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3일 매화산 남산 제일봉을 등반하고 해인사를 둘러 보았다. 해인사는 두번째 인데 너무 오래전 일이어서 거의 기억이 없다. 해인사는 750년 이상 지난 팔만대장경목판이 있는데, 아직까지 보존 되어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 왜란과 625를 격어면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그 동안 3번의 화재가 있었지만 대장경판까지 번지지 않았다고 한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인지? 해인사 입구에 김영환 장군이 625때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일화가 소개 되어 있다. 625 한국 전쟁 당시 괴뢰군 잔당 900명이 해인사로 숨어 들었는데,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지상군의 항공 지원 요청에 따라 4기의 편대로 투입되었고, 정찰기의 목표물 포격 요청을 거부하고 대장경판의 안전을 지켰다는 것이다.
산행은 황산2구 마을회관에서 시작하여 청량사, 남산제일봉, 해인사, 마을회관으로 돌아오는 경로다.
남산제일봉, 많은 사람들이 매화산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매화산 주봉은 갈 수 없고, 남산제일봉이 개방되어 있다.
청량사
청량사 대웅전, 앞에 보이는 탑은 청량사 삼층석탑(보물제266호), 청량사 석등(보물제253호)
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제265호)
처음 나타난 기암들
산자락에 있는 기암들,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감동을 전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가야산, 가장 높이 보이는 곳이 상왕봉(牛頭峰)과 칠불봉으로 생각된다.
멀리서 보이는 기암, 이 바위가 최고의 절경으로 보이며, 사람이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올라가면서 찾아도 이 바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개방되지 않은 등산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드디어 남산제일봉이 멀리 눈앞에 나타났다.
기암, 바위가 3개로 갈라져 있는데, 가까이서 잡은 사진을 사람들이 올라가 있어서 멀리서 찍은 사진이다.
멀리서 특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어서 당겼는데 가까이서 보면 굉장히 클 것으로 생각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다리, 이 것이 마지막인 것으로 보이지만 올라가면 또 다른 사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정상이 많이 가까워 졌다. 잠시 쉬었다가 이제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정상으로 향한다.
남산제일봉, 1010m
정상 부근의 기암
남산제일봉, 정상을 지나 아래쪽어서 본 장면
하산길에 본 동굴, 깊이는 약 4 ~ 5m, 높이 약 2m 정도의 자연동굴 처럼 보이는데, 사람이 만든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상당히 조화롭게 되어 있어서 인공 동굴 같기도하다.
고로쇠 나무, 고로쇠 나무는 骨利樹에서 유래하였다. 통일신라말 도선국사가 백운산에서 오랜 수행을 마치고 일어나려는 순간 무릎이 펴지지 않아서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았지만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때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목을 축였는데 신기하게도 이 물을 마신후 무릎이 펴지고 몸이 좋아져 나무의 이름을 뼈에 이로운 나무라하여 골리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공적비, 김영환 장군은 공군 창설의 7인 주역이며, 625전쟁당시 T6, T51D를 몰고 참전하였다.
가야산의 가야는 '최상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하신 붓다가야에서 따왔다는 설과, 옛날 가야국이 있었던 곳의 산이라는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가야산은 서남쪽 자락에 해인사를 품고 있다. 중국 남조시대의 誌公스님(418 ~ 514)은 해동의 가야산에 대가람이 세워져 불법이 번창하리라고 예언했으며, 그로 부터 300년 후인 802년(신라 애장왕 3년)에 의상대사의 법손인 順應和尙과 그의 제자인 理貞和尙이 창건하였다. 해인사의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 기초하였다고 전해진다. 해인삼매는 바다에 풍랑이 그치면 모든 형상이 비치듯이 법계의 실상을 본래 모습 그대로 자각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해인사는 조계종이 지정한 최초의 叢林(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포함한 종합 수도 도량)으로 운영되고 있다. 해인사는 법보종찰로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한국의 삼대 사찰이다.
