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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비밀에서 찾은 '아이가 알아서 잘 크는 양육법' #당신의 삶에 균열을 내는 '우구리의 관점'
안녕하세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관점을 창조하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오늘은 제가 그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창조한 관점 중 하나를 소개하려고 하는데요. 우주와 인간에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은 굉장히 비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 비밀로 인해 독자님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지도 몰라요. 그러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진실이며, 저는 이 비밀을 철학자 니체, 소설가 밀란 쿤데라,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원형과 직선의 시간’이란 비밀을 들려드릴게요.
‘원형과 직선의 시간’이란 관점으로 세 가지 질문에 답해볼 건데요. 세 가지 질문을 소개할게요.
1. 원형의 시간, 직선의 시간
우주에는 두 종류의 시간이 있어요. 하나는 원형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직선의 시간이에요.
원형의 시간은 끝없이 반복하고 순환하는 시간인데요. 예를 들어,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합니다. 또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으로 순환해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카레닌’이라는 반려견이 등장해요. 카레닌은 원형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데요. 때가 되면 일어나고, 산책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요.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열렬히 살아가지요.
반면 직선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는 시간이에요.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결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어요. 이때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요.
우주 속 대부분의 생물은 원형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반면 유독 인간은 직선의 시간 속에 살아가요.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된 시간 속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예측하고 꿈꾸는 독특한 종이예요.
2. “영원히 지금 같을 거예요!”는 왜 저주일까?
이 말을 한 번 들어보세요.
“독자 님은 영원히 지금 같을 거예요.”
어떠신가요? 찝찝하지 않나요? 곱씹을수록 저주처럼 느껴지지는 않나요?
그런데 반려견 카레닌이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요? 열렬히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영원하다니! 무척 기뻐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이 말이 저주처럼 느껴질까요? 답은 우리가 직선의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인데요. ‘원형과 직선의 시간’이란 관점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연에 흐르는 시간은 원형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원형의 시간 속 일어나는 일들에 ‘자연스럽다’고 이름 붙일 수 있어요. 자연스러운 세상에서는 ‘때가 되면’이란 말이 중요한데요. 때가 되면 해가 뜨고, 때가 되면 싹이 트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죽어 자연으로 돌아가요.
자연스러운 세상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분이 무의미해요. 어제가 오늘이기도 하고, 작년이 올해이기도 하니까요. 무한히 반복하고 순환하는 시간 속에는 더 나아질 것도, 더 나빠질 것도 없어요.
반면 인간은 직선의 시간 속에 살아가요. 따라서 직선의 시간 속 일어나는 일들에 ‘인간스럽다’고 이름 붙일 수 있어요.
인간스러운 세상에서는 ‘더 나아질 거야’란 말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요.
…
이 말 한 번 들어보세요.
“어쩜 갈수록 멋있어지네요!”
어떤가요? 제법 괜찮지 않나요? 기분 좋으시다고요?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약 반려견 카레닌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떨까요? “멋있어지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이상한 소리를 하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제 슬슬 원형의 시간과 직선의 시간 사이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인간은 직선의 시간에 살아갑니다.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존재예요. 따라서 우리는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요. 즉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고, 더 나아지지 않는 미래는 절망과 같아요. 따라서 ‘영원히 지금 같을 거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지독한 저주가 되는 거죠.
3. 인간스러운 삶, 키치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독특한 종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떨 때 ‘더 나아진다고’ 느낄까요? ‘더 나아진다’는 게 무엇일까요?
‘더 나아진다’는 건 ‘보다 새롭고 보다 탁월한 무언가가 창조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것, 전보다 탁월한 것에 열광해요.
그런데 보다 새로운 ‘무언가’, 탁월한 ‘무언가’, 창조되길 기대하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이 새롭고 탁월해지기를 바라는 걸까요?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키치’를 창조합니다. 이때 키치란 ‘그래야만 한다.’ 인데요. 쉽게 말해 가치관, 입장, 관점, 철학, 사상,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 등을 뜻해요. 예를 들어 나이가 들면 ‘결혼은 해야지’, 결혼하면 ‘애는 낳아야지’, 애를 하나 낳으면 ‘애는 둘은 낳아야지.’ 하는 온갖 종류의 ‘그래야만 한다’가 바로 키치예요.
정리하자면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데, 더 나은 미래란 보다 새롭고 탁월한 키치가 창조된 상태를 말해요.
키치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키치(그래야만 한다)는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요.
