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앰 댓'은 전세계에서 니사르가다타를 찾아 온 구도자들이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에게 질문을 하고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답을 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책(경전)입니다. 이것은 연설이나 앉아서 집필된 책이 아니고 실제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구도자들은 처음부터 몸과 마음에 대해서 자기 동일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동일시 상태가 아닌 진리의 상태에서 대답합니다.
그리고 읽다가 보면 구도자는 때로는 이해합니다. 즉,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말을 이해한 순간 동일시에서 벗어난 것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즉시 다시 동일시로 돌아가 버립니다. 아래 글에서 그런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구도자는 끊임 없이 자기의 육신과 마음에 들러 붙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읽다보면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존재하지도 않는 마음과 육신을 놓치기 싫어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발버둥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발버둥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비참함만 길게 이어질 뿐인 거죠.
아이 앰 댓 하권 11. 행복을 구하는 모든 노력은 비참함을 드러낼 뿐이다.
문: 저는 영국에서 왔는데 지금 마드레스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아버지를 만나면 차를 같이 타고 런던으로 갈 생각입니다. 심리학을 공부할 예정인데 학위를 받고 나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산업심리학이라든지 정신병리학 같은 걸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반내과 의사인데 저도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이 저의 관심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대답을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뵈러 왔습니다.
M: 내가 자네 질문에 답을 해줄 적합한 사람인지 모르겠군. 나는 사람과 사물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어. 난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고 나머지 아는 것은 자네도 아는 것이야. 우린 마찬가지야.
문: 물론 저도 "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M: 자네가 "내가 있음"속에서 "나"라고 여기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자신이 있음을 아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신이 무엇임을 아는 것은 많은 걸 조사하고 나서의 결과야. 의식의 전영역을 탐색해서 의식을 넘어가게 해. 그렇게 하려면 바른 선생을 만나서 발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지. 일반적으로 말해서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외적인 길이 있고 내적인 길이 있어. 진리를 아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그의 지도와 좋은 영향에 내맡기든가 그렇지 않으면 내면의 안내자를 찾아서 그것이 이끄는대로 내면의 빛을 따라가는 거야.
그 어느 경우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여러 욕망이나 두려움은 무시되어야만 해. 그러니까 스승과 함께 함을 통해서든가 그렇지 않으면 탐구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거지. 수동적인 길과 능동적인 길 둘이 있는 거야. 스승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과 사랑의 강을 따라서 실려가도록 내버려두든가 그렇지 않으면 내면의 빛에 인도를 받아서 스스로 노력을 하든가 일세. 그 어느 경우에도 계속 전진해야 하고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만 해.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아주 적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지성과 이성, 분별과 무집착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이야.
문: 저는 비록 내일 떠나게 되어 있지만 이렇게 선생님을 한번 뵙는 것이 저의 전생애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오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M: 바로 그래, 일단 한번이라도 "나는 진리를 발견하기를 원한다"라고 말을 하고 나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로 인해서 깊은 변화를 겪게 되어 있어.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습관, 느낌, 감정, 욕망, 두려움, 계획, 결정 등등이 철저한 변형을 겪게 되는 것이야.
문: 일단 제가 진리를 발견하고자 결심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M: 그건 자네 기질에 달렸어. 만약 자네가 진지하다면 어떤 길을 택하든 간에 목표에 이르게 될 거야. 결정적인 문제는 얼마나 진지하냐 하는 것이야.
문: 그러면 진지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M: 그것은 마치 새들이 둥지로 돌아가고 물고기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귀소본능이야. 열매가 익고 나면 씨는 땅으로 돌아가듯이 말이야.
문: 그러면 저를 성숙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까?
M: 이미 자네는 필요한 만큼의 경험은 한 거야.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걸세. 지금은 더 이상 주워 모으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을 넘어가야 해. 노력과 방법은 계속해서 더 많은 경험을 낳을 뿐이지 그 너머로 데려다 주지는 못해. 또 책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아. 책을 읽는 것은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긴 하지만 자네 자신의 인간적인 면은 여전히 남아 있게 돼. 만약 물질적이나 정신적인 추구를 통해서 뭔가 영구적인 혜택을 기대한다면 그건 이미 초점에서 벗어난 거야. 진리를 깨닫는 것은 뭔가의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더 높은 지위를 주는 것도 아니며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을 주는 것도 아니야. 얻게 되는 모든 것은 거짓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게 되는 거야.
