寶白堂 金係行의 인물됨과 처신에 대한 一考 -‘淸白’의 실천과 후대 遺文을 통한 탐색-
정시열❙영남대학교 교수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목 차 1. 머리말 2. 유교적 의리에 기반한 ‘擧重若輕’의 실천 3. 不撓不屈에서 체화된 ‘難得糊塗’의 지향 4. 현실주의자로서 ‘聲聞過情’에 대한 경계 5. 맺음말
1. 머리말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은 안동인으로 비안현감 김삼근의 차남이다. 늦은 나이인 50세에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환로에 나아가 20년 가까운 세월을 관직에 몸담았는데, 외직인 고령현감에 부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삼사로일컬어지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만년에는 대사성과 대사간을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난 직후인 1498년 무오사화를 만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3차례의 옥고를 치르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가정적으로는 첫 부인인 이천 서씨와의 사이에 2녀를 두었으며, 서씨 사후 맞아들인 의령 남씨와는 5남을 두었다. 비록 보백당의 노년이 연산군의 폭정과 사화, 중종반정이라는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맞물려 있지만 그는 고향에 세운 만휴정을 기반으로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며, 화락하고 안정되게 가문을 이끌어 나갔다.
보백당이라는 호는 “우리 집안에 보물은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1)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유훈에 부합하는 보백당의 행적은 동서고금을 떠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그의 정신을 전파하고 계승하기에는 현전하는 자료가 영성하기 그지없다. 조정에 출사하여 시의적절한 간언을 올리고, 자신의 신념에 부끄럽지 않게 처신했으며, 문학으로도 숭앙받았다는 언급이 있는 만큼 유고가 많았으리라 짐작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멸되어, 지금은 驄馬契軸詩 2수와 연산군에게 올린 辭職疏 1편이 전부인 실정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기릴 만한 선조의 자취가 사라질 것을 염려한 후손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寶白堂先生實紀 가 편찬되어 전한다는 사실이다. 이 실기에는 보백당과 직간접으로 닿아있는 여러 기록들이 실려 있으며, 그를 추모하는 데 기꺼이 동참하려는 후인들의 정성과 의지가 배어있기에, 이를 통해 그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적 지향을 부족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보백당에 대한 연구는 논문 3편과 저서 1권이 있는데, 주로 보백당 선생실기 와 성종실록 , 연산군일기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논문에서는 보백당의 생애와 시문, 유학사상과 선비정신, 그의 행적과 사림들의 추모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저서에서는 종가, 후손, 기록, 묵계의 풍경, 제례와 음식, 종가의 미래 등 보백당에 대한 이모저모를 다각도로 고찰했다.
보백당은 청백의 표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인식되어 왔는데, 이들 연구에서도 이러한 점이 부각되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유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후인들이 남긴 기록에 대한 의존이 클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고에서는 실기, 실록 등의 자료와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보백당의 인물됨과 처신을 ‘擧重若輕’의 실천, ‘難得糊塗’의 지향, ‘聲聞過情’의 경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再究해 보고자 한다. 보백당은 고루하고 편협한 사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실질과 실제적 가치를 중시했음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청백한 삶을 강조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이해가 가능하다. 일신과 일가를 살찌우는 개인적 치부를 통해 수십 년의 부귀영화를 기약하기보다는 流芳百世를 목표로 청렴하게 처신하는 쪽이 오히려 현실적 가치가 있는 선택임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는 보백당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명실 상부한 인생을 살았으며, 자신의 바람대로 수백 년이 지난 후대에까지 후손들이 숭모하는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2. 유교적 의리에 기반한 ‘擧重若輕’의 실천 보백당은 유교적 의리에 바탕을 둔 거중약경의 정신을 실천했다. 거중약경은 무겁고 어려운 일을 가볍고 쉽게 처리함을 뜻하는 말이다. 「行狀」의 기록에 의하면 관직에 오른 보백당은 처음부터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자세를 물러날 때까지 견지했다. 年晩한 50세에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나 강직한 언사가 조정에 용납되지 못해 외직인 고령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국왕의 뜻을 거스르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간언을 피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립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부담스러운 상황에 망설임 없이 직면하는, 과단성 있는 모습에서 군신 간의 의리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보백당에게 있어 거중약경의 실천은 관리로서 당당히 처신했다는 증표였다. 그는 비록 늦은 나이에 환로에 들어섰지만 스무 성상의 기간 동안 三司의 중요 직책을 역임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사임한 적도 수차례였다. 진퇴를 분명히 하고, 소임에 전념하는 것이 신하로서의 마땅한 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걸맞는 목소리를 낼수 없다면 물러나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이러한 처신에서 실질을 중시했음을 알수 있다.
