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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기적강해 71. 열명의 문둥병자. 눅17:11-19
예수님의 발걸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 가시다가 한 촌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10명의 문둥이 환자들이 멀리 서서 소리높여 이르기를 "예수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며 호소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저희가 이 소리를 듣고 가는 도중에 열사람이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중에 한 문둥병자는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로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서 사례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오늘 10명의 문둥이를 고친 기적을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이 병자들의 공통점
첫째, 문둥병이라고 하는 공동의 비극을 당한자들입니다.
이 열문둥이 중의 아홉 문둥이는 유대인이고 한 사람은 이방인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자들이 섞여 있었던 것을 보면 저들 세계에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국경이 없이 왕래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둥병이라고 하는 공동 불행은 있지만 지역과 계급의 차별을 잊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자란 공동적인 참상 때문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구별이 없이 함께 살게 되는 우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질병을 통해서 나마 원수가 사랑을 나누며 위로하며 공동 운명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서 함께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즉 국경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이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은 위대한 축복입니다. 마치 어둠이 빛을 만나 행복의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셋째, 이들 문둥병자들은 똑같이 소리 높여 주님의 긍휼을 청원하였습니다.
이는 삶을 애원하는 소리입니다. 다급히 요청하는 소리입니다. 병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소리들이었습니다. 이들에 함성은 병을 고침받는 기름길이 된 것입니다.
넷째, 똑같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였더니 저희가 가다가 하였습니다.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가는 경우는 자기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러 갈때입니다. 그리고 나은 것이 확인될 때는 사례의 예물을 드리도록 되었습니다(레14:2-20).
주님은 이 문둥병자들이 병이 나은 사람처럼 제사장에게 확인이나 시키러 보냈듯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똑같이 순종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이들 열사람 문둥병자들을 다 칭찬할 만한 자세들입니다.
다섯째, 똑같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절에 했습니다. 저들은 똑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는 순간에 병에서 해방을 받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이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길에는 이적과 축복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2. 빨리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이들 문둥병자들은 첫번째는 문둥병을 짊어지고 예수를 찾았고 두번째는 고침을 받고 돌아옴으로 그들 중에 한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인간들을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성경에는 돌아오라고 한 말씀이 900번 이상 사용하시었다고 신학자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돌아와야 할 이유
(행9:4)에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하고 찾고 계시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창3:9) 아담을 부르시고 그자에게 묻기를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출19:20) 모세를 부르시었고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백성에게 가서 저들을 "신칙"하라고 하셨습니다.
(삼상3:10) "사무엘아 사무엘아"부르시었습니다. 이에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엘리"에 집에 가서 하나님에 심판이 있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여러 각도에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2)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여호와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인격적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죄를 깨닫는 것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돌아와 안겨야 합니다.
(눅15:20) 탕자가 배고픈 처지에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은 것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게 아니라 그 품에 안기었을때에 용서함 받고 명예가 회복되어 아들의 자리로 회복한 것입니다.
(3) 엎드러 졌으니 돌아오라고 합니다.
아홉사람의 문둥병자들은 고침 받은 것으로 만족하여 건강한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엎드러 져서 주님께 돌아오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엎드러져 있습니까? 돈, 명예, 권세, 세상, 향락입니까? 내 자세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개처럼 엎드러져 물을 먹던 기드온 군사들은 전쟁터에 출전 금지를 당했습니다(삿7:5).
둘째, 돌아오는 자의 태도
(1)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호14:2-3).
이 말씀은 언약의 말씀, 축복의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갖고 나오란 말은 믿고 나오라는 뜻입니다. 돌아오지 못한자들은 사실 믿음이 없어서 오지 못한 것입니다.