문: 하지만 진리는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습니까?
M: 아무리 고귀해 보이더라도 그건 상상에 불과해. 진리 속에서는 타인이라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타인을 도울 수가 없어. 자넨 지금 사람을 고귀하고 고귀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서 더 고귀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분리하게 되고, 평가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고, 비난하게 되면서 진리의 이름 속에서 파괴작용을 하고 있을 뿐이야. 진리를 공식화하려는 욕망 자체가, 진리는 말 속에 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야. 진리는 오직 행위 속에서 거짓을 부정함으로써만 표현될 수 있어. 이렇게 하려면 거짓을 거짓으로 보면서 그것을 거부해야 해. 거짓을 부정하는 것이 해방이고 에너지의 생산이 된다네. 그렇게 함으로써 완성으로의 길이 열리는 것이야.
문: 제가 진리를 깨달은 것을 언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M: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라는 생각이 생겨나지 않을 때에 알 수 있지. 진리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을 거짓으로 보고 거짓을 거부하는 그 속에 있는 거야. 마음이 거짓을 보지 못하면 진리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어. 진리가 드러나려면 완전히 청소되어야만 하는 것이야.
문: 그러면 거짓은 무엇입니까?
M: 사실상 없는 것이 거짓이지.
문: 사실상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철사줄처럼 딱딱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M: 그 자체로 모순된 것이 없다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말이 되겠지.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중심이 없기 때문이야. 속이 텅 비어서 그건 단지 마음에 의해 주어진 이름과 형태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고 실질도 본질도 지니고 있지 않아.
문: 지나가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주 역시 없다고 해야겠군요.
M: 누가 아니랬나? 우주라는 것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문: 그럼 도대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M: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뭔가에 의지하지 않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우주가 솟아나면서 함께 솟아나고 우주가 없어지면 함께 없어지듯이 어떤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과 만나는 모든 것에 현실성을 부여해주는 것만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야. 그러므로 진리는 거짓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도 있어. 거짓은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되어 있으며 환경에 의해 생산되는 거야.
문: 그럼 제가 허위를 없애고 진실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M: 뭘 위해서 말인가?
문: 좀 더 낫고 만족스럽고 원만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M: 마음에 의해서 꾸며진 것은 모두가 거짓이야.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반드시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참된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어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될 수도 없는 것이야.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요구될 뿐이지.
문: 제가 어떻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바랄 수 있습니까?
M: 그 밖에 원할만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또 만약 있다고 해도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사물을 바라듯이 그렇게 바랄 수는 없는 것이야. 그러나 진실로 길을 열어주는 것은 거짓을 버림으로써 가능한 거야.
문: 이해는 하겠습니다만 그럼 그것이 실제 생활 속에서는 어떻게 보입니까?
M: 자기 이익과 자기 관심이 바로 허위의 초점일세. 자네의 일상생활은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네. 그걸 꾸준히 관찰해 보면 마음이 마치 하나의 강물이 돌들 사이에서 거품을 일으키듯이 무수한 이름과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될 거야.
문: 사람이 살려면 자기 자신을 돌보고 돈도 벌어야 하지 않습니까?
M: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네가 돈을 벌 필요는 없어. 하지만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라면 필요할 수도 있겠지. 타인들을 위해서 계속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어. 심지어는 계속 살아 있는 것만도 희생이 될 수가 있어. 그러니 이기적일 필요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이야. 눈에 띄는대로 자기를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동기를 던져 버리면 진리는 구할 필요도 없어. 진리가 자네를 발견할 걸세.
문: 하지만 최소한의 필요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M: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런 건 주어지지 않던가? 무엇이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굴레를 버리고 행동 속에 지성과 사랑이라는 자네의 본질이 머무르도록 하게.
문: 하지만 사람은 생존해야 합니다.
M: 살아남는 거야 하지 않을래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참된 자네 자신의 본성은 시간도 없고 출생과 사망을 넘어서 있어. 만약 육신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의 육신은 살아 있게 되어 있어. 오래 산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충분한 인생이 긴 인생보다 더 좋은 거라네.
문: 충분한 인생이 무엇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저의 문화적인 배경에 달린 것입니다.