하나는 외부에서 주어진 키치고, 다른 하나는 내부에서, 즉 스스로 만들어낸 키치예요.
우리는 수많은 외부의 키치에 둘러싸인 채 태어나요. 부모님, 선생님, 지역 사회, 국가의 키치 등이요.
동시에 우리는 창조 욕구를 갖고 태어나요. 그래서 우리는 보다 새롭고 탁월한 키치를 창조하는 순간에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끼곤 해요. 이를 자아실현의 욕구라고도 부르지요.
…
앞서 소개했듯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에 늘 새롭고 탁월한 키치를 원하는데요. 새롭고 탁월한 키치를 얻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외부에서 찾는 방법입니다. 남이 만들어놓은 키치 중 새롭고 탁월해 보이는 것을 찾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니체는 이런 사람을 ‘군중’이라 불렀어요. 군중은 유행하는 키치에 올라타고자 애쓰고, 그렇지 못하면 불안함을 느껴요.
다른 하나는 내부에서, 즉 직접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떠오르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처럼 ‘자기 파괴’와 ‘자기 창조’를 거듭하는 존재를 니체는 ‘초인’이라 불렀어요.
4. 군중과 초인, 너무 다른 두 인간
군중과 초인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 무척 다릅니다. 이는 자기 아이를 대하는 방식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요.
먼저 군중은 가르쳐요! 아이의 키치와 부모의 키치 중 누구의 키치가 생존에 유리할까요? 당연히 부모의 키치입니다. 당장 아이는 사회에서 자립할 수 없지만, 부모는 군중일지언정 오랜 시간 사회에서 생존해 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많은 부모는 자기 아이에게 자신의 키치를 가르쳐요. 다시 말해 아이가 직접 키치를 창조하는 초인이 아니라 부모의 키치를 수용하는 군중이 되라고 강요해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해. 엄마만 믿어.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면 다 잘 될 거야!”
군중은 자기 아이만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군중은 자기 키치에 확신을 가지면 가질수록 주변 모든 사람을 가르치고, 심하면 폭력을 쓰기도 해요.
그럼 초인은 어떨까요? 초인은 가르치지 않아요. 왜냐하면 초인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영원한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끊임없는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기에 초인의 키치는 늘 변해요. 따라서 초인은 완벽한 키치는 없다고 생각해요. 더욱이 사람마다 처지와 상황이 다 다르기에 초인은 더더욱 자신의 키치를 강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초인은 가르치지 않아요. 다만 누군가 물으면 답할 뿐이에요.
…
한 번 들어보세요.
“지금부터 제가 독자님을 가르칠 거예요. 똑바로 앉아서 집중하세요. 잘 배우세요!”
어떠신가요? 기분 나쁘지 않나요? 소름 끼치지 않나요? 왜 그럴까요?
군중은 가르쳐요! 가르친다는 건 상대방에게 “너는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키치에 비하면 모자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가르친다는 건 “너는 부족해! 너는 더 채워야 해! 너는 더 배워야 해!”라는 말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것과 같아요.
반면 초인은 그저 자기 삶을 살 뿐이에요. 초인은 가르치지 않아요. 초인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 또한 고유한 창조자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해요. 초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으면서 함께 살아가요.
5. 내 아이가 ‘일용직 노동자, 청소부, 자연인’이 되겠다고 하면 왜 거부감이 들까?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요. 어느 날 독자님의 자녀가 “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가 될래. 그게 좋겠어.”라고 한다면 어떨 거 같으세요? 또는 매일매일 비슷한 하루를 반복하는 청소부나 아예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이 된다고 한다면요? 선뜻 박수를 치며 기뻐하기 어려운 묘한 거부감이 들지 않나요? 왜 그럴까요?
잠깐 원형의 시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자연에는 원형의 시간이 흘러요. 때가 되면 일어나는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요. 자연은 순환 그 자체예요. 그래서 자연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온전해요.
그런데 사람 중에도 원형의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때에 맞는 일을 반복하는 자연인, 참된 의미의 종교인(예수, 부처 등), 그리고 도를 말하는 노자가 그래요. 원형의 시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세계이기에, 원형의 시간에 사는 사람들은 성장 압박을 느끼지 않아요. 그저 때에 맞게 흘러가듯 살아갈 뿐이에요. 만약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일용직 노동자, 청소부라면 그들 또한 원형의 시간 속에 살아간다고 할 수 있어요.