유교적 의리에 입각한 거중약경의 정신과 태도는 보통의 인심으로는 행하기 어려운 일을 실천하게 만들었다.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백당은 권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관료로서 이러한 강직함은 분명 필요한 자질이지만 그의 인생을 굴곡지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30대, 젊은 시절 묵계에 생활 근거를 마련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언제나 은거를 염두에 두었으며, 관직에 집착하지 않았다. 조정에서의 언사가 자유롭고 기휘하는 바가 없었던 이면에는 이러한 이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보백당은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나이에 정육품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강직함이 조정에 용납되지 못해 52세에 외직인 고령현감으로 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는 직위를 보전하는 일보다는 직무에 충실히 임하는 자세를 초지일관 지켜나갔다. 성종 21년 7월 25일의 기사를 근거로, 언관의 위치에서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왕에게 간언을 했는지 확인해 보겠다. 사간원 헌납 김계행이 와서 아뢰기를, “전일에 대간을 모두 바꾼 것은 침묵하고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인데, 이제 다시 쓰면 뒤의 대간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개와 아무개는 침묵하고 말하지 아니한 까닭으로 파면되었다
제가 곧 다시 쓰여지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홀로 곧은 말을 하다가 실패함을 취하겠느냐?’라고 할 것이니, 신은 곧은 말을 하는 선비가 나오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하였다. 보백당은 왕에게 대간의 재서용을 반대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 이유로는 언관으로서의 역할을 못 했기에 교체했는데 이를 다시 원상태로 되돌린다면 앞으로는 직언을 하는 사람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여기에 대해 성종은 자신이 짐작해서 처리했다는 말로 반대를 무마시키고자 했으나 보백당은 수긍하지 않고 계 속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이날 다른 기사를 보면 보백당이 정문형의 파직을 건의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정문형은 이조판서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정숙지를 司宰監正으로 추천해 올렸다. 이에 대해 보백당은 의정부와 육조의 낭관과 어질고 능하며 공로가 있는자 외에는 올려서 서용하지 못한다는 大典 의 규정을 근거로 들며, 이 일로 인해 서 탁란한 풍조가 일어날 수 있으니 정문형을 파직하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떠나 이처럼 왕에게 犯顔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신하의 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 예문에 제시되어 있듯이 그는 子思와 衛侯의 대화를 언급하며 대간의 재서용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김계행이 아뢰기를, “예전에 자사가 위후에게 이르기를, ‘임금의 나랏일이 장차 날마다 그릇될 것이다. 임금이 말을 내어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하고, 경대부가 말을 내어 스스로 옳다고 하면 사서인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침묵하고 말하지 아니하는 폐단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다시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다. 위에서 보백당이 말하고자 한 바는 윗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단정지으면 아랫사람은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는 대관들이 눈치를 살피며 간언을 소홀히 것은 심각한 사안임을 왕에게 거듭 상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한 전교를 보면, 성종은 보백당이 지적한 내용의 핵심을 제쳐둔 채 자사와 위후 를 언급한 저의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인지를 묻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이전의 대간이 침묵한 것보다 지금 보백당이 간언한 것이 더 나쁘다고 역정을 내기에 이르렀다. 군신 간의 대화에서 왕의 이러한 감정적 반응은 신하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하다. 위의 상황에서와 같이 신하의 충언에 대해 오히려 침묵을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 했으므로 간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란 힘겨운 일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백당은 자신의 직분을 놓치지 않는 고집스런 면모를 보였다. 김계행이 아뢰기를, “저번에 이창신을 다시 서용하였고, 하한문을 執義로, 정미수를 副正으로 제수하였으나 대간이 모두 한마디 말이 없었는데, 의정부에서 논박하였으니, 자못 국가에서 대간을 설치한 뜻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대간은 없어도 가하며 반드시 의정부로 하여금 모두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하였다
보백당은 이창신을 서용하고, 하한문을 집의로, 정미수를 부정으로 제수할 때 의정부에서는 논박했으나 대간들은 말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 대해 성종은 그 일은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며, 이어서 임금의 말을 경대부가 바로잡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경대부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대답하라고 요구했다. 보백당은 자사가 위후에게 했던 충고를 인용했을 뿐인데 성종은 그 말이 자신을 빗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추궁한 것이다. 보백당은 이러한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사건의 본질을 밝히는 방향으로 대답했다. 그는 대간이 머뭇거리며 구차스럽게 침묵한다면 국사가 그릇될까 두려워서 말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으며, 이에 성종도 논쟁을 그쳤다. 하지만 다음 예문에 제시된 바와 같이 보백당은 여전히 자신의 건의가 정당한 것이었음을 굽히지 않았다.