M: 만약 자네가 진리를 구한다면 배경이라든지 문화 혹은 생각과 느낌의 패턴으로부터 스스로를 풀어놓지 않으면 안된다네. 심지어는 남자다 여자다 또는 더 나아가서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버려지지 않으면 안 돼. 생명의 바다는 모든 걸 담고 있는 것이지 인간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그렇고 그렇다든지 이렇고 이런 존재라든지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지 말고 모든 자기 동일시를 버리도록 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의 물질적 영적인 복지를 근심하지 말고 거친 모든 욕망을 버리도록 하게나. 그리고 어떤 종류든간에 성취할 생각은 그만 두도록 해. 왜냐하면 자넨 이미 지금 여기에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상태이니까 말일세.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하고 경박하게 생각 없이 멍청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근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일세. 약간의 음식과 옷과 집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탐욕이 필요로 간주되지만 않으면 이런 것들은 괜찮아. 모든 일들이 있는 그대로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야지 상상된 것들과 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네.
문: 제가 인간이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M: 자네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아니야. 그건 단지 차원 없는 의식의 점일 뿐이야. 의식이 있는 무(無)라고 할까? 자신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뿐이야. 자네는 순수한 존재이며 자각이며 축복일세. 그것을 깨닫는 것이 구도의 목적이야.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모든 것이 상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고, 일시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상상의 일은 상상의 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거리감을 가지고 떨어져 있을 때에 진리에 이르게 된다네. 이건 어렵지 않지만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필요해.
진실을 보는 것이 그처럼 어려운 것은 거짓에 집착하기 때문이야. 일단 거짓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진실에 좀 더 접근하게 되는데, 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현재 속에 있는 것으로서 시간과는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이야. 시간 속에서의 영원이라는 것은 시계의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반복에 불과한거야. 그것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공허한 영속에 불과해. 진실은 언제나 현실을 아주 생생하게 하고 과거와 미래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으로 만든다네. 과거나 미래는 단순히 머릿속의 일일 뿐이지.
만약 뭔가를 이루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건 틀림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자네와 함께 있어. 실제의 자기 모습이 되는 데는 기다릴 필요가 없어. 마음이 뭔가를 찾아서 밖으로 나서지 않도록 하는 일만이 필요할 뿐이야. 만약 뭔가가 필요하거든 이렇게 물어보게나. 나는 정말로 이것이 필요한가? 라고 물어보아서 만약 대답이 노우(no)이거든, 그러면 포기하게나.
문: 사람은 행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물건이 필요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있다면 그걸 움켜잡아야 될 것이 아닌가요?
M: 자네 자신의 본질보다도 더 행복을 줄 수 있는 건 없다네.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비참함일 뿐이고 더 많은 비참함을 낳을 뿐일세. 가치가 있는 유일한 행복은 의식적인 존재의 자연적인 행복뿐이야.
문: 제가 그런 식의 높은 수준의 자각을 얻기 전에 많은 경험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까?
M: 경험이라는 것은 단지 기억을 남길 뿐이고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더해 줄 뿐이야. 더 이상의 경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이미 지난 경험만으로 충분해. 그리고 만약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자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보게나. 수천 년 동안에도 다 겪어내지 못할 무수한 경험을 발견할 걸세. 타인들의 고통으로부터 배워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보게나. 필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 모든 경험으로부터의 자유일세. 경험을 탐하지 말라구. 더 이상 필요 없어.
문: 선생님 자신도 지금 경험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M: 내 주위에서 일이 발생하고 있긴 하지만 난 그 속에 참가하지 않아. 내가 감정적으로 개입될 때만 어떤 일이 하나의 경험이 된다네. 또 난 이미 완전한 상태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위에 다시 개선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나한테 경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문: 그래도 지식이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합니다.
M: 일을 다루기 위해서는 일들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고 사람들을 다루려면 통찰력과 연민이 필요해. 그러나 자기 자신을 다루는 데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의식을 지닌 존재라고 하는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하게.
문: 대학 교육은 무엇보다도 쓸모가 있습니다.
M: 물론 그렇게 하면 돈 버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 그러나 대학교육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아. 자넨 지금 심리학을 배우는 학생인데 그것이 여러 상황에서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심리학에 의해서 살 수 있나? 인생이라는 것은 행동 속에서 진리를 반영할 때만 이름값을 할 수 있어. 대학이라는 것은 어떻게 사는지를 결코 가르쳐 주지 않을 거야. 죽을 날이 왔을 때에 나는 잘 살았다. 나는 더 이상, 또 다시 살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대학이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들 대부분은 다시 살아봤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죽는다네. 너무나도 많은 실수가 저질러졌고 너무나도 많은 일이 해 보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어서 그렇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려지고 있지만 살고 있지는 못한 거야. 사람들은 그냥 경험을 모아서 기억을 늘리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진리라는 건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의 일부도 아니고 마음의 일도 아니야. 진리는 몸과 마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그 둘을 모두 넘어서 있다네.
