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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03.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1-11) 20여년 나의 삶과 신앙의 결실 ‘킹덤 패밀리
2011년 7월에 남편과 세 아이들, 우리 온 가족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다니며 기도하기 위해 살고 있던 미국 집을 떠났다. 그 여정 중 한국을 잠깐 들렀다 가리라 계획했으나 그것은 단지 우리의 계획에 불과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달랐는지, 우리 가족은 한국에 1년반 정도 머물고 있으며 이곳에서 무언가 해야 할 것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내가 한국을 떠난 것은 20년 전 일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돼 있었다. 도시의 모습이 온통 바뀌어 있어서 이전의 기억으로는 더 이상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모습도 참으로 상상 외였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미국에 20년 살다 온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곤 한다. 그리고 여자들이 왜 이리 예쁘고 고운지, 미국에서 온 아줌마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그런데 한국만 변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사이 나의 모습도 20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 여학생의 모습이, 20년 후 지금의 나의 모습이 돼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국의 변화만큼이나 내 인생의 변화 또한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주 한 묶음의 책이 배달됐다. 두란노에서 출간된 나의 이름이 적힌 ‘킹덤 패밀리’였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쳐다보고 있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허니, 그 책은 당신한테는 박사학위보다 더 소중한 책이야!”
어떻게 이 얇은 책을 감히 박사학위와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남편이 던진 한마디를 생각하며 책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남편의 말이 옳았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박사과정 중에 밤새워 공부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이 요구됐다. 그것도 무려 20년이 걸렸다.
나만 수고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결혼 18년 동안 나의 곁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를 몸소 살아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끈질긴 간섭하심과 인내가 있었다. ‘하나님도 지쳐서 그만 포기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끝까지 참고 견디셨다. 지난 세월 나를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 앞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세요!” 그렇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잠 16:9).
지난주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란에 나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게재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 정말 뜻밖이었다. 미국에서 온 평범한 아줌마인 내 삶의 어떤 부분을 나눠야 할지, 책을 쓸 때 못지않은 두렵고 떨린 마음이 앞선다.
되돌아보니,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결코 나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내게 그 역경의 고비들을 함께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실히 보내주셨다. 때로는 위로하고 힘을 주었고, 때로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대면하게 했고, 때로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내 인생에 찾아오셨던 수많은 분들, 그분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1) 20여년 나의 삶과 신앙의 결실 '킹덤 패밀리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2) 설교·기도만 들으면 눈물… "목사님, 독심술 하세요?"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3) 서울대·미시건대·결혼… 이 모두엔 주님의 섭리가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4) 박사시험 탈락 좌절 속에 '첫 아이 임신' 선물을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5) 동료들 앞에서 '회개 고백' 하자 용서와 새 삶이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6) "주님, 인생 십일조를 선교 위해 바치겠습니다"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7) 세 아이 엄마의 당찬 도전 "열방을 섬길 수 없을까?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8) 로렌 커닝햄 목사 "하와이 열방대학으로 오세요"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9) 열방대학서 만난 주님 '40년의 허물' 깨쳐주셔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10) "지구촌 가난한 이웃에 사랑을" MOM선교회 창립
*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11·끝) '온가족 열방 다니며 기도하라' 소명 기쁘게 순종
◇약력=△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 공학 학사, 석사 △미시간대 경제학 석사 △JAMA 세계지도자개발학교(GLDI) 강사 △MOM선교회 이사 역임 △‘킹덤 패밀리’(두란노) 저자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2) 설교·기도만 들으면 눈물… “목사님, 독심술 하세요?”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과정에 입학할 즈음, 삶에 딱히 물리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내면에서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그동안 인본주의에 푹 물들어 있던 자아가 영원한 진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1988년 1월 첫 주 내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다. 혹 교회라는 곳에서 나의 갈증을 해갈해 줄 진리를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기대감을 갖고 찾은 곳은 서울 상도동 장승백이에 있는 ‘두레교회’였다. 동네에 있던 절을 개조한 허름한 교회의 구석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말씀 후에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뜬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운 정장 투피스 치마 위에는 내가 흘린 듯한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코에서는 아직도 기다란 콧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일은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거의 매주 예배시간마다 동일한 일이 반복됐다. 그리고 아직 성경을 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 전해지는 목사님의 말씀은 나의 영을 강타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나 한사람을 위해 준비했을 거라는 착각이 들게끔 말이다. ‘저 목사님은 독심술을 하시는 분이신가 봐.’ 예배를 마치고 나면 나는 목사님의 눈길을 피해 숨곤 했다. 그 분은 내 얼굴만 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훤히 꿰뚫어 보는 분인 것 같아서였다. 그런 일이 1년 이상 계속됐다. 그러면서 그 교회에서 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됐다.
