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세고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는, 조선 후기 부부시인으로 유명한 김성달.이옥재 부부가 살았던 마을이다.
오두리(鼇頭里)는 마을 보습이 자라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서산 A.B 지구 방조제 조성으로 인해 마을 앞이 육지로 변했다.
하지만 옛 시절에는 마을 턱밑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리던 서해 천수만의 아름다운 어촌이었다.
김성당(金盛達,1642~1696)집안이 오두리에 정착한 것은,안동김씨 선조인 수북(水北)김광현(金光炫1584~1647)
때부터다.
김광현은 병자호란 때 아버지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1637년1월),삼년상을 마치고 홍성 갈산 오두리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김광현의 손자 김성달은 서울에서 태어나 과거에도 합격했다.
이후 부인 이옥재(李玉齋,1643~1690)와 가족들이 모두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오두리 정착 이후에는 진안군수와 한성부 판관 등을 역임했고,
강원도 고성군수로 부임하던 중에 1696년4월에 향년 54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성달의 부인 이옥재(李玉齋,1643~1690)는 조선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조선중기 문장 4대가로 이름을 떨친 이정구다.
이옥재는 친정집의 문학적인 소양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자란 여인이였다.
김성달.이옥재 부부의 양쪽 집안은 당대의 명실상부한 문벌가였다.
선대로부터 맺어온 학맥과 충절과 문장이라는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부부였다.
특히 김성달.이옥재 부부룰 비롯한 아홉 자녀가 모두 훌륭한 시를 썼다는 사실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성달.이옥재가 오두리에 살면서 주고받은 시집이 『안동세고(安東世稿』다.
또헌 부부와 첩실과 아홉 자녀가 함께 지은 시가 『연주록(聯珠錄)』이다.
안동세고와 연주록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온다.
조선시대 여성문학사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문희순(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원,문학박사)은
대학원생 시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접했다.
조선시대 유명한 문학평론가 이규경(1788~?)이 그의 평론서『시가점등(詩家點燈)』에서부부와 부실 및
자녀 13인의 가족문학사를 논하면서,“책에 수록된 규방에서 읊은 시는 압록강 동쪽 고금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압동고금미증유야(鴨東古今未曾有也). „라고 적어놓았다.
이 책에 『연주록(聯珠錄)』이 소개되었다.
문희순 박사는 1985년에 연주록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문희순 박사는 이 평론서에 기록된『연주록(聯珠錄)』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이들이 살았던 갈산면 오두리를 비롯하여 연고가 될 만한 곳은 거리불문하고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전의 송준길(宋浚吉,1606~1672) 집안 고택에서 찾아다니던 고서를 발견했다.
송준길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문신.성리학자.정치가였다.
송준길 집안은 바로 김성달.이옥재부부의 딸 김호연재가 출가한 사돈 집안이다.
문희순 박사는 송준길 고택인 동춘당(同春堂) 다락방에서 후손들이 보여주는 고서 한 뭉치를 받아들었다.
송준길 집안 후손들이 소중하게 보관하던 고서 뭉치였다.
아!그런데 뜻밖에도,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연주록이 고서 뭉치 속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고서 뭉치 속에는 처음 접하는『안동세고(安東世稿』가 있었다.
안동세고라는 제목 옆에는 작은 글씨로“부 연주록(附 聯珠錄)„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었다.
이때의 반가움이란,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 그 자체였다.
문희순 박사는 안동세고를 빌려서 내용을 번역했다.
한문 전공이므로 책속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동세고는,김성달.이옥재 부부의 문집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갈산 안동김씨 집안 김성달.이옥재 부부가 썼던 글모음이,
대전 송준길 집안 다락방에서 발견되다니…….
안동세고는 김성달.이옥재부부의 큰아들인 김시택이 엮었다.
김시택이 부모의 시와 함께 형재들과 서모의 글을 부록 형식으로 모아놓은 것이다.
책의 큰 제목은 『안동세고(安東世稿』라고 붙여 놓았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자녀와 서모의 글을『연주록(聯珠錄)』이라는 부제목으로 써놓은 것이다.
이렇게 모아놓은 시문집은 부부의 아홉 번째 자녀인 김호연재가 한부 복사하여 출가할 때
갖고 갔던 것이다.
김호연재는 송준길 집안으로 출가하여 주옥 같은 시를 많이 지었다.
자신의 시와 함께 친정에서 갖고 갔던 부모형제의 시문집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송준길 집안에서는 조상 할머니 김호연재가 썼던 시들을 대대로 소중하게 보관해왔다.
이 유고집 속에 안동세고가 섞여서 함께 전해오던 중에,문희순 박사의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문희순 박사는 이옥재.김성달 부부의 시집『안동세고(安東世稿』를 발굴하면서
이옥재라는 조선시대 홍성의 여류시인을 새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이때가 1995년이었다.
김성달.이옥재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다.
남편 김성달은 벼슬살이로 멀리 떠나있을 때마다 안부 편지와 시를 부인에게 보냈다.
아내 이옥재도 안부와 그리움을 실어 화답했다.
또한 부부는 취미를 공유하며 바둑을 즐겼다.
부부가 내기 바둑을 두었고 진 사람은 벌칙시를 짓기도 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어촌의 풍경을 감상했다.
부부는 서로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시로써 맹서하기도 했다.