김계행이 아뢰기를, “어제는 침묵하였다고 하여 내침을 당하였는데, 오늘 또 서용을 명하셨으니, 오늘에 다시 쓰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전일의 내침은 그릇된 것입니다. 또 침묵을 지키는 폐단은 작지 아니하기 때문에 감히 마음에 품은 바를 아룁니다.”하였다 여기서 보백당이 강조하고자 한 바는 왕명이 일관성 있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날에는 침묵을 이유로 방출했으면서 오늘에 와서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면 앞서의 처사가 잘못임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그는 이전의 내침이 정당했다고 보는 입장이었으므로 왕이 쫓아낸 대간들을 재서용하겠다는 뜻을 거두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벼슬을 폐치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있으니 신하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그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논리적으로 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지위를 이용해서 신하의 간언을 막은 것이다. 성종의 완강한 고집 앞에서 보백당이 자신의 뜻을 끝까지 고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실록의 이 한 대목을 놓고 보더라도 그가 거중약경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왕과의 불화를 감내했으며, 직언을 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다.
보백당의 이러한 성품은 밀암 이재가 쓴 「行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국왕의 정치적 실책이나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는 무리들을 비판하는 등 삼사의 관리로서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성종이 재위해서 여러 현인을 등용할 때 그는 논의하고 건의하는 데 있어 평소에 간직한 모든 것을 아뢰고, 천재지변과 정치법도의 실책 등을 사안에 따라 일일이 들추어 논박했으며 아첨하지 않았다. 외척과 내폐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여 당대의 고질적 폐단이 되는 데 이르러서는 극언하고 논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나 권귀와 내폐의 반대를 받아 시행이 되지 못하면 바로 사직하고 귀향했다. 때로는 상소를 올려 체직을 원했으며, 일찍이 한 자리에 해를 채워 머문 적이 없었고 체직이 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신중히 출사하고 가볍게 물러나는 지조가 위엄이 있으니 누가 감히 침해했겠는가?
이 글은 보백당이 어떤 자세로 직무에 임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올곧은 성품은 점필재 김종직과의 교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그는 46세 때 충주향교 교수의 임기를 마치고 묵계에 들렀다가 풍산 사제로 갔는데, 이 해에 점필재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 해 보백당이 상산을 방문함으로써 두 사람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보백당과 점필재는 동갑이었으며, 서로의기가 잘 통했기에 점필재가 보백당의 경저를 방문하기도 하고, 함께 여러 날 종유하기도 했다. 보백당은 50세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나, 직언을 하는 데 있어 거중약경하는 성품이 화근이 되어 고령현감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한 해 전에 점필재는 보백당이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지방관으로 이동하는 꿈을 꾸고 記夢詩 1수를 완성했다. 시간이 지나고 실제로 꿈에서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자 점필재는 그제야 꿈 얘기를 하고는 고령으로 부임하는 보백당에게 贈別詩 2수를 써주었다. 그 시의 주된 내용은 고령의 순후한 인심과 수려한 자연경관에 대한 칭송, 그리고 조정의 번다한 일을 잊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는 권고였다. 점필재가 이러한 증별시를 쓴 것은 누구보다도 보백당의 성품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강직함이 용납되지 못해 심신을 상하는 것보다는 외직에 머물며 목민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도 가하다고 여겨서였다. 직위에 얽매이지 않고, 진퇴에 초연했던 보백당은 지방관으로서도 선치를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보백당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면 떠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연산군 원년인 1495년, 65세에 도승지로 임명받았으나 사의를 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왕이 윤허하지 않자 다시 극력으로 사양한 끝에 마침내 체직되었다. 도승지는 승정원의 으뜸 벼슬이었으나 자신이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기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옛날의 군자는 낮은 벼슬에 제수되어도 혹 해가 다하도록 힘써 사양하였으며, 죽을힘을 다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그 형세가 크게 불편함이 있어서 쉽게 처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지 얼마 안 되었으니 인재를 추천하고 기용함은 그 관계된 바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신과 같이 천박하고 졸렬한 사람이 어찌 오래도록 청반의 자리에 함부로 머물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자기를 헤아리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새로운 정사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어진 사람의 진로를 방해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산릉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대례도 잘 이행하였으니, 늙은이의 정성은 여기에서 마쳐야겠습니다.
