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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Ricard Wagner (1813-1883)
1813년 지금 독일 라이프치히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문학과 신화에 관심이 많고 괴팍할 정도로 매사에 열성적이다 베버와 베토벤에게서 음악적 영향을 받으며 작곡과 음악감독 활동을 꾸준히 한다
23세에 여배우 미나와 결혼한다 일년만에 그녀는 다른 남자와 도망갔다 다시 돌아온다
오페라 작곡 등 열심히 활동하나 극단 운영에 실패하여 런던을 거쳐 파리로 피신 생활을 한다 이때 파리에서는 리스트가 한창 인기를 날리고 있을 때이다
27세에 오페라 '리엔치'를 성공적으로 발표한 후 연이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등을 발표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은 그가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잉글랜드로 도주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잠시 대피한 노르웨이의 작은 항구의 풍경에서 받은 영감을 북유럽 지역의 오래된 전설을 바탕하여 만든 작품이다 '탄호이저'는 독일 시인 탄호이저의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다 이번에는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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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당시 세계사를 살펴보면
프랑스 왕국에서는 18년전 7월 혁명에 이어 1848년 2월 또다시 입헌군주인 루이 필리프1세 왕을 물러나게 하고 나폴레옹1세의 조카로 알려진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3세 왕)이 왕으로 선출되면서 제2공화정으로 넘어간다 2월혁명이다
프랑스의 2월혁명은 빈 체제 Vienna system (=나폴레옹1세 황제의 몰락 이후 프랑스 왕국을 억압하려는 주변 국가들의 공동협정) 에 대한 반대 여론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도 왕정 체제를 반대하게 하는 움직임를 자극한다
베를린과 빈에서도 왕정을 반대하는 소요가 일어난다 독일의 3월혁명이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의 빌헬름4세 왕은 왕정 반대 요구를 거부한다
이때 빌헬름4세 왕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드레스덴에서도 높아지고 바그너도 열정적으로 가담한다 이 반대운동이 실패하면서 그는 12년동안 파리 취리히 등으로 도망 다니면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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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그너의 음악이야기로 돌아 가자
고달픈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로엔그린'을 완성하여 친구 리스트에게 부탁하여 대신 발표하게 한다
음악이 모든 예술행위의 가장 위에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과 마틸데 베젠동크의 후원에 힘입어 '크리스탄과 이졸데'의 영감을 찾는다 15년 연하 유부녀인 마틸데에게 사랑의 신호를 계속 보내나 거절 당한다
1864년 그 유명한 루트비히2세가 바이에른 왕으로 즉위한다 루트비히2세는 낮에는 숨어있다 밤에만 움직이는 은둔생활을 하는 기인이다
음악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에 심취하고 노인슈반슈타인 성 (=디즈니랜드의 심볼) 등 3개의 성을 지으며 돈을 낭비하다 결국 정신질환으로 강제 폐위된 비극의 왕이다
51세의 바그너에게 일생의 큰 기회가 찾아온다 루트비히2세가 즉위하자마자 그의 빚을 해결해주면서 뮌헨으로 초청한다
다음해 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성공적으로 발표하고 또하나 대형 연애사고를 친다 코지마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절친한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 났으며 바그너의 제자이자 열렬한 후원자인 한스 폰 뵐로 남작의 아내이다 그러니까 친구의 딸이자 제자의 아내인 24세 연하 유부녀이다
코지마와의 불륜 사건으로 뮌헨에서 쫓겨나고 다시 루트비히2세의 도움으로 스위스로 이주한다
5년후 코지마가 이혼에 성공하자 그들은 결혼한다 이때 바그너는 57세 코지마는 33세이다
그해 아내 코지마의 생일날 아침 아직 자고 있는 아내와 아들 지그프리드의 침실 아래에서 미리 불러온 악단에게 연주를 시킨다 세기의 이벤트이다 이 곡이 '지그프리드 목가'이다
그녀는 이졸데 에바 지그프리트 세자녀를 가지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젊은 시절 니체는 바그너를 만나면서 한때 존경한다 그러나 그를 좀 더 알게되면서 오히려 혐오하며 돌아선다
63세에 바그너는 자신이 구상하는 극음악을 제대로 공연하기 위하여 바이에른 외곽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Bayreuther Festspielhaus 이라는 대형 연주회 전용극장을 설계하여 짓는다
이 극장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고 악단석이 별도로 마련되어 낮게 위치한다 요즘 흔히 보는 연주회장 구조의 시초이다 여기서 북유럽의 전설과 중세독일의 영웅 지그프리트 서사시를 모티브로 한 16시간짜리 대작 '니벨룽의 반지' 완성작을 발표한다 지금도 매년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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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의 독일 역사를 살펴보자
스페인 왕위를 둘러싸고 프랑스 왕국의 나폴레옹 3세 왕과 프로이센 왕국의 빌헬름1세 왕이 서로 견제하며 갈등을 키우다가 프랑스 왕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면서 공격한다
그러나 자신만만한 35만 군사력이 현대식 전쟁준비를 착실히 한 11만 병사에게 형편없이 패배한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보불전쟁 1870-1871) 이다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 왕국은 하필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통일독일제국을 선언하고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뒤를 받치는 빌헬름1세가 황제로 추대한다
한편 파리까지 함락 당한 프랑스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지면서 알퐁스 도데는 '마지막 수업'을 쓰고 쿠베르텡은 허약한 프랑스 청년들을 한탄하며 올림픽을 구상한다 파리 시민들의 오기로 금모으기 운동까지 하여 2년만에 전쟁배상금을 모두 지불해버려 비스마르크를 놀라게 한다
이후 독일은 기계공업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고 농업국가인 프랑스는 경제공황에 빠진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린 프랑스와 독일은 50년 후 1차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무자비한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에게 복수하고 또 20년 후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는 일부러 같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또다시 프랑스의 항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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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럽 음악계의 흐름은 극단적인 사랑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낭만주의가 저물어 가고 국가주의 전체주의 음악이 용솟음친다
염세적이고 탐미적인 음악으로 후기인상파를 완성하고 노래중심의 오페라에서 연주음악 중심의 오페라로 발전시킨 극음악 Musikdrama 의 창시자이다
유럽 사회의 많은 예술 분야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문학의 TS 엘리옷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보들레르 미술의 칸딘스키 달리 그리고
음악의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등등이 대표적이다
'반지의 제왕' 저자 톨킨도 '니벨룽의 반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다
이렇게 바그너의 추종자 Wagnerian 들이 있는 반면 차이코프스키 드뷔시 니체 같은 반대파 역시 많다 브람스 파와의 대립과 갈등은 음악계의 유명한 사건이다 브람스편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눈부신 움악적 공로와 함께 온갖 화제를 끌고 다니던 풍운아 바그너는 71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서 별세한다 188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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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평상시에 독일의 민족주의와 반유태인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그의 사망후에도 후배들이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과 연관되어 그의 음악은 히틀러에게 정치적으로 자주 이용 당한다 히틀러 스스로도 자기는 바그너 음악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그의 음악이 사실상 연주 금지되다시피 한다 요즘은 가끔 연주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오페라곡이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
리엔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이 있다
아마 현대 음악사에게 바그너 만큼 공로와 논란이 많은 인물은 드물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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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가 독일에서 태어난 바로 같은 해 이탈리아에서 멋쟁이 오페라 작곡가가 태어난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