해인사 일주문
해인총림, 우측에 보이는 枯死木은 신라 애장왕 3년(802)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들의 은덕에 감사하여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것이며, 이 느티나무는 1,200여년를 살다가 1945년 고사하였다.
소원나무, 이 곳은 가야산 산신이 깃든 곳이다.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順應和尙讚에 보면 순응, 이정화상이 당나라에 유학가서 誌公스님의 제자로 부터 가야산에 절을 지으라는 참언(讖言)을 듣고 귀국하여 가야산을 답사할 때 가야산 산신령이 이 곳을 점지(點指)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곳에 소원을 적고 局司壇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국사단, 局司大神을 모신壇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신국을 관장하는 산신(山神)과 토지가람신(土地伽藍神)을 가리킨다.
해탈문(解脫門)
구광루
해인도, 海印圖는 의상대사(625 ~ 702)가 당나라 유학시절 화엄사상을 요약한 210자 7언 30구의 게송(偈頌, 부처의 공덕이나 교리를 담은 노래 글귀)을 만(卍)자를 발전시킨 도안에 써 넣은 것. 화엄일승법계도, 법승도 등으로 불린다.
대적광전, 해인사는 화엄경 중심 사찰이기 때문에 대웅전이 없고, 화엄세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주법당이다. 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스트어인 바이로차나(Vairocana)에서 온 말로 영원한 진리를 상징한다. 빛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뜻이며 태양을 뜻하는 부처님이다. 대적광전, 대광명전, 비로전, 화엄전(華嚴殿)이라고도 한다.
팔만대장경, 부처님께서 진리의 세계에 대해 차별없이 말씀하신 법과 그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한 총서(경, 율, 론 3장)를 81,350판에 달하는 목판에 양각으로 새겨놓은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한역경전 중 가장 오래된 원판본이며, 틀린 곳이 없다고 한다. 총 1,514경전, 52,389,400 글자 6,791 책으로 되어 있다. 경판의 가로길이 70cm, 세로 폭 24cm, 두께 2.8cm, 무게 3.25kg으로 가로 23행, 세로 14자로 되어 있다.
수다라장
법보전
법보전(좌측 건물)과 수다라장(우측 건물) 이 곳에 팔만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팔만 대장경은 고려때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만들었다. 초조 대장경은 1,087년에 완성되어 북한산의 진관사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로 옮겨 보관 하던중 몽고의 2차 침입때 화재로 소실 되었다. (1,232) 이에 국난을 극복하고자 팔만 대장경(1,236 ~ 1,251)을 만들었으며, 국보32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학사대 신라말기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詩書에 몰입하던 곳이다. 그가 이 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수많은 학이 날아와 경청했다고 한다. 당시 거꾸로 꽂아 두었던 전나무 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며, 그 것을 증명하듯 가지가 처져서 아래로 자라는 것 처럼 보인다.
영지, 가야산 정상이 비친다고 해서 影池라고 한다. 금관가야의 김수로 왕의 왕비인 허왕후가 장유화상을 따라서 가야산 칠불봉으로 출가한 일곱 왕자를 그리워하여 가야산을 찾았으나 산을 오를 수 없어서 아들 들의 그림자라도 보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 하였드니 정진 중인 왕자들의 모습이 연못에 비쳤다고 전한다.
성철(1912 ~ 1993) 대종사 사리탑,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등을 맛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핀 연꽃을 표현하며,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 정, 혜 삼학과 수행 과정을 의미한다.
會仙臺, 선인이 모여 노는 바위
첩석대(疊石臺), 암석이 쌓여 있는 대
낙화담(落花潭), 꽃이 떨어지는 소
농산정, 최치원 선생이 은둔 수도한 곳
홍류동(紅流洞),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계곡물을 붉게 물들인다는 계곡
홍류문, 해인사의 출입문이다.
와불, 바위에 갇힌 부처라고 설명한다.
칠성대, 북두칠성에 예향(禮香)하던 곳.
무릉교,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