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4.19혁명의 민주영령이 잠드신 곳입니다.
1960년 4월 독재와 불의에 묵숨을 던저 항거한 젊은
영령들의 애국 충절은 이 나라 민족주의 발전의 영원한
원동력입니다.
金泳三대통령은 취임후 민족사의 정통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義擧로 불리우던 4.19를 革命으로
격상시켰으며 1963년 이곳에 처음 자리잡았던 4.19묘지를
민주주의의 성지로 가꾸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3년 10월 20일 공사에 착수하여
묘역과 유명봉안소와 기념관, 그리고 각종 기념물을
새로짓거나 단장하고 이름도 4.19국립묘지로 바꾸어
1995년 4.19혁명35주년 기념일에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국가보훈처 서울특별시
"4·19 민주묘지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권력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던 민주 영웅들을 모신 묘역입니다.
권력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자유 민주 정의의 실현을 위해 몸을 바친 영령들이 이곳 민주주의 성지의 주인공들입니다.4·19 혁명은 민주적 시위를 통해 독재의 질곡을 물리치고 민의가 반영된 정치체제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선진 사례입니다. 선열들의 정신은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라는 헌법 전문의 표현대로 동시대인들과 후손들이 이어가야 할 자랑스런 유산이기도 합니다."-국립4.19묘지 홈페이지에서-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가 이뤄졌다. 186명이 사망하고, 무려 6천여 명이 다쳤다.
무자비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항거는 들불처럼 번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피의 화요일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 당시 투표소 곳곳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깡패를 동원해서 회유와 협박을 하고, 사람들을 3명, 5명씩 짝짓게 하여 공개투표를 지시한다.
개표 현장에서도 거침없는 부정이 자행된다. 쌍가락지표, 피아노표 등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개표 조작이 펼쳐진다.
심지어 수면제를 탄 닭죽을 먹여 상대 진영 관계자들을 재운 뒤 투표용지 바꿔치기까지 한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급사하면서 대통령 선거는 자유당 이승만 단독 후보로 진행됐다.
4·19혁명이 시작되기 직전 가장 앞서 시위에 나선 건 10대 청소년, 학생들이었다.
특히 2월 28일 대구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선다.
마산에서 이어진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한 이들도 17살 김주열을 포함한 학생들이었다.
김주열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4월 18일 고려대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해 시위를 하다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종로5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들에게 무참하게 폭행을 당했다.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다수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사건은 4.19 혁명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됐다.
4월 19일 서울시내 시위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서울 도심지에 모인 시위대는 이승만의 집무실이 있던 경무대를 향했다.
이에 경찰은 실탄을 발포하며 유혈 사태까지 발생했다.
100명이 넘는 시위대 인원이 사망했다.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강하게 맞섰다.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 선포와 함께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를 진압했다.
시위는 다시 소강상태가 됐다. 이미 자유당 정권에 대해 국민들은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이런 시위를 촉진시킨 사건이 4월 25일 일어났다.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이승만의 하야를 주장하며 시위대에 함께 했다.
나라 최고 지성들의 시위 참여는 여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시위는 활기를 띠었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계엄령으로 시내에 진입한 군대 역시 시위대를 향해 무력 진압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을 강하게 압박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주검은 마산상고 진학을 앞둔, 17살 김주열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애타게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의 노력으로 이미 마산 시민들까지 한마음으로
김주열을 찾기에 동참한 상황이었다.
시신을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특히 김주열의 눈에 박힌 포탄은 군사용으로 당시 경찰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최루탄과는
모양이나 기능이 달라 의혹이 더욱 증폭되었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취재하기 위해 마산에 급파된
부산일보 허종기자이다. 그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허종기자는 경찰보다 현장에 도착했다.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 등 김열사의 참혹한
사진을 찍었다. 부산일보는 이 사건을 전면에 실은 신문 수만부를 발행했다.
