는 여러분 한마음 한 뜻, 큰 은혜 그리고 자발적 나눔 공동체입니다.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완전한 교회는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교회가 천국이 되고 이 천국된 교회의 영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