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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자규루(子規樓)
단종이 매죽루에 올라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사’와 ‘자규시’를 읆은 뒤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자규는 두견이 또는 접동새를 말하며 예로부터 울음소리가 구슬퍼 한이 많은 새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단종이 자신의 처지를 자규에 빗대어 읊은 것이다.
자규사(子規詞)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누대 머리에 기대앉았더라
네 울음소리 하도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잊으련만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영월 객사 관풍헌(觀風軒)
보물 제1536호 월중도 제3면 관풍헌- 단종이 죽었다는 관풍헌
선조 때 좌찬성을 지낸 윤근수(1537~1616)가 쓴 <송와잡설>은 "단종은 승하한 뒤 시체 마저 잃어버렸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단종의 능(장릉)이 조성돼 있지만 시체가 없는 가짜 무덤"이라고 밝힌다.
<송와잡설>에 따르면, 순흥단종복위사건 발생 10일 남짓되는 1457년 10월 21일 금부도사가 단종을 처형하기 위해 유배지인 영월로 급파됐다. 단종은 아침에 대청으로 나와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걸터 앉아 있었고 주윗 사람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 했다.
금부도사는 단종을 바로 처형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긴 끈을 단종의 목에 묶고 창문을 통해 잡아 당겨 목 졸라 죽였다. 단종이 숨지자 염습도 하지 않은 채 관도 없이 그냥 시신을 짚으로 덮어놓고 방치했다.
그러던 중 밤에 젊은 승려가 와서 시체를 지고 도망 가 버린다. <송와잡설>은
"어떤 이는 중이 산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하였으며 김종직은 후자가 그럴 듯하다고 했다"고 소개하면서 "세조의 일당들이 저지른 일로 단종의 혼은 지금도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 다닐 것이니 실로 애달프다"고 적었다.
반면 승자의 역사인 세조실록은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메어 졸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 어진화사인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세조어진 초본.
세조는 자신의 공신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했다.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충신들의 아내와 딸 170여명을 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육신 사건으로 12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능지처참 등 처형되거나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남자들은 모두 죽였다. 사육신 중 한명인 하위지(1412~1456)의 가족은 고향 구미에 있었다.
<송와잡설>에 따르면, 조정에서 금부도사가 내려오자 큰아들 하호는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째 아들 하박이 20세도 안 된 나이였지만 두려워하는 빛이 전혀없이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하니 기다려 달라" 말하고
모친 앞에 꿇어앉아 "아버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자식으로서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죽어 마땅합니다. 누이동생이 천한 종이 살더라도 개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와 형과 함께 형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칭송했다.
사육신 사건 연루자들의 아내와 딸들도 연좌시켜 세조의 공신들에게 배분했다. 박팽년의 아내는 영의정 정인지, 성삼문의 아내·딸은 운성부원군 박종우, 하위지의 아내·딸은 지병조사 권언, 유성원의 아내·딸은 좌승지 한명회, 유응부의 아내는 예빈시윤 권반, 이개의 아내는 우참찬 강맹경에게 각각 줬다.
세조의 남자들이 차지한 충신의 여인들은 몇명쯤 될까. 세조 2년 9월 7일자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그숫자는 173명이나 된다. 여기에는 성삼고(성삼문의 동생)의 한 살된 딸도 포함돼 있다.
단종이 역모 죄를 쓰고 죽었으니 그 부인인 정순왕후 송 씨(1440~1521)도 천민의 신분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친구와 주군을 배신하고 세조 편에 섰던 신숙주가 뻔뻔하게도 세조에게 정순왕후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전한다.
선조 때 판의금부사를 지낸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은
"노산왕의 비 송 씨는 적몰돼 관비가 되었다. 이에 신숙주가 송 씨를 공신의 여자종으로 받아내려고 왕에게 청했다. 광묘(세조)가 그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서 얼마 만에 궁중에서 정미수(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 즉 문종의 외손자)를 양육하게 했다."
중종 18년 그녀는 8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는 죽어서도 남편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단종의 묘가 있는 강원도 영월이 아닌 경기도 남양주(사릉)에 묻혔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1436~1473)는 어떻게 됐을까. 남편 정종(영양위)은 사육신 사건 관련해 전라도 광주에 유배 됐으며 그곳에서 세조 7년(1461) 승려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정종이 죽기 전까지 경혜공주는 남편의 유배지에서 함께 살았다.
정종이 처형되자 경혜공주 역시 적몰돼 순천의 관비가 됐다고 <월정만필>은 전한다. <월정만필>에 의하면, 무인이었던 순천부사 여자신은 그녀를 기어코 관노로 부리려고 했다. 그러자 공주가 곧장 대청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뒤 "나는 왕의 딸이다. 어찌 수령 따위가 감히 나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는가" 라며 꾸짖으니 일을 시키지 못했다.
남편이 죽었을 때 경혜공주는 아들 정미수(1456∼1512)를 임신하고 있었다. 과연 공주와 단종의 유복자는 관노의 삶을 살았을까. 일단 실록은 정종이 죽은 후 경혜공주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고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고만 기술한다.
그러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개한 해주 정 씨 대종가 분재기(경혜공주의 재산 상속 기록)를 보면 경혜공주가 생전에 공주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녀가 죽기 사흘 전인 성종 5년(1474) 음력 12월 27일에 쓰여진 분재기에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남편의 처형과 함께 공주가 천민이 되기는 했지만 세조의 배려로 곧 풀려나 과거의 신분을 회복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소재 단종의 무덤인 장릉.
단종은 살해 당한뒤 시신마저 잃어버려 장릉은 빈무덤이다. 단종비 정순왕후는 남양주에 묻혀 부부는 죽어서도 만나지 못했다. 사진 문화재청.
<월정만필>은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김시습(1435~1493) 행적도 자세히 다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세종대왕이 따로 불러 선물을 줄 정도로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자 삭발하고 중이 돼 세상을 떠돌았다.
그는 성격이 괴팍해 세조의 편에 섰던 명사들을 모욕하고 다녔다. 조선의 대문호 서거정(1420~1488)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거정은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을 오른뒤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명의 왕 아래에서 요직을 두루 지냈다.
<월정만필>은 "동봉(김시습)이 성안에 들어오면 번번이 향교동(종로구 교동)에 묵었다. 서거정이 찾아가면 벌렁 드러누워서 발장난을 하면서 이야기했다. 이웃의 하인들이 모두 이르기를 '김 아무가 서 정승을 예우하지 않고 이처럼 모욕을 주었으니 다음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 만에 서 정승은 다시 찾아왔다"고 썼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22.사육신 사건때 세조파가 가진 충신 부인·딸은 170명 [간신·충신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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