김양근의 「晩休亭重修記」를 보면, 일할 만한 시기가 오면 벼슬에 개의치 않고 대단한 기세로 할 말을 다했으며, 의리에 맞지 않으면 독봉이 닥쳐와도 편안히 여겼던, 보백당의 당당한 성품을 칭송한 구절이 나온다. 이 글에서 김양근은 보백당이 출사해서 치열하게 살았던 데도, 벼슬에서 물러나 만휴당에 은거한 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보백당의 평생 행적을 보면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할수 있는 일은 사양하지 않았다. 비록 형식적인 겸사는 했을지언정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직위에 유혹되지 않고,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다. 세속적 명리를 중히 여기는 세인들로서는 실천하기 힘든, 이러한 일들을 가볍게 처리하는 데서도 그가 지닌 거중약경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대산 이광정이 쓴 「墓碣銘」을 보면, “나아가서는 직간했고, 물러나서는 없는 듯이 지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진퇴에 분명한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지위밖의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들은 후 그 과실을 시정해주지 못했음을 한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하로서의 도리를 말한 것일 뿐 자신이 왕의 잘못을 고칠 수 없었음을 잘 알았다. 위의 상소에서처럼 당시 상황에서는 도승지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맡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연산군 즉위 2년 후 時政의 잘못을 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미를 보고 일어선다는 말처럼 과감히 귀향하여 보백당에 거처를 정했다. 일신의 영화보다는 군신 간의 의리, 신하의 도리에 충실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3. 不撓不屈에서 체화된 ‘難得糊塗’의 지향 難得糊塗란 어리숙한 경지에 이르기가 어려움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대 중기에 양주를 무대로 활약해던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서화가 정섭은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숙하기도 어렵다. 총명함으로부터 어리숙함으로 들어가기는 더욱 어렵다. 집착을 놓아두고, 한 걸음 물러서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어찌 뒤에 올 복의 보답을 도모함이 아니겠는가.”12)라는 글을 남겼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본다면, 진정한 ‘糊塗’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욕심을 다스릴 줄 아는 절제와 남다른 총명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보백당이라는 당호에는 불요불굴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청백을 보배로 여긴다는 것은 권세와 俗利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뜻이니, 세력을 따라 毫釐의 이익에좌우되는 세인들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차원일 것이다. 시속에서는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소위 영리한 사람들은 영악하게
자신의 앞길을 도모했지만, 보백당은 눈앞의 이익을 딛고서서 보다 높은 정신적 경계를 추구했다. 大賢若愚라는 말처럼 일견 어리석어 보이는 그의 처신이 결과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여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그의 호도함이 실제적으로빛을 발한 셈이다. 「행장」에서 드러나듯 보백당은 본인의 처신에는 엄격했지만 남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각박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뜻과 어긋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인간적 신뢰에 바탕을 두고 대처했으며, 시속에 휩쓸리지 않고 신념을 굳게 지켜나갔다. 그는 기국이 크고 사리가 분명한 인물이었던 만큼 세속적 가치에 힘을 쏟았다면 오 히려 명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을 지양한 채 사심을 넘어서는 선택으로 일관했다. 이처럼 호도의 가치를 지향했던 보백당은 심신에 큰 상처를 안겨준 환로를 뒤로한 채 조정에 대한 어떤 원망도 없이 아름다운 풍광이 어우러진 만휴정에서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다음에 소개된 일화는 勢利에 초연했던 보백당의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된 내용은 국사가 된 조카 학조가 거동이 교만해지자 이를 단호하게 꾸짖었다는것이다.