89년 여름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목사님 댁을 찾아갔다. 정근두(현 울산교회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은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식사로 갈 길 모르고 헤매다 이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탕자 같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식사 후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는 개인적으로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 목사님께 다짜고짜 질문했다. “목사님, 독심술 하세요?” 한참을 웃고 나신 목사님은, 그 분의 말씀이 영을 터치한 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나에게 찾아 온 것이라는 설명을 해 주셨다.
그 후로 내 관심사는 온통 주님 한 분이었다. 20년이 넘게 견고하게 자리잡은 세상의 가치관들이 말씀의 진리와 충돌하며 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행동이 갑자기 모두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석사과정 공부에 혼신을 다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변을 토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여전히 술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내 마음의 중심에는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셨다. 달라진 내면과 이에 반해 아직도 옛날의 습관이 남아 있는 내 모습에 갈등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당신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 대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입을 통해 거듭 선포되는 그 말씀이 나의 갈등에 대한 해답임을 알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전 습관이 아직 내게 남아 있을지라도 나는 더 이상 이전의 사람이 아님을 매일 나의 영혼과 사단에게 선포했다.
이제 갓 태어난 어린 내 영혼을 정 목사님은 풍성한 영의 양식으로 공급해 주셨다. 말씀만이 영원한 진리이자 나의 살 길임을 알기에 나의 영혼은 그 양식을 먹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김창선 사모님은 마치 엄마가 어린 아기를 돌보듯, 나를 옆에서 지켜보시며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 주셨다. 내 영혼이 거듭나도록 두 분은 영적 부모가 돼 주셨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3) 서울대·미시건대·결혼… 이 모두엔 주님의 섭리가
딸이 여섯인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구도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좋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만큼 기어이 성취하고야마는 내게 식구들은 혀를 내두르며 ‘악발이’라는 별로 고상하지 않은 별명을 붙여 주었다.
노력의 결과인지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학과에서 유일한 여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특혜를 누리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면서 나는 더 큰 세상에 나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미국에 가야겠어요.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거예요. 미국에 갈 수 있게만 해 주시면, 그 어떤 것도 다 감당할게요.”
딸의 결정을 들으신 나이 많으신 부모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게다가 딸을 유학 보낼 정도로 부유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두 분은 더더욱 걱정이셨다. 부모님의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비싼 학비는 무시한 채 유수한 명문대학 12곳을 골라 원서를 냈다. 어차피 내 능력으로 학비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담대해졌다. 봄이 되자 원서를 냈던 학교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하는데 배달되는 편지마다 입학을 승낙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에는 왜 그리 확고한 믿음이 있던지! ‘나는 미국에 꼭 가게 될 거야.’ 10개 대학에서 온 편지를 열어보는 내내 내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열한 번째 편지가 미시간대에서 왔다. 입학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입학 이듬해부터 장학혜택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당장 첫해 학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걱정하시는 엄마에게 “엄마 아무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거야!” 나는 국비장학생 시험을 보기로 했다. 서류전형, 필기시험 그리고 면접시험을 치르는데 내 실력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합격시켜 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7월 말 국비장학생으로 합격됐다는 통고를 받았고 1992년 8월 11일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미시간대에 도착하자 나는 한국에서 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공부에 몰두했다. 공부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5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으리라’는 각오로 학교와 교회만을 오가며 학업에 매진했다.