이옥재는 “바다와 산에 맹서하여 일편단심 고치지 않겠다„고 하였고,
김성달은 “다시 세세토록 부부되어 저승에서도 만나자„고 맹서하였다.
부부시집 『안동세고』에는 이처럼 오두마을의 정경과 부부의 사랑이 절절히 묻어난다.
이옥재는 4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말년에는 병고에 많이 시달렸다.
김성달의 시에서도 부인의 병을 걱정하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절한 시는 김성달이 자신보다 6년 먼저 죽음을 맞이한
부인 이옥재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들이다.
이 시에는 김성달이 아내 이옥재 사후,
아내가 남긴 유묵 들을 보며 흘리는 애절한 마음이 잘 표현 되어 있다.
병석에서 쓴 그녀의 편지는 남편에게 보내지 못한 채 그대로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유묵울 정리하면서 사후 일 년 만에 아내의 편지를 접하게 된 남편 김성달.
그는 오열하고 말았다.
아내가 떠난 지금, 정인의 편지가 가장 어려운 슬픔으로 다가온 것이다.
김성달의 아내 사랑은 생전에도 그리하였지만 사후에도 변함없을 이 시는 잘 말해 준다.
[문희순 평]
김성달(金盛達)
김성달(金盛達)은 김수민과 남원윤씨 사이에서 1642년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靑洲 자는 伯兼이며 한성 판관 고성 군수(高城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절의지사 선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선생의 증손으로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의 종증손이다.
부인은 연안 이씨 문충공 월사 이정구(文忠公 月沙 李廷龜1564~1635)의 증손녀로 여류시인인 이옥재(李玉齋 1643-1690)이다.
김성달 부부는 선대로부터 맺어온 학맥 인연에 충절과 문장이라는 두 축을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선조의 철학과 삶이 가문의 인연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가정생활에 녹아져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찍이 이 부부의 딸 김호연재(金浩然齋1681~1722)가 “비록 여자의 몸이라도 부모님이 낳아 길러주신 은혜를 입어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어찌 용렬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은 것을 다툴 수 있겠는가?”
(<자경편> ‘자수장“雖是女子之身 蒙父母生成之恩 而生長於名門 寧可碌碌 與禽獸之徒 爭長競短乎”)라고 당당하게 말한 것에서도 김성달 가의 넘치는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용(金尙容)은 국문시가 <오륜가> 5장과 <훈계자손가> 9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이 집안의 국문시가에 대한 애정과 창작 활동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내려 하나의 문학 전통을 형성하였다.
김성달(金盛達)도 갈산 오두리에 있을 때는 가사 작품 <오산곡(鰲山曲)>을 강원도 고성군수 재직 시에는 <봉래곡(蓬萊曲)>을
지었다(안타깝게도 이 두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성달(金盛達)의 큰 아들 김시택(金時澤 1660~1713)도 자형나무를 매개로 노래한 시조 한 수가 전해진다.
이 시조는 형제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형제 9남매의 삶과 죽음 이별의 아픔을 함축한 시이다.
이 후 자형나무 시는 형제간에 절구 형태의 화답 한시로 창작되기도 하였다.
이 부부의 막내 딸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 역시 여류시인이다.
이옥재(李玉齋 1643-1690)는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은 것을 알았던 조선의 여성지식인이다.
이는 남편 김성달(金盛達 1642-1696 자(字) 백겸(伯兼) 호(號) 청주(靑洲)이 평가한 아내 이옥재의 모습이다.
(안동세고-209 <次人韻悼亡>.‘多聞多見復多知’)이옥재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증조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1598-1645)이 할아버지, 동곽(東郭) 이홍상(李弘相,1619~1645)이 아버지인데,
이홍상의 1남 2녀 가운데 첫째 딸로 태어났다.
월당 강석기(1580-1643)는 외조이다. 이옥재의 증조 월사 이정구는 조선 중기 문장사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정구의 장자 이명한(1595~1645)의 네 아들 일상ㆍ가상ㆍ만상ㆍ단상과 차자 이소한의 네 아들 은상ㆍ홍상ㆍ유상ㆍ익상
여덟 형제가 수창한 시편은 ‘연주집(聯珠集)’이라는 시집으로 간행되었는데 세상에 크게 유행하기도하였다.
이옥재는 이러한 친정의 문학적 환경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문인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타고났다.
거기에 남편 김성달 역시 혹독하리만치 시 짓기를 좋아하였던 문학애호가였다.
이옥재 부부는 홍성 갈산 오두리에 살면서 ‘갈뫼김씨(옷머리김씨)’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산파 역할을 하였다.
이옥재는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자녀 모두가 문학적 감수성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들 아홉 자녀의 시가 ‘연주록(聯珠錄)’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아홉 자녀들의 학문과 문학적 자질은 어머니 이옥재의 교육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이옥재의 여덟째 자녀 김호연재(1681~1722)의 9세손 송용억은 ‘호연재유고’ 영인본을 발간하면서 김호연재의 학문 연원이
모부인 이옥재에 기인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옥재는 남편과의 부부관계도 평등·조화로운 부부상을 실천하였다.
이와 같은 부부의 삶의 방식은 아홉 자녀의 인문적 감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묘갈명(墓碣銘)
공은 휘는 성달(盛達),자는 백겸(伯兼),성은 김씨(金氏),본관은 안동(安東)이니,
고려의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이 그 시조이다.