자녀가 자연인이 된다고 말할 때 거부감이 드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는데요. 우리는 아이가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요. 즉 ‘직선의 시간’에서 잘 살기를 바라요. 돈도 잘 벌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부귀영화를 누리길 바라죠. 그런데 아이가 자연인이 되겠다는 것은 ‘원형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건데요. 즉 아이가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자연의 삶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이에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건 인간으로서 죽음을 뜻하기에 거부감이 올라오는 거죠.
6. 아이가 알아서 크는 자녀 교육 방법은 무엇일까?
마지막 세 번째 질문입니다. 교사 생활을 10년 정도 하다 보니 인격적으로나 학업적으로나 훌륭한 아이를 만나곤 해요. 그 아이의 보호자에게 어떻게 키웠냐고 물으면 꼭 이렇게 답하시더라고요.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아이가 알아서 잘 컸지요.”
“아이가 알아서 잘 컸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누구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온갖 애를 쓰면서도 아이와 늘 갈등이 생기는데, 도대체 아이가 알아서 잘 크게 하려면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퀴즈를 드려볼게요.
두 남녀가 썸을 타다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연애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과 ‘직선의 시간’ 중 어느 쪽일까요?
서로를 조금씩 더 알아가고, 사랑이 깊어지기를 기대하는, 즉 둘 사이의 관계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연애의 시간’은 ‘직선의 시간’인 듯해요. 그래서 직선의 시간이 멈추면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죠.
둘째, ‘회사나 직장에서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과 ‘직선의 시간’ 중 어느 쪽일까요? 회사나 직장은 무한 성장, 무한 경쟁을 추구하기에 ‘직선의 시간’인 듯해요.
셋째, ‘부부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과 ‘직선의 시간’ 중 어느 쪽일까요? 부부 관계는 어느 순간 ‘더 나아지지’ 않는 듯해요. 그저 때가 되면 일어나고, 밥을 먹고, 산책하고, 청소하고, 잠을 자는 관계가 되지요.
그래서 저는 ‘부부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인 듯해요. 그리고 부부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 일 때 참 좋은 듯해요. 만약 ‘부부의 시간’이 ‘직선의 시간’이라면? 퇴근하고 왔는데 서로에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한다면? 우리는 가정에서도 성장 압박에 시달리느라 편히 쉬지 못할 거예요. 편안한 휴식은 성장 압박이 없는 원형의 시간에서 가능하니, ‘부부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인 게 참 좋은 듯해요.
마지막으로 ‘부모 자식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과 ‘직선의 시간’ 중 어느 쪽일까요? 모든 부모는 우리 아이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길 바랄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직접 살아보니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아요.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가 거친 세상을 잘 살아낼지 걱정스럽기도 할 거예요. 그런데 그 걱정과 두려움이 부모 자식의 시간을 ‘직선의 시간’으로 만들고는 해요.
부모 자식의 시간이 ‘직선의 시간’이 되면 부모 자식의 관계는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되기 쉬워요. 부모는 자신의 키치에 비추어 아이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려고 급급할 거예요. 사실 부모는 아이가 초인이 되기를 바라겠지만, 정작 아이는 타인의 키치를 수용하는 군중으로 크게 되어요.
반대로 부모 자식의 시간이 ‘원형이 시간’이 되면 어떨까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부족한 존재가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로 인정한다면? 아이가 자기 때에 맞게 최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부모가 믿는다면요? 그냥 때가 되면 일어나고 밥 먹고 산책하고 대화하고 쉬고 잠을 자는 하루하루를 반복한다면요?
‘아이가 알아서 잘 컸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이제 이 질문에 답을 해볼게요. 이 말을 한 부모와 아이의 시간은 ‘원형의 시간’이었던 거예요. 부모 자식의 시간이 ‘원형의 시간’이 되는데 부모가 꼭 초인일 필요는 없어요. 부모가 일용직 노동자여도 괜찮고, 청소부여도 괜찮고, 자연인이어도 괜찮아요. 오히려 특별한 키치가 없다는 점에서 유리한 점도 있겠죠.
부모가 아이와 원형의 시간 속에 살아갈 수 있다면, 아이가 자기 때에 맞게 늘 최선의 모습으로 내 앞에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면, 아이는 자기 파괴와 창조를 반복하며 스스로 성장할 거예요.
7. 참고 도서
오늘 저의 이야기는 세 권의 책을 참고하여 창조했어요.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형과 직선의 시간에 대한 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독자님의 삶에 원형의 시간과 직선의 시간이 조화를 이루길 바라며 글을 마칠게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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