93년 겨울 예기치 않게 한 청년을 만났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드리겠다는 소원을 가진 의대 졸업반인 미국계 한국인 다니엘 박이라는 청년은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다짜고짜 청혼을 했다. 결혼? 전혀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성령의 강권함이 있었기에 나는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나의 삶에 예상치 않은 풍파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크리스천이 공부만 하면서 삽니까?”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지….’ 어리둥절한 나에게 그는 크리스천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을 축복하며 살아야 마땅하다는 신앙강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로의 삶의 모습이 많이 다르긴 했지만 우리는 약속대로 94년 11월 결혼식을 올렸고 이제는 서로의 삶을 더 잘 알게 됐다. 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와주고 축복하는 것에 익숙한 남편은 공부에만 혼신을 기울이는 아내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나의 변화를 위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4) 박사시험 탈락 좌절 속에 ‘첫 아이 임신’ 선물을
미시간대 유학생이 대부분이던 작은 학생교회를 섬기던 우리 부부의 신혼 아파트는 늘 학생들로 가득했다. 교회가 집이고 집이 교회였다. 한창 박사과정 공부 중이던 나와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으로 바쁜 남편이었지만, 1주일에도 몇 번씩 우리 집은 학생들이 모이는 장소가 됐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치 한 가족과 다름없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서 나는 또한 박사 논문을 쓰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세 과목을 통과하고 나서 이제 마지막 한 과목을 남겨두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을 치른 후, 시험결과를 받아 열어 본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편지에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다시 한번 확인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그저 깜깜할 뿐이었다.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동안 살면서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나는 낯선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직면해야 하는 참혹한 현실 앞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곁에 있는 남편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도리어 공부하고 살림하고 교회 섬기느라 초를 다투어 가며 분주하게 살던 아내를 도와주지 않은 무정한 남편이라는 분노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지?’ 앞날의 인생에 대한 아무런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이 소식을 알려야 하나.’ ‘공부를 안 하면 이제 무엇을 하며 살지.’ 다른 옵션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앞이 깜깜했다. 이전에 들었던, 미국 명문대에 다니던 한국 유학생들의 자살에 관한 기사가 떠올랐다. 그들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런 절망을 느꼈을까. 정말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사리를 분별 못하는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주님 안에서 나름대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학위를 받지 못한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인생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죽음’의 생각들이 가득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존재도, 미래라는 시간도 머릿속에서 사라져 가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내 인생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계셨다.
첫 아기의 임신소식! 내가 기쁨으로 고대하던 소식이 결코 아니었다. 내 인생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생명을 맡기시다니! 그러나 절망 가운데 죽음을 묵상하던 내게는 임신소식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됐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1997년 1월 태어난 첫딸 지원이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원이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소중한 벗이었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지원이에게 내 마음을 끝도 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아침에 출근하며 남편은 아기와 함께 집에 있는 내게 일러주곤 했다. 아기가 엄마의 웃는 얼굴을 많이 보아야 정서적으로 건강해진다고…. 그런데 나는 지원이에게 웃는 얼굴 대신 침울하거나 무표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긴 했지만 삶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여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가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계획이 무너지고 죽음과 같은 절망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생명을 낳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낳은 그 어린 생명은 이제 도리어 내 삶에 조금씩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5) 동료들 앞에서 ‘회개 고백’ 하자 용서와 새 삶이
1998년 가을, 클리블랜드에 사시던 시아주버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알래스카의 요셉’으로 불리는 분이 클리블랜드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꼭 와보라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목사님, 교회 청년들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향했다.
시아주버님이 말씀하신 그분은 대학 교수였다. 알래스카 경제를 부흥시켰다는 평판을 받는 까닭에 알래스카의 요셉이라는 별명을 얻은 김춘근 장로님이셨다. 그는 미국의 영적 각성을 위한 기도운동인 JAMA를 시작했고 미국에 이민 온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미국을 더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불처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후 그는 자신의 인생스토리를 나누었는데 그의 간증은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장로님은 가난한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 피땀 어린 노력 끝에 대학 교수가 됐다. 수고한 열매를 누리기 시작했을 즈음 그는 중병에 걸렸다.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하나님 앞에 다시 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지은 죄목들을 수십 장의 종이에 촘촘히 써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할 정도로 철저한 회개를 했다.