고조 휘 극효(克孝)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상용(尙容)은 우의정으로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호는 선원(仙源)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부 휘 광현(光炫)은 이조참판을 지냈다. 부친 휘 수민(壽民)은 덕산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효성으로 정려를 하사받았다. 모친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목사(牧使) 휘 형각(衡覺)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 임오년(1642, 인조20) 1월 20일에 태어났다.
아이 때부터 천성이 인후(仁厚)하였는데 성장해서는 마음이 너그럽고 선을 좋아하여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다분하니,
당시의 선배와 친척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갑인년(1674,숙종1)에 처음 벼슬하여 효경전 참봉(孝敬殿參奉),사도시 봉사(司䆃寺奉事),도원도 찰방(桃源道察訪),군자감 직장
(軍資監直長),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진안 현감(鎭安縣監)에 제수되었다.
군은 한결같이 성신(誠信)과 인서(仁恕)로 백성을 대하고 정사를 행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것처럼 관직에 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하였고 이해를 따진 적이 없었다.
또 와서 별제(瓦署別提),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고성 군수(高城郡守)가 되었다.
영동(嶺東)에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공이 성심을 다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니 유망(流亡)하는 백성이 없었다.
그해(1696년) 8월7일에 관사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백성들이 달려와 호곡(號哭)하여 상여를 전송하였다.
10월에 양주(楊州)의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옥재:1643~1690)이니, 정자(正字) 홍상(弘相)이 그 부친이다.
부인은 혜신(惠愼)하고 유정(幽貞)하여 옛적 열녀의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6년 먼저 졸하였다.
처음에 홍주(洪州)에 안장하였다가 임오년(1702)에 공의 묘소 왼쪽으로 옮겨 부장하였다.
공은 5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시택(時澤)은 비안현감이고, 다음은 시윤(時潤)ㆍ시제(時濟)ㆍ시흡(時洽)ㆍ시정(時淨)이며,
급제(及第) 이명세(李命世), 종실(宗室) 밀성군(密城君) 이식(李栻), 이항수(李恒壽), 송요화(宋堯和)는 그 사위이다.
측실에게서 1남 3녀를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공은 가정에서는 효우(孝友)를 행하였고, 어버이를 곁에서 모실 적에는 기쁜 안색으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형제와 화락하게 서로 잘 지냈으며,자손을 자애로 어루만지되 능히 잘 가르쳤고,노복을 대할 적에 인자하되 법도가 있었다.
청렴결백하게 벼슬살이하였고, 허심탄회하게 남을 대하였으며,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가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항상 태연하여 근심스러워하는 안색이 없었다.
사람됨이 진실하여 거짓으로 꾸민 적이 없었고 염담(恬淡)하여 물욕이 적었으며,
세상의 명리에 대해서는 더욱 마음을 두지 않았다. 평생 기쁨과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비방과 명예를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마음이 평탄하고 진솔하여 편견이 없다.” 하니,
동배들이 이로써 공을 훌륭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시를 읊기를 몹시 좋아하여 거의 버릇이 되었는데,
당시 문장의 대가들이 모두 탄복하여 왕왕 붓을 놓고 한 걸음을 양보하였다.
공은 또 산수를 좋아하여 더불어 승경지에 대해 말할 적에는 혹 침식을 잊기도 하였다.
거처하는 곳에 해산(海山)의 승경이 많았는데,
매양 가절(佳節)이 되면 형제와 아이들 그리고 갓을 쓴 사람들과 그 가운데에서 소요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고향에 있을 때에 〈오산곡(鰲山曲)〉을 짓고 동군(東郡 고성(高城))에 있을 때에 〈봉래곡(蓬萊曲)〉을 지어 뜻을 드러내었고,
심지어 초연히 세상 사이의 표방(標榜) 밖으로 홀로 벗어나 매양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의(時議)가 분분하여 다툼이
막 일어나려 할 적에 홀로 베개를 당겨 설핏 잠에 빠져 듣지 않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의 자품이 남보다 월등히 세속을 벗어난 것이다. 시고(詩稿)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내가 공과 척의(戚誼)가 있으니, 공의 아들 시제(時濟)가 조카사위인데, 이 역시 청고(淸高)하여 지조가 있다.
지금 형의 명으로 나에게 와서 공의 묘갈명을 청하기에 늙고 병들어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략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묘갈명(墓碣銘)
차군가세(嗟君家世) 아 군의 선대는
여두여산(如斗如山) 태산북두 같았고
차군성질(嗟君性質) 아 군의 바탕은
여옥여란(如玉如蘭) 난옥 같았어라
강호가계(江湖家計) 강호는 거처였고
풍월금계(風月襟契) 풍월은 벗이었으며
역유가우(亦有嘉耦) 또 아름다운 배필 있어
금슬기우(琴瑟其友)금슬로 친애하였도다
록기필다(祿豈必多) 복록이 많을 필요 있겠는가마는
석년부하(惜年不遐) 수명이 길지 못함이 애석하구나
유자유손(有子有孫) 아들과 손자들이
이효이재(而孝而才) 효성스럽고 재주 있으니
상유여경(尙有餘慶) 아직 남은 경사 있음을
가징방래(可徵方來) 장래에 징험할 수 있으리라
*묘갈명 작성자: 대사헌 우의정 판돈녕부사 파평인 명재 윤증(尹拯,1629~1714)
시인(詩人) 김호연재(金浩然齋)
김호연재(金浩然齎, 1681〜1772)는 사대부 출신 여성 시인이다.