그 참혹한 사진은 서울의 주요 신문에 제공해 김주열 열사의 끔찍한 참사를 세상에 알렸다.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주검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4.19혁명 때 어린 학생들이 앞장 섰다.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 진영숙 양은 어머니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시위를 하러 집을 나섰다. 그는 집을 나선 지 4시간만에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진영숙 양은 집을 나서기 전에 홀어머니에 남긴 마지막 편지는 유서가 되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었다.
수송 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13세)군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날 4시 20분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는 데모대와 마주쳤다.
그는 가방을 앞에 놓아두고 박수 치며 응원했다. 경찰이 호통을 치자 잠깐 뒤로 빠졌다가 다시
대열 앞으로 나와 박수를 쳤다. 그때 전한승은 얼굴과 머리에 직격탄을 맞고 거리에 나뒹굴었다.
곧바로 수도의대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5시경 숨을 거두고 만다.
산수를 좋아하고 용감한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아이는 그렇게 죽었다.
발포현장에서 가까운 수송국민학교였다. 전한승 군은 4.19 최연소 희생자였다.
전한승 군이 다녔던 수송국민학생 1백여 명은 친구들의 희생에 분노해 시위에 나섰다.
그들은 탱크가 진주한 서울 시내에서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고 절규했다.
고사리손으로 어깨동무를 하고서 주먹을 불끈 쥔 아이, 눈 꼭 감은 채 뭔가 외치고 있는 아이,
겁먹은 표정으로 옆 급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 그들의 위로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그리고 그 대열에 분명히 있었음직한 한 소녀 수송국민학생 강명희 양은
역사에 길이 남을 시로 자신의 동료를 앗아간 4월 19일을 노래했다.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과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조지훈(趙芝薰)의 시 진혼가(鎭魂歌)이다.
鎭魂歌
-4월혁명희생학도위령제 노래-
趙芝薰
一. 가슴에 치솟는
불길을 터뜨리니
사무친 그 외침이
江山을 흔들었다
鮮血을 뿌리며
우리싸워 이긴 것
아! 民主革命의
깃발이 여기있다
가시밭을 헤쳐서
우리세운 祭壇앞에
울며 바친 희생 들아
거룩한 이름아!
고이 잠들거라.
祖國의 품에 안겨
歷史를 지켜보는
젊은 魂은 살아 있다.
二. 뜨거운 손을 잡고
죽음으로 맹서하던
티없는 그 정성을
하늘도 흐느꼈다.
더운피를 쏟아넣고
네가 죽어 이룬 것
아! 民主革命의
꽃잎이 만발했다
어둠을 밝혀서
네가 세운 共和國을
네 못보고 간 同志들아
꽃다운 넋들아!
유안진(柳岸津)은 시 <꽃으로 다시 살아>로 4월 영령을 추모하고 있다.
조각상 '정의의 불꽃'이다.
이 조각상은 부정과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 조각상 뒤쪽에는 3개의 무궁화잎을 반원형태로 표현하였다.
국립 4.19묘지 표석이다. '民主聖域'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친필이다.
민주영령들이 영면하고 있는 4.19민주성지이다.
1960년 4월 19일 어린 학생에서 대학교수까지 다양한 게층의
한국인들이 불의와 부정에 맞서 항거한 4월의 혁명이다.
4월혁명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후 일어난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기록된다.
참혹한 6.25 한국전쟁이 끝난지 7년도 채 안된 1960년이다.
전후의 혼란과 어려움 속에 한글세대가 앞장 서서 이룩한 4월 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는 '4.19혁명'은 아니다. 그저 '4.19'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1960년 4월 당시는 4.19혁명으로 명명하였다. 5.16쿠테타 이후 4.19의거로 바뀌게 된다.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도 4·19는 ‘4·19혁명기념일’로 정해져 있다.
4월 정신은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4·19혁명은 산업화와 함께 대한민국 발전 원동력의 하나인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