그의 간증을 듣는 동안 나의 내면은 부르짖었다. ‘하나님 저도 회개하고 싶어요.’ 그러자 주님은 그동안 ‘공부’라는 우상이 내 안에 깊이 숨어 있었음을 드러내셨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그날 진정으로 회개하며 이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에 두지 않으리라 고백했다. 남편에게도 그동안 분노의 마음을 가졌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과 남편에게 회개를 하고 나자 수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불면증이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고 우울증에서도 벗어났다.
그 다음 주 교회 청년부 앞에서 회개의 고백을 했다. 수년 동안 꽁꽁 감춰 두었던 죄를 다 떨쳐 버리고 이제는 정말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간증을 마치자, 뜻밖의 고백을 듣고 난 학생들은 하나둘씩 내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듣고 난 그들이 과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내게 사랑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99년 1월부터 목사님은 나를 청년부 담당으로 임명하셨다. 학생으로서 실패한 나에게 청년학생들을 맡기신 것이다.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 이제 어린아이를 둔 가정주부가 된 나의 30대의 삶은 이 귀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길 소망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선순위 넘버원이 돼야 한다는 것을 또한 잊지 않기를 원했다. 공부가 우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공부를 정복하고 다스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기를 기원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도록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거울이 되기를 소원했다.
하나님은 앤아버의 가장 작은 교회의 청년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다. 그들은 시간을 구별해 캠퍼스에 모여 기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를 섬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지역교회들을 섬기고 교회들이 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또 그들은 학업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나타냈고 졸업 후에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공부만 하기도 벅찬 그들에게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섬기는 것이 기쁨이 돼가고 있는 사이, 하나님은 그분의 방법대로 우리 가족을 준비시키시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6) “주님, 인생 십일조를 선교 위해 바치겠습니다”
김춘근 장로님을 만난 뒤 남편은 JAMA에 헌신하게 됐고 나는 교회에서 청년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정신과 레지던트와 펠로십을 마치고 미시간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남편은 주말이 되면 미국을 두루 다니며 한국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마음에는 온 가족이 함께 미국 땅을 밟으며 기도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생겼고, 때로는 우리 인생(시간)의 십일조를 선교를 위해 드리겠다고 서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진심으로 드렸던 우리의 서원은 그저 마음에 불과할 뿐 현실은 우리에게 단 몇 개월의 시간도 자유롭게 허락지 않았다. 남편은 여느 미국 학생들처럼 학부와 의과대학의 학비를 융자받아 공부했는데 졸업 후 매달 그것을 갚느라 힘들었다. 1년 혹은 몇 개월 직장을 쉰다는 것이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우리 부부는 형편이 되면 앤아버를 방문하는 선교사님들을 우리 집에 모시고 교제하곤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우간다의 배상호 선교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미국으로 사역을 옮겨 2004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왔다. 우리 집과는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살게 됐다. 10년 넘게 우간다에 살았던 선교사님 가족은 미국의 으리으리한 집들과 좋은 차들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 감격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총명하신 박숙경 사모님은 미국에서의 삶이 실상은 자유가 없음을 금세 꿰뚫어 보셨다. 자유! 내 인생의 시간을 마음대로 계획할 수 있는 자유가 정말 내게도 없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마치 족쇄를 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마음으로 서원하고 입으로 선포하지만 실상 나의 발은 주님을 위해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 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도전이 기억났다. ‘세상을 거꾸로 살라.’ 도대체 무엇을 거꾸로 살아야 하나? 주님은 내게 세상의 빚, 즉 크레디트(융자 등 신용시스템)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다 보니 미국생활 10여년 동안 어느새 많은 빚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말하는 세상의 빚이었다.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고, 심지어 자녀 대학 보내는 것도 대부분 빚에 의존하는 것이 미국의 삶인데, 그러면 하나님 이제 어떤 방법으로 살죠? 아, 미국을 떠나 살아야 할까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빚에 의존하지 않고 심플하게 사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순종하기로 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그런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모든 크레디트 카드를 잘라 휴지통에 버리고 이제는 크레디트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이 미국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밀려오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때 박 사모님이 생각났다. 전화를 든 채 할말을 잃고 있는 내게 “자매님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돼요.” 그리고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내가 지금 무슨 길을 가고 있지? 나도 잘 모르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한다는 사모님의 말씀에 나는 동의하고 있었다.
