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합니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미국은 급히 UN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하고 북한의 공격을 침략행위로 규정하였으며 주일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을 격퇴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6월 29일 맥아더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선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수원비행장으로 출발합니다.
이러한 맥아더의 행동은 이번 전쟁에서 미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상징성을 나타내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맥아더는 서울의 한강변까지 진출하여 전선을 시찰한 후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립니다.
- 미군의 공군과 해군이 한국군을 지원하겠지만 이러한 조치만으로는 북한군을 막아내기 어렵다 - 따라서 미 육군 2개 사단이 투입되고 이와 병행하여 사단 규모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이렇게 맥아더는 첫 전선시찰에서 이미 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2차대전에서 50여회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그 효과를 확신하고 있었고 이번에서도 대규모 상륙작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맥아더는 북한군의 전력을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군이 10개의 사단, 18만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소련제 전차와 각종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1950년 당시 미군은 2차대전 이후 대규모 군축을 단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극동미육군의 규모를 살펴보면 일본에 1기병사단, 7사단, 24사단, 25사단이 주둔하고 있었고 병력은 10만 8천명 정도였는데 이들은 원래의 편제에 훨씬 못미치는 병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훈련상태도 매우 저조한 수준이었습니다.
극동미공군은 12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 절반 정도는 최신 기종인 F-80 슈팅스타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역시 훈련 수준이 높지 않았습니다.
그밖에 극동미해군은 순양함 1척, 구축함 4척 뿐이었고 미7함대는 그나마 항공모함 1척, 순양함 1척, 구축함 8척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필리핀과 오키나와 해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참모들에게 자신의 작전구상을 구체화하도록 했으며 이에 따라 주일미군의 24사단과 25사단이 반격작전을 개시하고 이와 병행하여 미 해병대 1개 연대와 미1기병사단이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BLUEHEARTS(블루하트) 작전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 채 곧 폐기되었습니다.
최초로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24사단이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전선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밀리고 있었고 이에 따라 상륙작전에 투입하기로 했던 미1기병사단을 낙동강 방어전선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주일미군에는 미육군 7사단만이 남아있었지만 이들은 제대로 된 편제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고 7사단 마저 한국에 투입된다면 점령지인 일본은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맥아더는 서둘러 본국에 추가 병력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미 합참본부는 긴급하게 제1임시해병여단을 편성했으며 이 부대는 제5해병연대와 제1해병항공사단의 일부 부대로 이루어진 긴급편성부대였습니다.
6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1임시해병여단은 1950년 7월 11일 센디에고에서 부산으로 서둘러 출항합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임시로 편성된 부대보다 제대로 전력을 갖춘 제1해병사단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맥아더의 요청을 받은 미 합참본부는 입장이 매우 난처했습니다. 완편된 해병사단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대서양에 배치된 해병대 까지 동원해야 했고 이마저도 부족해 이미 전역한 예비역들까지 재입대 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해병사단은 1950년 11월이 되서야 출동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러한 전문을 받은 맥아더는 이를 강력히 거부했으며 해병사단은 반드시 9월 10일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맥아더가 이렇게 시일을 못박은 까닭은 바로 그가 구상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때문이었습니다.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상륙작전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구상에 돌입하게 되는데 상륙지역으로는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이 거론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밀한 조사 끝에 작전계획 CHROMITE(크로마이트)를 수립하게 됩니다.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총 4개의 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명칭은 100-A, 100-B, 100-C, 100-D 였습니다.
100-A는 미10군단이 군산에 상륙해 대전지역의 적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 전선의 미8군이 반격을 실시해 두 부대가 대전에서 만난다는 계획으로 이를 통해 금강 이남의 북한군을 격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00-B는 미10군단이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탈환하고 미8군이 경부축을 따라 올라와 서울에서 연결하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입니다.