선생의 조카 학조가 출가하여 국사가 되었는데, 왕의 총애에 기대서 위세를 떨칠 때였다. 하루는 성주에 이르러 장차 향교로 가서 선생을 뵐려고 하니, 목사가 이르기를, “국사께서는 수고로이 거동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교관이 오도록 청하겠습니다.”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선생을 맞이하려 했으나,선생이 가지 않았다. 국사가 부득이 가서 뵙자 선생이 책망하기를, “너는 왕은만 믿고 교만을 자행하느라 노숙을 찾아와 보지는 않고 도리어 노숙으로 하여금 너를 찾아오라 하느냐?”라고 하며 매로 꾸짖으니 피가 날 지경이었다. 이윽고 국사는, “숙부님께서 오랜 세월 과거에 고생하셨는데 만약 벼슬하실 뜻이 있으시면 힘써 드리겠습니다.”하고 말씀드리니, 선생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겠느?”고 하니, 국사는 두 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보백당은 31세에 식년 동당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32세에 성주교수에 임명되어 다음 해 부임했다. 그의 조카인 학조는 어려서부터 비범했는데, 일찍이 출가하여 당시 국사의 신분으로 성주를 방문했다. 이때 성주군수는 국사의 편의를 봐주고자 숙부인 보백당으로 하여금 인사하러 오도록 조처했으나 보백당은 이를 거절했으며, 뒤늦게 찾아온 국사를 매질하며 질책했다. 군수의 말만 듣고 집안 어른에 대한 도리를 소홀히 한 국사나 권세를 가진 승려의 눈치를 본 벼슬아치, 모두가 보백당의 눈에는 직위만 있지 사람 구실을 못하는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과 동년배인 조카를 그토록 심하게 매질했던 데는 이러한 심리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는 숙부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고자 관직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나, 도리어 이것이 보백당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과거 준비에 고심하던 숙부가 선뜻 수용하리라 생각해서,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의도로 솔깃해질 제안을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당장 목전의 이익에 도취되지 않고, 보다 넒은 관점에서 처신하는 보백당의 모습에서 비록 현실의 신분은 향촌의 교수지만 그 인물됨이 조정의 국사를 뛰어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속적인 자신의 제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담론을 전개한 숙부의 태도에 대해 국사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입을 닫아야만 했다.
이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관직에 진출한 사실을 두고 볼 때 당시 보백당의 처신이 어리석었음을 탓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이 멀더라도 올바른 도가 아니면 거절하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호도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가슴속이 협착하여 자기 소견만 고집하였다. 이 때문에 관직에 19년이나 있었으나 제생들이 즐겨 취학하지 않았고, 그 곡학이 사람을 상할까 두려워서 또한 시관으로 천망하지 않았다.”14)는 구절이 나온다. 시속인의 눈에 비친 보백당의 성품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백당의 한시는 현재 총마계축시 2수가 전한다.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사람들의 모임인 총마계에서 지은 시로서 칠언율시체다. 이때의 총마계첩은 46인의 성명과 관직 등 신상이 기록된 문서로서 전첩과 후첩이 있다. 다음에 소개된 제1수 에는 사헌부 관리로서의 각오와 다짐이 나타나 있다.
頭上峩峩柱後冠두상에 높고 높은 법관을 쓰고 나서 南臺深處共盤桓남대의 깊은 곳에 다 같이 머무르노라. 直敎松柏風霜老송백은 풍상을 견디는 것 가르치고 須信肝腸鐵石寒간장은 철석같이 차가워야 한다. 公事有嚴三尺法公私에는 엄정한 삼척의 법이 있고 交情無忝一罇懽交情에는 욕됨 없이 일배주 즐기노라. 他年榮落參商日후일에 물러나서 서로들 갈렸을 때 好把題名指點看명단을 가지고 가리켜 보리로다.15)
수련에서는 사헌부 감찰로서 근무하는 자부심을 표현했다. 특히 ‘높다’(峩峩),‘깊다’(深處)는 말 속에는 세속과 결탁하지 않아야 하는 직무상의 경계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함련은 풍상을 견뎌내는 송백처럼, 철석같은 마음가짐으로 일에 임하리라는 각오를 나타낸 부분이다. 특히 ‘風雪’과 ‘鐵石’이란 시어를 통해 자신의 굳은 결심을 구체화했다. 경련에서는 공사에 대한 엄밀한 구분을 노래했다. 공무를 수행함에는 엄격한 법적용을 생각하며, 개인적 사귐은 담백하게 하여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도록 하겠다는 맹세를 읊은 것이다. 마지막 미련에서는 훗날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서로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경력을 회고할 수 있기를 기약하며 시를 마무리했다. 이처럼 勢利에 좌우되지 않는 엄정한 판단으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평가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호도함이 필요했다. 하지만 보백당이 이처럼 엄격한 처신으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다. 난득호도의 가치를 지향한그의 성품은 사람에 대한 인정과 믿음을 중시했다. 이러한 점은 세상을 모나게 살지 않으려는 의지의 반영으로 보인다. 다음에 제시된 총마계축 제2수에서 그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纔罷輸心便背馳겨우 정을 나누다가 문득 서로 돌아서니 人間相許半相欺인간사 허여한 것 반은 서로 속임이라. 張陳樂死還忘信장의, 진여의 결사맹약도 신의 도로 잊었으며 管鮑云亡盡賣知관중, 포숙 죽었다고 친구끼리 다 팔았네. 雲雨難憑翻覆態운우가 번복함을 신빙하기 어려우나 蚷蛩惟保始終期거공은 시종일관 기약을 보전하네. 從今共把歲寒節지금부터 모두 같이 세한절개 지니고서 走向風塵任險夷풍진세상 달려가며 안위를 책임지세.