거의 1년이 되는 힘든 시간 동안 나는 사모님께 두 번 정도 전화를 드렸다. 그때마다 사모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영혼이 기진맥진한 내게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세상을 거꾸로 살기 위해 몸부림친 그 기간 동안 사모님의 존재는 내게 마치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와 같았다. 뒤돌아보니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모님의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족쇄로부터 자유한 나의 발은 이제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7) 세 아이 엄마의 당찬 도전 “열방을 섬길 수 없을까?
청년부를 담당하며 학생들이 학업에 매진하는 한편으로 열방을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은사와 재능으로 열방을 섬길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그러던 중 2004년 겨울, 앤아버 지역 청년들의 연합선교집회에서 그 방법을 찾았다.
미국 중서부에는 대학들이 많다. 그곳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다. 일리노이, 인디애나, 오하이오, 미시간 등지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몽골의 대학에 가서 봉사하는 단기사역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 70여명은 연초부터 모여 준비했다.
학생들을 보내기 전에 2005년 5월 내가 먼저 단기선교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관점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이후 예기치 않은 일들에 직면해야 했다.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편을 포함해서 식구들이 괜히 미워지기 시작했다. 악한 내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몽골에 선교를 하러 간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내 결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5월말에 몽골로 떠나리라는 생각에 경제적으로 어려우면서도 일찌감치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몽골로 떠나기 전 주일날 파송예배를 드렸다. 아마 우리 교회 최초의 단기선교였다.
어린 아이들 셋을 두고 단기선교를 떠나는 나를 위해 많은 성도들이 기도와 재정으로 후원해 주셨다. 주일날 파송예배를 마치자 멀찍이서 보고 계시던 할머니집사님이 다가오신다. “쯧쯧쯧…어린 아이들 놔두고 떠나니, 애∼고, 어미 마음이 워쩔꼬…. 걱정 말고 다녀오소. 내가 기도해 줄거구만.” 새벽기도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실 할머니의 모습은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였다.
교회문을 나서는데 지원(영어 이름:프랜시스)이의 친구인 모니카가 나를 불러 세운다. “프랜시스 엄마, 내가 내일부터 매일 밤 자기 전에 꼭 기도해 줄게요∼” ‘그래 모니카, 프랜시스 엄마 위해 기도하는 거 잊으면 안 돼!’ 밤마다 침대 곁에서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드리는 어린 모니카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외면하시겠는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몽골에서 지내는 2주의 시간은 20년보다 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지식으로 그들을 가르치는데, 나의 보잘것없는 것들이 어느새 너무도 귀한 것으로 탈바꿈돼 전달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을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몽골대학생들은 아줌마교수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부어줬다.
몽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였다. 얼굴에 콧물자국이 뚜렷한 여자아이가 도대체 내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인가 봐. 그래, 이 아줌마를 통해 듬뿍 사랑을 느끼렴.’ 아이를 옆에 앉혀놓고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이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있는 거라 생각하니. 아니, 이 아이가 내게 자기의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거지. 이 꼬마가 너를 축복하고 있는 거란다’
첫 단기선교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 마지막 날, 나는 그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엉엉 울었다.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땐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이 고마웠다. 특히 할머니집사님과 어린 모니카의 기도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몽골에서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8) 로렌 커닝햄 목사 “하와이 열방대학으로 오세요”
우리 부부가 로렌 커닝햄(예수전도단창설자, 열방대학총장)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2000년 시카고 한인세계선교대회에서였다. 그 후 우리는 2003년 JAMA대회에 주강사로 오신 그분을 3일 동안 가까이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때 목사님은 하와이에 있는 열방대학을 꼭 한번 방문하라고 권하셨다. 특히 남편의 전공인 타문화 이해에 관해 열방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제안하셨다. 같은 미국이지만 태평양을 건너야 가는 곳이라 엄두를 못 내었는데, 2005년 연말이 되자 왠지 마음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다녀와야 될 것 같았다.