(2) 불의를 제하고 나오라
"모든 불의를 제하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고 했으니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선한 것을 드리고 있는가 살펴 봐야 하겠습니다. 불의한 재물, 불의한 마음, 불의한 자세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거룩하시니 거룩지 아니한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3. 배은 망덕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17절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문둥병에게 깨끗해진 사람은 분명히 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으나 올바른 자세로 돌아와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하여 감사한 사람이 심히 작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흔히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사실 젖먹이 일때 일주간만 그대로 버려 두면 죽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중에 장기간 부모의 양육의 받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이처럼 유아때부터 부모의 사랑으로 성장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곧 잊어버립니다.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불효한 딸들을 가리켜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를 두는 것은 독사의 이빨보다 날카롭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구할때는 소리가 크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 감사하는 소리는 작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시는 주님의 말씀속에 숨겨져 있는 탄식의 소리입니다.
열사람이 똑같이 문둥병에서 나았으나 주께로 돌아와 감사하는사람은 한사람 뿐이었습니다. 병고침 받는데는 열사람의 행동이 일치했습니다. 여기 주님 앞에 와서 엎드려 사례하는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주님께로 그 마음이 오고 몸이 오고 겸손이 오고 입술의 증거가 왔습니다. 실로 내용이 있는 감사였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이웃에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인간들에 생활속에는 이웃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도움을 받지만 그 은혜를 곧잘 잊어 버리고 맙니다.
그 이웃이란 누구를 지칭할 수 있을까요 친구, 선생님, 의사, 목사, 인첩해 사는자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상호, 상부, 상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은 나를 위해 있으며 또한 그렇게 생각이 드는 자가 이웃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자는 인간의 배은 망덕을 비꼬아서 이르기를 "불어라 불어라 찬 바람이여 너는 인간의 배은 망덕보다 오히려 불친절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하시기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도다" (사1:2-3)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구할 때는 열성이 많으나 그 은혜를 받은 결과 은혜의 열매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는 적습니다.
그러나 열사람중에 한사람 문둥이는 주님께 감사의 표시를 했으니
*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 그리고 사례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사마리아인의 분명한 감사의 표시이니 주님은 이 사람의 보답하는 태도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4. 나혼자라도 주님께 바로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다른 아홉 문둥병자들이 그들의 집으로 갔건 세상 향락의 자리로 놀러 갔건 상관하지 아니하고 한 문둥병자는 주님앞에 와서 사례를 하였습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홉 문둥이들은 넓은 길로 갔고 한 문둥병자는 좁은 길인 예수님의 진리를 찾아왔습니다. 사실 대다수중에 혼자서 정의를 부르짖기는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태도를 분명하게 취한 자들 가운데 승리를 한 자들이 있습니다.
첫째, 엘리야 선지자를 말할 수 있습니다.
(왕상18:19-40) 에 바알 선지가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자기들의 신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엘리야는 여호와만 섬기고 부르는 중 여호와가 제물을 다 태우시므로 참신임을 보이는 동시에 이에 힘을 얻어 저들을 기손강에서 멸망시킬수가 있었고 참 하나님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가 이같이 되기 까지는 저의 굳은 신앙심을 볼 수 있으니(왕상18:21)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 찌니라"고 하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고 외치었던 것입니다.
둘째, 여호수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24:15)에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에 모으고 설교하기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던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우상을 섬기든지 말든지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는 대단한 태도를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세속주의냐 무신론적이냐 이교도냐 하는 선택을 분명히 하라는 뜻입니다. 즉 사리가 분명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에스더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에4:17)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신앙정신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끌려온 "에스더"는 고아였습니다. 마음이 곱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이 처녀는 아하스에로왕의 부인으로 뽑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장군의 모함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죽게 될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때 에스더는 민족을 살리기 위해 3일간 금식기도 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왕의 부름없이 왕앞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위대한 희생적 결단은 사망에서 건져내는 대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만 있으면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넷째, 바울과 같은 사람을 바로 선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차례에 걸쳐 자신이 죽을 각오를 했노라고 피력하였는데
(1) 밀레도 항구에 에베소교회 장로들의 만류를 무릎쓰고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주장하였고
(2) 두로에 머무는 동안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바다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하여 자기의 굳은 결의를 나타냈었습니다(행21:4-6).
