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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80년, 재위: 57년~80년)은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57년 유리 이사금
출생설[편집]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왜가락국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1],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가야의 역사를 다룬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인 탈해가 가야에 먼저 도래하여 김수로왕
석탈해캄차카 반도[2] 또한 석탈해가 인도 타밀인으로서 촐라 왕국[3][4]
24년, 남해 차차웅이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57년, 유리 이사금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59년 왜와 수교하였으며, 61년 마한
그러나 탈해 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 전시 상태였는데, 63년 음력 10월 백제의 다루왕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
66년, 백제67년이벌찬70년73년에는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74년에는 백제75년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
이와 같이 탈해 이사금 치세 때, 신라와 백제가 서로 2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沿革)도 전하지 않는 와산(蛙山) 봉산(烽山) 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고, 백제는 온조왕삼국지》(三國志)·《남사》(南史)·《북사》(北史)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라는 것이 신채호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
7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현재의 울산 울주구, 부산[5]
80년 가을
그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벌휴 이사금[6]
탄생 신화[편집]
탈해 이사금은 신라아진의선
8년(남해왕 5)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왕일본김알지가야
월성 석씨 선원세계도와 신라 김씨 선원세계도 등에 의하면 석탈해의 손녀 마정부인이 그의 양자격이었던 김알지가야국왕 김수로왕아달라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