수련에서는 수시로 변하는 염량세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아냈다. 인간사 교제에서 반은 속임이라는 탄식 속에는 인정에 대한 회의감,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가는 만남에 대한 허무감이 묻어나 있다. 함련에서는 친구 간의 결사맹약이나 돈독한 우정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내던지고마는 세인들의 행태를 비난했다. 소중한 가치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에 대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경련에서 蚷蛩은 駏蛩이라고도 하는데 駏虛와 蛩蛩이라는 전설상의 짐승을 뜻한다. 이 두 짐승은 사이가 좋아서 항상 같이 다니므로, 친한 관계를 비유할 때 사용한다. 여기서 보백당은 雲雨와 蚷蛩의 대비를 통해 총마계원들끼리라도 신의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리고 미련에서는 혹한에도 변치 않는 歲寒孤節의 절개를 바탕으로 험난한 세상사를 함께 헤쳐 나가자는 제안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이 작품에는 세상인심과 관계없이 交誼와 情理를 중시한 보백당의 면모가 잘드러나 있다. 이처럼 현실적 가치의 유무를 떠나 사람 간의 신뢰와 정의를 우선시 하는 것은 난득호도의 철학이 갖는 의미를 자각했을 때 실천 가능한 일이다. 보백당의 이러한 면모는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10년이나 섬긴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눈물을 지었다는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 옛 군주에 대해서조차 그 불행을 외면하지 않을 만큼의리를 간직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우직한 면모는 권구가 쓴 보백당선생실기 의 「후서」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이 글에서 보백당은 한결같은 정성으로 절조를 지켜나간 인물로 묘사되었다. 중용 에서는 “국가에 도가 있으면 곤궁할 때의 마음을 변치 않으며, 국가에 도가 없으면 죽을 때까지 지조를 변치 않는다.”고 하였다. 오직 곤궁할 때의 마음을 변치 않아야 하니, 그러므로 치세에 살면서는 신중히 벼슬하고 망설임 없이 물러나는 절조를 가져야 한다. 오직 죽을 때까지 절개를 변치 않아야 하니, 그러므로 위태로운 조정에 서서는 좋고 나쁜 상황을 똑같이 여기는 지조를 가져야 한다. 군자가 수양한 바를 이것으로 알 수 있으니, 보백당 김선생에게서 대개 증험하였다. 아아, 선생은 본래 방강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학문의 힘으로 성취하였기에 청백해서 더럽혀지지 않았고 강직해서 지킴이 있었다.
중용 에서는 화하되 흐르지 않으며(和而不流),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中立而不倚) 군자의 처신을 칭송하면서, 사람됨이 이 정도는 되어야 나라에 도가 있건없건 간에 의리와 지조를 변치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이 후서의 저자인 권구는 이러한 군자에 부합하는 인물로 보백당을 지목했다. 주지하다시피 보백당은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사화를 만나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생사를 가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죽어간 동료들과 운명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여겼다. 몇 차례의 파란이 지나간 후 연산군의 폐위 소식이 전해 오자 신하로서 군주의 과오를 바로잡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는 신하로서의 도리를 쉽사리 저버리지 않는 夷險不二의 절개를 가진 인물이었다. 풍전등화의 처지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으며, 본인에게 위해를 가한 이에게도 정서적인 측은지심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은 보백당이 지향한 난득호도의가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소한 시비를 가리고 작은 이끗을 따지는 각박한 세상인심에 따라 처신해서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임에 틀림없다.
다음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백당의 성품은 陽强에 가까웠지 결코 유약하지 않았다. 그의 강함과 부드러움은 모두가 한 근원, 즉 굳센 성품에서 나왔으니, 그는 남들이 소유하지 못한 큰 덕을 지녔던 셈이다. 난득호도의 철학에 부합하는 삶은 이처럼 강직한 기질에서 말미암았다. 문왕이 역괘에 계사를 할 때 扶陽抑陰을 했으니, 대개 양강은 군자에게 속하고 음유는 소인에게 속하는 것인데 반드시 양명하고 강정한 덕이 있은 후라야 큰 재앙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욕심이 없을 수 없는데 오직 양강한 후라야 욕심을 없앨 수 있다. 선생과 같은 이는 욕심에 굽히지 않으신 분이다. 연산군이 난정할 때 세 번이나 투옥되어 신문을 당해도 겁내지 않았으니 선생의 강함이 아닌가. 소인의 세력이 불타오르는데 엄한 말로써 배척했으니 선생의 강함이 아닌가. 네 임금을 차례로 섬기는 동안 시세가 여러 번 변해도 시종을 변치 않으셨으니 선생의 강함이 아닌가. 비유하자면 좋은 옥이 세찬 불 속에서도 타지 않고,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는 것과 같다.