충청도 갈뫼(鼇頭)에 정착한 안동 김씨인 김성달(金成達)의 딸로 태어나
성장하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후손 송요화(宋堯和)와 혼인하였다.
42세로 사망할 때까지 가문의 살림을 주관하면서 근 200편의 한시를 남겼다.
한시 원문은 실전되었으나 한글본으로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지다가 증손부 청송 심씨(靑松沈氏,1747〜1814)가 직접 정서하여
깨끗이 보존될 수 있었다.
김호연재의 남편 송요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 안정나씨를 모시고 지방관인 형 송요경의 임지를 따라 다녔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생활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직계 어른의 통제 없이 송촌(宋村)에서 호연재는 젊은 나이에 가문의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엄격한 규범의 화신이 되어야 했지만 역설적으로는 시를 지으며 군자 의식을 가다듬을 수 있는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호연재는 시숙부 송병익(宋秉翼)을 시어른으로 의지하면서 시당질 사흠(士欽), 진흠(晉欽), 명흠(明欽)등에게 글스승이 되었다.
혼인 직후 호연재 부부가 신혼을 보냈던 법천정사는 바로 송촌의 뒤켠에 있었다.
일상시가 곧 산수시가 될 수 있는 환경이다.
송촌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호연재는 가고 싶을 때마다 가까운 비래암과 법천의 산수 속에서 휴식하며 문학적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법도상 사대부가의 여성은 일가친척 외의 남성과 폭넓게 교유할 수 없었으며,
외부인과 주고받는 편지에도 한글을 사용해야 했다.
실제 호연재의 차운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일가친척 남성들이었다.
그 결과, 호연재는 그의 시문학 속에서 호탕하지만 유폐된 군자상을 조성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고립 속에서 호연재는 시에 복잡한 전고나 현학적 표현을 넣지 않고,
내면의 솔직한 감상을 담을 수 있었다.
호연재는 고독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를 규방에 갇힌 군자라 일컬으며 호탕한 성품으로 자찬하였다.
송촌 근처 법천과 비래암을 읊은 산수시 뿐만 아니라 화양구곡과 단양에 다녀간 작품에서 그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송촌을 대대로 지켰던 여성 후손들은 호연재의 작품에 공감하였고, 증손부 청송 심씨는 원고를 정서하여 보존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 여성 문인으로는 허난설헌, 신사임당, 황진이, 김호연재를 뽑을 수 있다.
대전 지역에서는김호연재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 개발을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류시인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대중성에 미흡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따라서 김호연재와 관련된 학술 연구와문화콘텐츠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김호연재 시를 바탕으로 창작한‘ <김호연재의 비상>’의 콘텐츠화과정을 논의하였다.
따라서 김호연재 관련 연구현황과 문화콘텐츠 현황을 조사하고,
<김호연재의 비상>’의 기획과정과 작품의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Dance Film <김호연재의 비상>’은 조선의 여인 김호연재의 삶이 반영된 <법천의 하루> 시집에서 현대 여성이공감하는 시어를
바탕으로 현대무용으로 재창조된 영상콘텐츠이다.
이 영상콘텐츠는 2015년 대전 문학관에서 주관하는 ‘문학 콘서트’에 무용가로 초청되어 ‘김호연재를 추다’를 공연하면서
김호연재의 삶에 대한 강연을 듣고 그녀의 삶을 공감하며 시작된 기획이다.
그 결과 김호연재는 문학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문학적 재능을 키웠으며,
조선의 봉건적 제도에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시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그녀의 시작품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보존, 유통하였다는것을 본 연구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그리고 현대의 예술가가 김호연재의 삶을 공감하고 제작된 문화콘텐츠는 그지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지역의 특수성을 확보하여 재탄생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앞서 언급된 영상콘텐츠는 ‘김호연재 여성문화 축제’에 상영이 되었고 지역 문화예술교육에 특강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지역의
대표 무용페스티벌에 초청되어 무대화된 공연으로 확장 진행되었다.
이는 곧 지역의 특수성을 확보한 예술가의 작품은 새롭게 문화적 가치를 창조하며 지역의 역사를 읽어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역 문화의 자료로 활용되는 예술 작품과 기록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예술가의 삶을 통찰하도록안내하였다.
또한, 댄스 필름(dance film)을 활용한 문화콘텐츠는 무용의 새로운 시도와 무용 작품의 학문적 의미에 긍정적 방향 제시를
해 줄 것이라 판단된다.
김운과 마찬가지로 김호연재 역시 여성의 학문과 문학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가정에서 문학수업을 제대로 받으며 자란
여성 작가이다.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고성군수를 지낸 김성달(金盛達, 1642~1696)의 딸이며,
소대헌(小大軒) 송요화(宋堯和, 1682~1764)의 부인이다.
호연재의 친가는 우의정을 지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이며
시가 역시 좌참찬을 역임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으로 친가와 시가 모두 당대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시가점등(詩家點燈)』 5권 〈내가수증연주록(內家酬贈聯珠錄)〉에 의하면
“김성달에게는 정실인 연안이씨(延安李氏,1643~1690)와 부실인 울산이씨 그리고 자녀 13 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시에 능했다.