문: 하지만 경험은 아주 유용합니다. 경험을 통해 불길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까?
M: 이미 내가 자네에게 사물들을 다루는 데에는 지식이 아주 유용하다고 말을 했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식이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아. 우리는 지금 차를 운전한다거나 돈을 버는 데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운전이나 돈 벌이를 위해서라면 경험이 필요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빛이 되기 위해서라면 물질적인 지식은 도움이 되지 않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라면 생각에 의한 지식보다도 더 깊고 친밀한 무언가가 필요해.
사실이지 외부적인 삶은 중요하지 않아. 밤의 야경꾼이 되어서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야. 내면에 평화와 환희를 얻어야만 해. 그런 게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거야. 대학교가 자기 자신이 뭔지를 가르쳐 줄 수는 없어. 배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실천을 하는 거야. 지금 즉시 자네 자신으로 머무르게나.
자네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버리고 계속 더 깊이 내려가도록 하게나. 샘을 파는 사람이 물이 솟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물이 아닌 것을 계속 버려 나가듯이 자네도 더 이상 버릴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버려나가야만 해. 그러려면 남는 것은, 마음이 거기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게 될 걸세.
자네는 심지어는 인간조차도 아니라네. 자넨 그냥 동시에 시간과 공간이면서 그 둘 모두를 넘어선 하나의 자각의 점으로서 존재할 뿐이야. 그러니 아무런 원인도 없는 궁극의 원인일 뿐이지. 만약 자네가 나에게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이렇게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특별한 그 무엇도 아니지만 난 그냥 존재하고 있다네"라고 말할 거야.
문: 만약 선생님께서 특별한 그 무엇도 아니시라면 보편적이어야만 합니다.
M: 보편적이라는 게 무엇인가? 하나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한 양태로서 보편이라는 건 분리시키지도 않고 대립하지도 않으면서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보편적으로 사는 거야. 진정으로 "내가 세계이고 세계가 나이다, 나는 세계 속에 편안하고 세계는 나 자신의 것이다. 모든 존재가 나의 존재이고 모든 의식이 나의 의식이며 모든 슬픔이 나의 슬픔이고 모든 기쁨이 나의 기쁨이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보편적인 삶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진정한 존재와 자네의 진정한 존재 모두가 다 우주를 넘어서 있고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고 보편적이라고 하는 범주들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네. 그것은 완전히 스스로 구족되어 있고 독립적인 것으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어.
문: 저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M: 자네가 이런 일들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 머릿속에 배어 있는 오래된 습관들이 새로운 것들을 만들지 않고서 지워져야만 한다네. 움직이지도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의 뒤편에,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발생하는 모든 것들의 조용한 관조자인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지.
문: 그러시면 활발한 인생이라고 하는 모든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M: 전혀 그렇지 않아.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아이도 있을 수 있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돈도 벌 수 있지만, 이런 일들은 운명이 스스로를 완수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사건의 흐름으로 발생하는 것이야. 큰일이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다가오는 여러 가지 과업들을 주의력을 가지고 저항하지 않으며 겪어나가게 되겠지. 그러나 일반적인 태도는 애정있는 무집착과 거대한 호의, 보상을 바라지 않는 계속적으로 주기만 하는 태도가 될 거야. 결혼을 하더라도 남편도 아내도 아닌 그 둘 사이의 사랑일 뿐이야.
자네는 모든 일을 단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명료함이며 친절함일세. 이런 말들이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모호해 보이는 것이 삶을 창조적이고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주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리되면 의식이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어서 거기서는 모든 일들을 보다 더 명료하고 더 큰 집중력을 가지고 볼 수 있을 거야. 그리하면 태어나서 시작되었고 죽을 때에 없어진다는 그 인간이라는 것이 일시적이고 허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는 욕망이나 두려움에 잡히는 존재가 아니라네. 자네는 감각적인 인간도 아니고 감정적인 인간도 지성적인 인간도 아니라네. 자네의 참된 존재를 발견해 보라구. 나는 무엇인가? 라는 모든 철학과 심리학의 근본 질문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게나.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