2005년 크리스마스 한주 전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열방대학 관계자들을 만나 강의 계획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이곳에서 훈련을 받아야겠다는 강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세 아이와 함께 2006년 여름 5개월간의 DTS(제자훈련학교)를 받기위해 미시간 집을 떠났다.
하와이에 도착해 기대에 부풀었던 나는 며칠 후 깜짝 놀랐다. 학비를 포함해 다섯 식구의 경비가 예상보다 많이 들었던 것이다. 공과금 등 이것저것 생활 준비를 대충 마무리 했음에도 여전히 12000달러가 더 필요했다. 뭔가 실수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온 가족이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지’라며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남은 학비를 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의 가족들에게라도 연락할까. 그때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5:10)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는 묵묵히 기다렸다.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우리가 속한 공연예술(Performing Arts:PA) DTS에 우리의 상황이 알려졌다. PA리더는 50여명의 학생과 스태프를 불러모아 우리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그들은 기도를 하는 동시에 지갑을 열었다. 때로는 동전까지 모두 내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우리 사정을 알리기 시작했는 지 모르는 사람들도 동참했다.
마감인 목요일, 그들의 간절한 기도와 헌신에도 학비는 부족했다. 대학행정처는 다음 월요일까지 학비를 완불하지 않으면 등록할 수 없고 이곳에 머물수 없다는 통보를 했다. PA리더는 다시 50명을 불러 모았다. 자신의 돈을 다 내놓고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토요일 아침, 우리 리더의 함성이 전화를 통해 들려온다. “너희,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어제 우리 가족의 소식이 열방대학 안에 퍼졌고 그 소식은 DTS 전체를 담당하시던 커닝햄 목사님의 부인, 달린 사모님도 듣게 되셨다. 소식을 듣자, 달린 사모님은 바로 그 날 그중고차를 판 돈 9000달러를 우리에게 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했다. 커닝햄 목사님도 동일한 음성을 들으셨다. 월요일 아침 9000달러 수표를 건네주시며 달린 사모님은 너무 기쁜 모습이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PA학교에 속한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몇몇은 마약이나 갱단에 관여했다가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사는 이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는데 도리어 그 젊은이들의 눈물의 기도와 경제적 도움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공급만 의지하며 때론 자동차를 팔아야 하는 선교사들, 우리가 그들에게 헌금을 해야 하는데 그들의 순종의 헌금으로 우리의 필요를 넘치도록 채우셨다. 그 어느 것도 내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킹덤 경제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9) 열방대학서 만난 주님 ‘40년의 허물’ 깨쳐주셔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물질적 도움 덕분에 우리 가족은 2006년 여름 DTS(제자훈련학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3주째 됐을 무렵 자식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강의가 진행됐다. 내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어린 시절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진한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음속에서는 울컥울컥 서러움이 복받치고 올라왔다. 너무나도 생소한 감정들에 당황한 나는 혼자 조용히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어린 시절을 보여 주시기 시작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생기 있게 뛰놀았던 어린 소녀의 내면은 실상 너무 외로웠다. ‘저 애를 갖다 버릴까?’ 갓 태어난 다섯째 딸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서운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이에 맞서며 결심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존재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나는 최고가 될 거야.’ 그걸 이루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제야 공부가 왜 내 지난날의 우상이 됐는지 깨달았다. 자존감이 철저히 파손된 아이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중요한 생존수단으로 붙잡은 것이 바로 ‘학업’이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생을 너무도 귀히 여기시고 한없이 사랑하시는데, 왜 나의 지난 40년 인생은 그것을 경험하고 누리지 못했을까. 그 이유가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보다는 한국사회의 가치를 따랐던 육신의 아버지의 소리에 귀 기울였기 때문임을 알았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누구의 음성을 듣고 살겠니?”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살겠다고 대답했다. 세상이 나를 뭐라 평가한다 해도 나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그분의 자녀라는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기로 결단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그러자 하나님은 이미 지나간 나의 40년의 삶까지도 모두 구속해 주신다는 약속을 해 주셨다.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신 육신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딸만 낳은 아내와 여섯 딸들에게 평생 한번도 겉으로는 서운한 내색을 한 적이 없었지만, 아직도 남존여비의 가치관이 남아있는 사회에서 아들 없는 아버지로 살아야 했던 그 삶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아버지를 향한 하나님 긍휼의 마음이 내게도 느껴졌다. 아버지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내게 미쳤던 악한 영향들을 용서했고, 아들, 딸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를 용서했다. 그리고 악은 나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지난 40년의 아픈 경험을 통해 오히려 거짓에 묶여 있는 많은 자녀들을 자유할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됐다.