이 글에서는 개인적 사욕을 극복한 보백당의 성품에 대해 서술했다. 그 역시 인간으로서 욕심이 있었겠으나, 여기에 매몰되지 않고 사심을 제쳐둔 채 맡은 바 일의 始終을 한결같이 처리했다. 이처럼 그의 양강한 성품은 눈앞의 이익을 무시할수 있는 힘이 원천이 되었다. 이재가 쓴 「행장」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아무리 재능과 지혜를 겸비한 자라고 하더라도 득실과 영욕에 이끌리게 되면 물질을 추구하는 데서 배회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비굴해지며,마침내 욕심에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보백당은 이런 유혹을 물리쳤기에 ‘보백’이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일생의 행적에서 드러나듯이 보백당은 영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명리를 구하고 사익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모자란 듯한 그의 처신은 난득호도를 설명한 정섭의 말처럼 복의 보답을 받았다. 국문을 받는 鞫廳의 자리에서 매번 구원받은 일이 그것이다. 정적들로부터 공격받으며 앞으로의 사태를 예측할 수 없는 순간마다 평소 그의 성품을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성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해서 그렇게 처신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백당이 지향한 난득호도의 철학은 그로 하여금 위기의 순간을 극복할 수 있게 했으며, 늦은 나이에 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좋은 관운의 바탕이 되었다.
4. 현실주의자로서 ‘聲聞過情’에 대한 경계 보백당은 실제보다 과장된 명성이 부끄러운 일임을 알았기에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을 통해 이 점을 경계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상황과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고자 하는 현실주의적 면모라 할 수 있다. 또한 지나친 명성에는 탐욕이 뒤따른다는 점을 인식했기에 ‘보백’이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처신했다. 가문에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있으면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오히려 근신하라는 유훈을 자손들에게 남김으로써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집안에는 영예로운 일이 남들의 질시를 받을수 있고, 더 나아가 화의 근원이 될 수도 있으니, 언행을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 생각한 까닭이다. 이러한 성문과정에 대한 경계 속에는 실질적 가치를 중시한그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보백당은 허명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문중의 영화를 과시하지 않았다.
자신의 본질은 타인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은 그의 관심사 밖의 일이었다. 過猶不及이란 말처럼 지나치게 기리는 것은 오히려 허물이 될 수도 있기에 보백당은 타인의 찬사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학자이자 관료로서 자기 수양을 위주로 한 爲己之學을 추구했으며, 오로지 자신의 본래면목을 밝혀 나가는 데 집중했다. 세화를 피해 길이 은거할 장소를 찾았다는. 「晩休亭上樑文」의 내용처럼 보백당은 세상 잡사와 평판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염원했다. 보백당은 주역 「건괘」의 효사인 ‘亢龍有悔’의 가르침대로 올라감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옴이 있음을 심중에 새기고 언제나 몸가짐을 신중히 했다. 그는 성문과정을 경계하고 명실상부한 삶을 지향했으며, 인욕을 넘어서 겸손하게 처신함으로써 후대에 빛나는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러한 성품에 대한 기술은 실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중종이 즉위한 후 그의 만년이 안정되고 평화로웠음을 보여주는 다음 대목은 1511년, 81세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내외 종친이 모두 모여서 헌수를 올리는 때 내외 자질손 중에 대소과에 급제한 자가 10여 인이나 되고, 관직에 있는 자가 7인이나 되었다. 문전은 하인들로 뒤덮이고, 당실은 하객으로 가득했으니, 보는 자마다 부러워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선생은 더욱더 경계하고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연달아 과거에 이름을 올린 것은 또한 다행한 일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더러는 나를 보고 복이 많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번창함이 두려움을 더할 따름이니 너희들은 몸가짐을 삼가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정성을 다할 것이며, 경박한 일로써 죽음을 앞둔 늙은이에게 욕됨이 없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가문의 번창과 자손의 영달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보백당은 경계를 잊지않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연만한 50세에 급제하여 20년 가까운 세월을 관직에 있으면서 인간사에는 희비가 늘 함께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현재의 영화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인식하고 있었기에 삼가는 자세는 그 의 인격 속에 내면화되어 있었다. 