『내가수증시(內家酬贈詩)』 한 권과 더불어 그 부인과 부실이 창화한 것과 그 자녀의 작품을 합한 『연주록(聯珠錄)』
두 권이 있었는데 다만 규방에서 읊은 것 약간 수를 거두어 실은 것이나 역시 우리나라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또 김성달 집안에는 김성달이 정실인 아내 연안 이씨와 주고받은 시를 모은 시집 『안동김씨세고(安東金氏世稿)』와
김성달이 부실인 울산 이씨와 주고받은 시와 서녀의 시를 모은 『우진(宇珎)』등이 전하는데,
이로 볼 때 호연재는 온 가족이 모두 시를 지으며 서로 주고받았던 문학적 환경에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울산 이씨의〈태고정(太古亭)과 호연재의〈형제공차서모명자절(兄弟共次庶母明字絶)〉,
김성달 서녀 중 한 명의 작품으로 보이는〈차모씨태고정운(次母氏太古亭韻)은 호연재 가족이 태고정에 올라가 놀면서
이씨의 작품에 차운한 것으로 호연재 집안의 문학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원행(金元行)이 쓴 〈소대헌묘표(小大軒墓表)〉에 송요화는 “진실하며 어질고 후덕하여 인륜에 돈독하였다.”고 하였으나
아들 익흠(益欽)이 쓴〈유사(遺事)에는
“아버지께서는 할머니를 서울이나 백부의 임소에서 모시고 있느라고 항상 집에는 계시지 않았다.”
고 한 것으로 보아 호연재가 남편과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외손자인 김종걸(金鐘杰)은〈자경편(自警篇)〉 발문에서 “지추부군(知樞府君)이 젊어서 호방하여 법도에 매이지 않았다.
부인이 고결(孤潔)함이 쌓여 마음에 숨은 근심이 있으므로 편중에 가끔 이소(離騷)의 감개한 뜻이 있다.”고 하여
호연재의 결혼 생활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출가한 뒤 순탄치 않은 부부생활 속에 많은 시간을 홀로 지내면서 호연재는 늘 친정을 그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는 멀리 떨어진 친정과 혈육을 그리는 정을 곡진하게 표출한 작품이 많다.
屬四兄(촉사형)
一別幾千里(일별기천리) 한 번에 몇 천 리 이별하고
蓬飄各異州(봉표각이주) 쑥처럼 이 곳 저 곳 떠돌아다니노라니
十年歸未得(십년귀미득) 십 년을 돌아가지 못 했네
相見更何由(상견갱하유) 서로 만나는데 다시 어떤 이유가 있나
契濶寧堪說(계활녕감설)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리
艱難摠可憂(간난총가우) 힘들고 어려움이 모두 근심이라네
心隨故月影(심수고월영) 마음은 고향의 달빛을 따라가니
無夜不西流(무야불서류) 밤마다 서쪽으로 흐르지 않은 적이 없네
형제들과 한 번에 수 천 리 이별을 한 뒤 무려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형제가 서로 만나는 데는 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데 실제로 그들은 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스럽게 토로하고 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암담한 이별의 고통 속에서 그의 마음은 밤마다 혈육이 있는 고향을 향해 서쪽으로 흘러간다.
屬五兄(촉오형)
黯暗受懷苦(암암수회고) 암담하고 괴로우니
常如在敵園(상여재적원) 늘 적의 뜰에 있는 것 같네
無因更同抱(무인갱동포) 다시 만날 인연도 없이
有行各于歸(유행각우귀) 저마다 시집을 가야만 하네
路遠書難寄(로원서난기) 길이 머니 글을 부치기 어렵고
春深雁不飛(춘심안불비) 봄이 깊으니 기러기도 날지 않네
相分近十載(상분근십재) 서로 헤어진 지 십년이 가까우니
顔面夢中稀(안면몽중희) 꿈속에서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네
당시 여성들이 동기간에 헤어져야만 했던 원인은 대부분 여자라면 저마다 가야만 하는 시집이었다.
시집온 지 십여 년이 되었지만 호연재는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있는 곳을 적국(敵國)으로 인식한다.
그에게 결혼생활은 그만큼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으며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위안을 얻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친정 동기들과 고향이었다.
그래서 호연재 시에 나타난 그리움의 대상은 여성한시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임’이 아니라 고향과 친정 동기이며,
이것이 호연재 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작품 수도 많다.
반면 남편에 관한 시는 약 3수에 불과하며 내용도 남편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홀로 기이한 꽃 대하니 먼 곳 사람 생각나는데
/ 주인은 무슨 일로 더디 오시나(獨對奇花還憶遠 主人何事到來遲 〈영도(詠桃)〉)”라고 하여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거나,
“가옹의 길이 먼지 가까운지 묻고 싶지만
/ 요즘 소식을 또한 잡기 어렵네(欲問家翁行遠近 近來消息亦難挽 〈우음(偶吟)〉)”라고 하여 남편의 소식도 모르고 지내는,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를 표출하고 있다.
이런 현실의 고독과 고뇌를 해소하기 위해 호연재는 술과 담배를 접하였으며, 나아가 선계를 동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醉作(취작)
醉後乾坤濶(취후건곤활) 취한 뒤에는 천지가 넓고
開心萬事平(개심만사평) 마음을 여니 만사가 평화롭다
悄然臥席上(초연와석상) 초연히 자리 위에 누웠으니
唯樂暫忘情(유락잠망정) 오직 즐거워 잠깐 정을 잊었네
술에 취한 뒤 바라본 세상은 크고 넓으며 닫혔던 마음이 열려 만사가 평화롭고 근심 걱정이 없다.