지난 40년 동안 나를 지탱해 주었던 거짓된 허물을 벗고 이제 내가 누구인지 성경 말씀으로 다시 일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내게, 마리아(내가 속한 공연예술DTS의 리더)는 마치 엄마와도 같았다. 그녀는 틈만 나면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계신지 알려주었고, 5개월 내내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내 자존감을 세워주고 있었다. 악한 거짓의 가치관에서 이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잡을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무슨 좋은 일, 칭찬할 것이 있으면 그녀는 잊지 않고 나의 이름을 거론했다. “애슐리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마리아, 고마워요.’ 상한 한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 그 엄마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10) “지구촌 가난한 이웃에 사랑을” MOM선교회 창립
2005년 가을, 회의 참석차 캘리포니아를 다녀오던 남편이 공항에서 급하게 전화를 했다. “당신이 꼭 만나야 할 귀한 분이 있어.” 흥분한 남편은 내가 만나야 할 그분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분을 만나러 시카고에 갔다. 그분은 눈가에 천진난만한 웃음이 인상적인 60대 중반의 소아과 의사인 최순자 박사이셨다. 젊은 시절 온 가족이 미국에 이민 온 뒤 틈만 나면 온 세계를 다니시며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의술을 펴 온 분이다.
한번은 아프리카 오지에 갔다가 열병에 걸렸는데, 펄펄 끓는 열로 며칠을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을 몸과 영으로 체험하셨다. 몸이 회복돼 시카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 뜨거운 사랑은 식을 줄 몰라 하루 종일 말씀을 붙들고 주님과 교제를 하던 중 성경 한 말씀이 그녀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2∼13)
“미국에서 순전히 남아 버리는 것만 모아도 온 세계의 굶주린 자들을 충분히 살릴 수 있어요!” 그 확신은 할머니 의사를 가만 두지 않았다. 제약회사들을 찾아가 남아도는 약품을 모으고, 회사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약들은 컨테이너에 실려 온 세계 선교지로 보내졌다. 내과의사인 남편과 함께 부부가 조용하게 시작한 일에 어느새 마음을 같이하는 몇 가족이 동참해 MOM(Messengers of Mercy)선교회가 탄생됐다. 할머니의 열정은 선교에 유용하다 싶은 것은 물질, 기술, 지식 할 것 없이 모두 찾아내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보내는 데 모아졌다.
선교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좋은 방법들이 없을까 고심하던 최 박사님은 내게 지난 몇 년간 몽골의 대학에서 여름학기 영어를 가르쳤던 것을 기억나게 하셨다. ‘그 짧은 경험을 가지고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주저하는 나를 최 박사님은 설득하셨고 주부인 내게 사역의 문을 열어주셨다. 2007년부터 뉴욕, 시카고, 캘리포니아 등을 다니며 선교지 영어교육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회 혹은 세미나를 할 때마다 난감한 상황에 처하곤 한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그동안 내 이름은 ‘다니엘 박의 아내’ 혹은 ‘미세스 박’이었다. 소개할 때 마땅한 타이틀이 없음에 당황해하는데, 어느 날 주님은 내게 자랑스러운 타이틀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FTM(Full-Time Mom·주부). 생명을 낳고 기르며 가정을 가꾸는 데 삶을 드리는 FTM을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이제는 어디서든 그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이제 어디서든 나를 ‘FTM’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부족하다 싶으면 ‘세 아이의 엄마’를 덧붙인다. 자랑스러운 정체성과 타이틀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MOM선교회였다.