100-C와 100-D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보완계획입니다. 100-C는 주병력인 10군단이 인천에 상륙하고 미8군이 반격을 실시하는데 만일 반격작전이 여의치 않아 김천지역에서 고착된다면 1개의 사단을 군산에 상륙시켜 보급선을 차단하고 적의 후방을 공격한다는 계획입니다.
100-D는 주병력인 10군단이 인천에 상륙하고 미8군이 반격작전을 개시하는 사이 2개의 사단을 주문진에 상륙시켜 3개의 방향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때 주문진에 상륙하는 부대는 한국군 사단을 활용한다는 계획입니다.
1950년 8월 12일 극동미군사령부는 상륙작전계획 100-B를 하달합니다.
이렇게 작전계획이 수립되자 육군과 해군 그리고 해병대의 장교들이 회의를 실시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해군과 해병대가 이 계획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 작전의 실제 수행자는 해군과 해병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생각할 때 인천으로의 상륙은 장애요인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인천의 장애요인은 크게 좁은 수로, 적 해안포의 사격, 큰 조수간만의 차 그리고 높은 해벽을 들 수 있습니다.
인천 앞바다에는 수많은 섬과 암초들이 산재해 있어 서해에서 인천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덕적도와 영흥도 사이의 좁고 굴곡이 심한 2개의 수로가 거의 유일하며 팔미도에서는 이마저도 하나의 수로로 합쳐져 15km의 유일한 수로가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조류가 심한 이곳에서 만일 함선이 좌초되거나 침몰당하기라도 한다면 앞뒤의 함정들은 기동을 할 수 없어 고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렇게 좁은 수로에 적이 기뢰를 부설한다면 이곳은 죽음의 수로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월미도에는 적의 해안포 진지들이 요새화 되어 있어 이를 제압하기 위해 아군이 포격을 한다면 작전 계획이 사전에 노출될 것이고 상륙을 실시하는 와중에 적의 사격이 시작된다면 상륙군은 큰 혼란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인천의 큰 조수간만 차도 장애요인이었는데 이곳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으로 정확한 밀물시간에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들이 수백미터의 갯벌을 엄폐물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상륙군이 가까스로 해안에 도착한다 하여도 인천은 모래사장이 드물고 돌로 쌓은 방파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배와 방파제 사이에 사다리를 설치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이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인천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날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이 유일하며 정확한 날짜에 상륙한다 하더라도 만조 시간은 06시 59분, 19시 19분 이렇게 하루에 두시점 뿐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서둘러 본국에 지원부대를 요청한 이유도 9월 15일을 놓치게 되면 작전을 한달 후로 미룰 수 밖에 없으며 이때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작전회의에 참석했던 제1상륙전대 캡스 소령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 우리는 상륙작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장애물의 목록을 작성했다 그런데 인천은 목록에 기록된 모든 장애물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1950년 8월 23일 일본에 위치한 맥아더의 집무실에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최종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미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장군과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은 현재의 상황에서 낙동강 전선에 있는 해병 여단을 빼내는 것은 위험이 따르고 인천의 10군단과 낙동강 전선의 미8군이 연결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상륙작전은 군산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잠시 후 45분간의 긴 연설을 시작합니다.
- 현재 적은 낙동강 전선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후방에는 제대로 된 예비전력을 두지 않고 있다 - 그리고 그들의 길어진 병참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로와 철도망에 의지하고 있다 - 우리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한다면 적은 병참선을 잃고 혼란에 빠질 것이며 이러한 전략적 이유 말고도 서울 탈환은 그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압박을 줄 것이다 - 군산 상륙은 적의 병참선을 완전히 차단할 수도 없고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줄 수도 없다 - 상륙작전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무기다 - 미 8군의 반격은 대장장이의 쇠망치가 될 것이고 인천 상륙은 이를 받쳐 줄 모루가 된다 - 미 해군은 지금까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 우리는 인천에 상륙해야만 한다
맥아더 장군의 연설이 끝나자 회의장에는 더 이상 반대의 목소리가 없었습니다.
1950년 8월 28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최종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이렇게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됩니다.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