그래서 이때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즐거움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취향(醉鄕)에 몰입하였으며,
때로는 담배를 피움으로써 현실의 온갖 번뇌와 염려를 잊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담배를 “근심스런 창자를 풀어주는 약(願將此藥解憂腸 〈남초(南草)〉)”이라고까지 하였다.
山深(산심)
自愛山深俗不干(자애산심속불간) 스스로 산이 깊고 속세 간섭하지 않음을 사랑하여
掩門寥落水雲間(엄문요락수운간) 쓸쓸히 떨어지는 물과 구름 사이에 문을 닫고 있네
黃庭讀罷還無事(황정독파환무사) 황정경 읽기를 마치니 한가하고 일이 없어
手弄琴絃舞鶴閑(수롱금현무학한) 손으로 거문고를 희롱하니 춤추는 학도 한가한 듯하네
번잡한 세사를 잊고자 그는 산중에 들어앉아 문을 닫고 있다.
속세와 절연된 깊은 산 속에서 그는 황정경을 읽으며 거문고를 희롱하는 선인의 삶을 표방하고 있다.
이렇게 호연재는 술과 담배로 현실의 갈등을 해소하는 한편 선계(仙界)를 동경하여 선인(仙人)의 삶을 꿈꾸었다.
그래서 유선사(遊仙詞)6수에서는 선계의 다양한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듯 실감나게 묘사함으로써 상상 속에 선계를
주유(周遊)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여성의 정한으로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고 선계에 오유(傲遊)하던 그는 당대 사회와 정치 현실에도 눈을 돌려 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런 사회와 정치 현실에 대한 관심은 친가와 시가가 모두 당대 명문으로 정계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많으며,
특히 숙종의 비(妃)인 인현왕후가 호연재의 시증조부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외손녀로 호연재보다
14살 위였다는 점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國哀(국애)
東方不弔遭艱憂(동방부조조간우) 동방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 간우를 만났으니
田野愚民哭未休(전야우민곡미휴) 시골 백성들이 쉬지 않고 통곡하네
四紀君恩何處問(사기군은하처문) 사기의 임금 은혜 어느 곳에 물을까
回瞻北闕恨悠悠(회첨북궐한유유) 머리 돌려 북궐을 바라보니 한이 길고 기네
이 시는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지은 작품으로 간우(艱憂)는 국상(國喪), 곧 숙종의 승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일기(一紀)는 12년이므로 사기(四紀)는 48년을 의미하는데 이는
숙종이 1674년부터 1720년까지 46년간 재위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시는 숙종이 재위 기간에 베푼 군은(君恩)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그는 숙종 승하 후 경종(景宗)의 즉위 소식을 듣고 〈문사왕즉위(聞嗣王卽位)〉를 지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오직 바라건대 우리 임금께서 성덕을 밝히시어
/ 동방의 일월에 승평세대를 계승하소서(唯願吾君明聖德 東方日月繼昇平)”라고 하여
경종의 선정과 나라의 승평 세월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작품 외에도 호연재는 〈청룡도(靑龍刀)〉와 〈무후(武候)〉에서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청룡도와 제갈량의
삶을 통해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사대부의 기상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자신이 여자로 태어나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한하며 사회와 정치 현실에 참여하고픈 소망을 간접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호연재의 심회는 〈자상(自傷)〉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自傷(자상)
可惜此吾心(가석차오심) 애석하다 이 내 마음이여
蕩蕩君子心(탕탕군자심) 탕탕한 군자의 마음이로다
表裏無一隱(표리무일은) 겉과 속이 하나도 숨김이 없으니
明月照胸襟(명월조흉금)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어 주네
淸淸若流水(청청약유수) 맑고 맑아 흐르는 물 같고
潔潔似白雲(결결사백운) 깨끗하기는 흰 구름 같네
不樂華麗物(불락화려물) 화려한 물건을 즐겨하지 않고
志在雲水痕(지재운수흔) 뜻은 구름과 물 흔적에 있네
弗與俗徒合(불여속도합) 세속의 무리와 더불어 합류하지 않으니
還爲世人非(환위세인비) 세상 사람들이 도리어 그르다 하네
自傷閨女身(자상규녀신) 스스로 규녀의 몸임을 슬퍼하니
蒼天不可知(창천불가지) 푸른 하늘은 알지 못하리로다
奈何無所爲(내하무소위) 어찌하여 할 바가 없으리오
但能各守志(단능각수지) 다만 능히 각각 뜻을 지킬 뿐이라네
호연재는 자신을 군자의 마음을 지닌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그의 사람됨은 겉과 속에 하나도 감춤이 없어 흐르는 물같이 맑고 흰 구름같이 깨끗하다.
그래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세속의 무리와 더불어 어울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도리어 자신을 그르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뛰어난 자신의 삶의 태도가 손가락질 받는 이유를 그는 자신이 규방의 여자이기 때문이라며 상심해한다.
만일 자신이 남자였다면 세인의 이런 비난을 받지 않았을 터인데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비난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심 뒤에 그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는 자신의 뜻을 지키며 소신대로 살 것을 다짐하고 있다.