2011년 여름, 온 가족이 열방을 다니며 기도하라는 하나님 음성에 순종해 미국의 집을 떠나기 전까지 최 박사님을 도와 MOM선교회를 섬기는 기쁨을 누렸다. 칠순이 훨씬 넘으신 최 박사님은 아직도 어린아이의 순수한 미소를 지닌 채 온 열방을 다니고 계신다. 두 손에 들린 가방에는 선교지의 영혼들을 위한 선물이 가득할 것이다. 한국 할머니에게 온 세계는 결코 넓지 않은가 보다. 온 세상 영혼들을 품기에 할머니의 품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애슐리 박 (11·끝) ‘온가족 열방 다니며 기도하라’ 소명 기쁘게 순종
‘온 가족이 열방을 다니며 기도하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 미국의 집을 당분간 떠나게 되었는데, 당분간이라고 생각한 기간이 벌써 1년9개월째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초가삼간이라도 내 집이 좋다’는 옛말이 있지만, 한국에서 다섯 식구가 지내는 동안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집을 제공해 주셔서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김포의 박 집사님 내외분의 아파트는 손님인 우리 식구가 거의 독차지하다시피하며 친정집보다 더 편하게 지냈다. 충남 아산의 기도의 집에서는 밤 10시가 좀 지나면 목사님이 우리 세 아이들에게 맛난 밤참을 사주셨던 것이 생각난다. 수양관에서는 담당 장로님이 미국에서 온 우리 아이들을 위해 소시지 반찬을 빠뜨리지 말라고 주방에 말씀하시기도 했다. 우리보다 더 우리의 형편을 걱정해 주시는 많은 분들, 그들의 배려로 이제 한국 전체가 우리에게는 ‘스위트 홈’이 됐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가족은 중요한 사명을 깨달았다. 특히 막내 조셉은 “기뻐하라, 무조건!”이라며 우리 킹덤 패밀리는 늘 기뻐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 크리스토퍼는 혹시 누가 기뻐하지 않는지 늘 식구들의 얼굴을 습관적으로 살피곤 한다. 무조건 기뻐하기로 결단한 마음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열쇠가 됐다.
수양관에서 지내던 지난해 어느 날 아침, 급히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수양관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가기 위해서는 하루 두 차례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다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간혹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2∼3대가 그냥 지나갔다. 중형 트럭이 다가오기에 손을 들었더니 감사하게도 속도를 줄이며 앞에 섰다. “이 차를 타시려고요? 똥차인데….” 얻어 타는 나보다 더 미안한 표정의 똥차트럭 아저씨. 짧은 거리를 달리는 동안 나는 그 똥차트럭을 운전하는 아저씨가 ‘선한 사마리아인’임을 깨달았다. 벤츠를 탄 것보다 더 기쁘고 감사했다.
뜻하지 않게 한국에 오래 머물게 되어 하나님께 질문했다. ‘왜 우리 가족이 미국의 집을 떠나 한국에 있나요?’ 대답 대신 주님은 내가 수년 전에 잠시 스치듯 드렸던 기도를 생각나게 하셨다. ‘당신이 영광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있고 싶어요. 주님, 꼭 불러 주세요.’ 나도 잊고 있었던 그 기도에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신 것이다. 나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는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하나님은 우리 가족이 한국을 향해 이 마음을 갖기 원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선하게 받을 수 있도록, 일찌감치 무조건 기뻐하는 연습을 시키셨나보다.
어느 부활절 아침 이 땅을 밟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의 순종을 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이제 2013년 부활절을 기다리는 이 아줌마가 그냥 맨눈으로도 너무도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하신다. 5000년 동안 묻혀 있던 작은 보석이 이제 드러나 온 세상을 밝히고 축복하는 모습,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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