(3) 가이사랴에서도 울면서 만류하는 교우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고집하였습니다.
짐을 부리면서 어느 때나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서든지 때와 장소를 형편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개한 수난사를 통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창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고 하였습니다.
사실 역사상 이만큼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를 가지고 전도한 일군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죽을 각오를 갖고 일을 하였더니 그 성과도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디오세네스의 찾는 인물상 10가지를 열거해 보면
*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물
* 양심의 의무에 충성하는 인물
* 한마디 말이 약속척도와 바꿀수 있는 인물
* 의지가 돌같이 강하여 변치않는 인물
* 작은 일도 큰일처럼 충성하는 인물
* 기회를 잡는데 민첩한 인물
* 어디에서나 자기의 특성을 잃지 않는 인물
* 전 인류를 위하여 양심에 불타는 인물
*실패했어도 낙심하지 않는 인물이같은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5. 예수의 선행이 풍성과 공정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똑같이 병을 고쳐 주시었으니
주님께서는 열사람 전부를 깨끗하게 고쳐 주시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이 고쳐 주시었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은 인류 전부를 하나 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사랑을 받고 안받고는 그들의 개인들의 태도이지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마5:45)에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니라"하셨습니다. 해와 비는 생명을 위한 요소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적 은혜이니 이 은혜는 차별없이 주십니다. 이는 또한 무한하신 사랑의 뜻이니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에 상관없이 대적을 하거나 율법을 나타내거나 상관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롬1:14)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고 하였습니다. 인종의 차별없이 주의 생명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으로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은 전 인류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구원하시기를 소원 하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째, 사례를 하는자에게 대한 보답
사례를 한 문둥이는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자가 이같이 구원함을 받게 된 것은 주님께 돌아와서 사례를 드린 결과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례를 하는 자에게 보상을 해주십니다(마26:6-13)에 한 여인이 예수께서 식사 하실때에 그 머리에다 향유를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헌신의 극치를 의미하는데 이같이 최대의 헌신을 한 여인에게 예수께서 보상의 하나로 이 복음이 전하는 곳에는 그의 행위가 전하여질 것이라고 하셨고 지금까지 아니 이 세상이 없어질때까지 그의 충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보상은 없을 것입니다.
(마25:14-30)에 달란트 비유중에서도 많은 이익을 남긴자에게 갑절의 보상을 하시고 주인의 즐거운 자리에까지 앉게 하시는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10:42)에는 주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자의 보상은 하늘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만큼의 설명을 통해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례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이 지극하심을 알 수 있으니 늘 보은의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감사를 모르는 자에게는 그것에 해당하는 보응을 하시고
감사가 없던 아홉문둥병자는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육신적 치료는 받았을찌라도 영원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마25:27-29)에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이익을 남기지 못한자들은 본전과 있는것까지 배상케 하시며 바깥에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시라고 하시고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갈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명을 잘 감당하지 아니한 태만한 자의 보상입니다.
(마26:6-13)에 가룟유다는 예수님께 봉사하는 것을 싫어하며 방해하려고 하더니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마27:5). 이와 같이 하나님은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공의 정대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6.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열문둥이들은 자신들의 병이 낫기 위해서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선생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입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은총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문둥병이 깨끗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간혹 육신적인 문제만을 위해서 간구하다가 육신의 문제도 해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문둥이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야 겠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에 관심을 두고 이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들 즉 구한것 이외의 것들까지 풍성히 허락하시는 것입니다(마6:33).
7. 믿음에 순종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문둥이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의 순종심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문둥병이 나은 자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임으로써 다시 자기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들이 이말을 듣고 제사장에게 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전폭적으로 믿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지금과 같은 문둥이의 모습으로 제사장에게 갔다가 망신을 당하거나 다시 내어 쫓김을 당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원하는 자는 주님의 제시하시는 방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 방법 내 생각으로 할때는 전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겠습니다.
결 론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주님께로 돌아와야 만이 가진 문제가 해결이 되고 그에 대한 도우심에 늘 감사하며 살아갈 때 축복이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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