허난설헌도 자기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세 가지 한 중 하나라고 하였다.
이렇게 뛰어난 자질과 기상을 지닌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여자라는 신분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생활을 가로막는
크나큰 장애물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夜吟(야음)
월침천장정 (月沈千嶂靜)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천영수성징 (泉暎數星澄) 샘에 비낀 별빛 맑은 밤
죽엽풍연불 (竹葉風煙拂)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매화우로응 (梅花雨露凝)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생애삼척검 (生涯三尺劍)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심사일현등 (心事一懸燈)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조장연광모 (調帳年光暮) 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
쇠모세우증 (衰毛歲又增)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對月思家) 달을 보고 집 생각을 하다
초당누성잔 (草堂漏聲殘) 초당에 물 떨어지는 소리 쇠잔하고
염외월륜고 (簾外月輪高) 주렴 밖 둥근달 높이 솟아있네.
수인자불침 (愁人自不寢) 시름 많은 사람 잠들지 못하고
요요좌청소 (寥寥坐淸宵) 쓸쓸히 맑은 밤에 앉아있도다.
처처엽로색 (凄凄葉露色) 처량한 나뭇잎엔 이슬이 맺히고
인인천수성 (咽咽泉水聲) 샘물 소리 목메어 우는 듯하구나.
량풍핍아의 (凉風逼我衣) 서늘한 바람 나의 옷 파고들고
하한기서경 (河漢己西傾) 은하수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네.
이정불가금 (離情不可禁) 이별의 정 막을 길 없으니
대차공상신 (對此空傷神) 달을 마주하여 부질없이 마음만 아프지.
남북억제형 (南北憶弟兄) 남북으로 흩어있는 형제 생각하노니
천애작고신 (天涯作孤身) 하늘가에 외로운 신세 되었어라.
춘안기귀진 (春雁己歸盡) 봄 기러기들은 다 돌아가고
소서무처탁 (素書無處托) 편지는 부탁할 데가 없구나.
일음복일한 (一吟復一歎) 한 번 읊고 또 한 번 탄식하나니
산연누자락 (潸然淚自落) 눈물이 절로 뚝뚝 떨어짐이여!
(謾吟) 속절없이
야정계산옥누장 (夜靜溪山玉漏長) 시내와 산에 밤은 고요한데 시간이 길었고
황화읍로소정향 (黃花浥露小庭香) 국화 꽃 이슬 머금어 작은 뜰이 향기롭도다.
추성도령설화산 (樞星倒嶺雪華散) 고갯마루 북두칠성 기울어 그름 꽃은 흩어지고
낙월영헌추색량 (落月盈軒秋色凉) 지는 달 마루에 가득한데 가을 빛 서늘하구나.
미주반성지기활 (微酒半醒志氣濶) 좋은 술 반쯤 깨니 지기(志氣)가 트이고
신시욕동세정망 (新詩欲動世情忘) 새로운 시구가 생동하니 세상의 뜻을 잊노라.
자탄자탄신하사 (自歎自歎身何似) 스스로 즐기고 스스로 탄식하니 이 몸은 무엇인가?
무락무비일취광 (無樂無悲一醉狂) 즐거움도 슬픔도 없이 취한 한 미치광이인 것을-.
녹수냉냉리외재 (綠水冷冷籬外在) 녹수는 콸콸 울타리 밖에 흐르고
청산은은함전생 (靑山隱隱檻前生) 청산은 은은히 난간 앞에 펼쳐져 있네.
공명저시황양몽 (功名祗是黃梁夢) 공명은 다만 인간사 한바탕 꿈일 뿐
하사구구여세정 (何事區區與世爭) 무엇을 구구하게 세상과 다투리오.
(生涯) 생애
생애유견백운비 (生涯唯見白雲扉) 나의 삶은 오직 흰 구름의 사립문만을 보나니
지시남주일포의 (知是南州一布衣) 이 사바세계 외로운 베옷 입은 한 백성임을 아네.
일모한천귀로원 (日暮寒天歸路遠) 날은 저물고 찬 하늘의 돌아갈 길 머니
차장준주욕위미 (且將樽酒欲爲迷) 또 술동이의 술은 가져 취하고저 하노라.
호연재 자경문 훈독(浩然齋 自警文 訓讀) 중에서
孝親章第三(효친장제삼)
백행(百行)은 유효이시언(由孝而始焉)이니라.
박어효자(薄於孝者)는 불우형제(不友兄弟)하고
불경장자(不敬長者)하며 부부무은(夫婦無恩)하고
불호인도(不好仁道)하며 불가선사(不嘉善事)하야
이습위사벽지언(而習爲邪僻之言)하고 모리탐재(謀利貪財)하며
상시위험(嘗試危險)하나니 시(是)는 개망신지도야(皆亡身之道也)니라.
백가지 행실은 효도로 말미암아 시작된다.
효도를 등한시 하는 자는 형제에게 우애 있게 하지 않고,
어른을 공경하지 않으며, 부부간에 사랑함이 없고,
어진 도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착한 일을 기뻐하지 않아 습관적으로 간사하고 편벽된 말을 하고
이익을 꾀하고 재물을 탐하며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니 이것은 다 몸을 망치는 길이다.
취작(醉作) 취하여 시를 짓다
취후건곤활(醉後乾坤濶) 취한 뒤에는 천지가 넓고
개심만사평(開心萬事平) 마움을 여니 만사가 평화롭다.
초연와석상(悄然臥席上) 초연히 자리 위에 누웠으니
유락잠망정(唯樂暫忘情) 오직 즐거워 잠깐 정을 잊었네.
술에 취한 뒤 바라본 세상은 크고 넓으며 닫혔던 마음이 열려 만사가 평화롭고 근심 걱정이 없다.
그래서 이때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즐거움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취향(醉鄕)에 몰입하였으며,
때로는 담배를 피움으로써 현실의 온갖 번뇌와 염려를 잊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담배를‘근심스러운 창자를 풀어주는 약 원장차약해우장(願將此藥解憂腸)‚
즉 남초(南草)이라고 까지 하였다.
산심(山深) 산은 깊어
자애산심속불간(自愛山深俗不干) 스스로 산이 깊고 속세 간섭하지 않음을 사랑하여
엄운요락수운간(掩門寥落水雲間) 쓸쓸히 떨어지는 물과 구름 사이에 문을 닫고 있네.
황정독파환무사(黃庭讀罷還無事) 황정경 읽기를 마치니 한가하고 일이 없어
수롱금현무학한(手弄琴絃舞鶴閑) 손으로 거문고를 희로하니 춤추는 학도 한가한 듯하네.
번잡한 세사를 잊고자 그는 산중에 들어앉아 문을 닫고 있다.
속세와 절연된 깊은 산속에서 그는 황정경을 읽으며 거문고를 희롱하는 선인의 삶을 표방하고 있다.
이렇게 호연재는 술과 담배로 현실의 갈등을 해소하는 한편 선계(仙界)를 동경하여 선인(仙人)의 삶을 꿈ㄲ었다.
그래서 유선사(遊仙詞)6수에서는 선계의 다양한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듯 실감나게 묘사함으로써 상상 속에
선계를 주유(周遊)하기도 하였다.
시에 두루 능하고 총명했지만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간 여류시인의 시(詩) 한수를 자서해 보았다.
형제공차서모명자절(兄弟共次庶母明字絶) 형제가 함께 서모의 명자 움을 빌려서 시를 짓다.
적적문엄야조성(寂寂門掩夜潮聲) 적막한 밤 문을 닫으니 물결소리 들려오고
만정화락월공명(滿庭花落月空明) 떨어진 꽃 정원에 가득하고 달은 허공에 빛나네.
사군차야면난착(思君此夜眠難着) 그대를 생각하는 이 밤 잠 이루기 어려워
누진고루독좌청(漏盡高樓獨坐淸) 밤세도록 누락에 홀로 앉았으니 정신이 맑아오네.
김호연재(金浩然齋)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여성문인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 바닷가다. 지금은 마을 주변이 육지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바닷물이 출렁이던 아름다운 어촌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 열여덟 살 때 대전 송촌(宋村)의 은진 송씨 가문으로 출가했다.
호연재(浩然齋)는 이름이 아니고 호(號)다.
이처럼 이름이 아니고 호가 알려진 데에는 당시 조선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17세기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이 불려 지지 않았으며,
결혼을 하면 누구의 배(配, 부인)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양반가의 여성들은 자신이 거처하던 안채의 당호를 자신의 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김호연재가 대전 송촌가로 출가하여 거처하던 안채의 당호가 ‘호연재(浩然齋)였다.
이런 이유로 본명 대신에 김호연재라는 이름이 세상에 전해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호연재는 어린시절부터 부모형제들의 영향을 받아 시와 친근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친가는 아버지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가 부부시인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살이로 멀리 떠나 있을 때도 부모님은 시로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자녀들도 모두 시를 잘 썼다.
김성달·이옥재 부부가 오두리에서 주고받은 시집이 『안동세고(安東世稿)』이며,
부모와 아홉 자녀가 함께 지은 시가 『연주록(聯珠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다.
김호연재는 부모의 5남 4녀인 9남매 중에서 8번째 자녀이다.
김호연재는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화와 혼인하여 대전 법천에 살았다.
신혼 초기부터 남편은 과거공부 등으로 집을 자주 비웠다.
젊은 새댁은 송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며 시집살이가 힘들었다.
그때마다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집과 형제들을 생각하며 시를 썼다.
김호연재가 42세 때인 17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까지 그녀가 썼던 시들은 은진송씨 가문의 후손들에 의해 소중하게 보관되어 전해왔다.
1796년 7월에 외손자 김종걸이 김호연재의 「자경편(自警編)」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1814년 6월에는 증손며느리인 청송심씨가 김호연재의 한시 192제 237수를 『증조고시고(曾祖姑詩稿)』라는
제목으로 필사했다.
1834년 5월에는 5대손 송문회가 『안동세고부연주록』을 필사했다.
1977년 5월에는 9대손 송용억이 김호연재의 시 72제 91수를 묶어 『호연재 시집(浩然齋詩集)』으로 간행했다.
1995년에는 10대손인 송봉기가 김호연재의 시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를 간행했다.
이처럼 김호연재의 시들은 후손들 중심으로 집안에서 전해왔다.
이후 2000년대 들어와 세상이 알려지며 17~18세기의 여성문학사에 중요한 연구자료로 떠오르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김호연재의 유고집을 번역하여 출판함은 물론이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마당극 등이 공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