특히 벼슬에서 물러난 뒤 겪었던 세 차례의 옥고는 군신 간의 관계나 조정에 대한 신뢰 등 여러 면에서 그의 가치관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노년의 심신에 상처를 남긴 이 일은 긍정과 부정, 모든 면에서 그의 처신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자손들을 향한 보백당의 경계 속에는 명예를 쌓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가진 것이 늘어갈수록 지킬 것도 많아지듯이, 다복하다는 말을 들을수록 심중의 부담도 커져 갔다. 향인들의 칭송이 높아 질수록 두려움이 더해진다는 말에는 그러한 속내가 담겨 있다. 결국 타인의 칭송과 비난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실을 추구해서 명성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당부의 핵심인데, 이러한 데서 허식을 배격하고 실질을 중시한 그의 면모를확인할 수 있다. 다음 글은 보백당이 87세로 考終하면서 남긴 유계의 한 부분이다. 그는 상장례에서 겉치례에 신경을 쓰다 보면 오히려 슬퍼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옅어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주위로부터 냉소와 조소를 살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임종한 뒤 자손들이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고 진정으로 愼終追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한 당부를 했던 것이다. 돌아가실 무렵 유계에 자질 및 종손 삼당공 영을 불러 앉히고 말씀하시길,“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은 선대의 소중한 가르침이니 너희들은 하나하나 준수해서 교만하거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실추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상제례는 오직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할 것이지,낭비나 허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또한 나는 경연에 오래 있었으나 임금을바로잡지도 시세를 구하지도 못했다. 살아서 이미 세상에 보탬이 없었으니,죽어서도 마땅히 검박히 장사지내고 다만 성명이나 써서 무덤에 표시할 것이지 절대로 남에게 거짓으로 찬미하는 비문을 청해서는 안 된다. 잘한 일도 없는데 명예를 얻는 것은 내가 무척 부끄러워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보백당의 유훈에는 허명과 허식에 대한 경계가 뚜렷하다. 그는 실질과 실속이 사라진 자리에는 空名과 虛名이 대신할 뿐이며, 이것은 후대의 평판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백당은 세평에 좌우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생전의 명예와 사후의 기림을 모두 중시했으나 여기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삶을 가치 있게 여겼다. 유훈에 제시된 청백, 공근, 효우, 돈목은 실천하더라도 당장 빛이 나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진가를 발하는 덕목들이다. 위의 유훈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보백당이 관료로서의 자신을 평가한 부분이다. 그는 오랜 세월 국가의 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시정을 개선하지도 못했음을 토로했다. 이것은 자신이 모셨던 연산군의 무도와 권신내폐들의 방종을 시정하지 못한 데 따른 심중의 회한을 술회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경연에서 정사를 논하고, 언관으로서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두고 봤을 때 올바르게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심중의 미진함을 고백한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도 명실상부를 중시했던 그의 현실주의적 면모가 나타난다. 다음 글은 묵계서원 내에 자리한 누각인 읍청루를 올리면서 쓴 「挹淸樓上樑文」의 일부이다. 밀암 이재는 이 글에서 누각의 낙성을 축복하고 아울러 보백당의 인품을 칭송했는데, 이 가운데 성문과정을 경계했던 보백당의 성품을 확인할 만한 구절이 등장한다.
또한 보백당 김선생은 옥설 같은 정신과 빙상 같은 자태로 승지와 사간을 거치면서 건의한 고견이 많았고, 또한 폭군과 임금을 노하게 했는데 그러한 데서 안위를 한결같이 여기는 절조를 볼 수 있다. 그 남은 향기가 지 금까지도 사람들을 덮으나 소리 끊긴 훌륭한 말씀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채 이삼백 년이나 가라앉아 있었으니 누가 이러한 풍도가 있었던것을 알겠는가. 근처의 사대부 집에서는 모두 그 명성이 알려지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돌아보건대 이 묵계의 깊은 마을은 실로 보백당이 은거하시던 곳이다. 밀암은 보백당 사후 150년이 지나서 출생한 인물이다. 그는 이 글에서 보백당의 유문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옥천 조덕린은 「寶白堂實紀序」에서 이처럼 원고가 전하지 않는 것이 보백당의 평소 뜻과 관계있음을 지적했다. 성문과정을 경계했던 그의 평소 지론대로 유고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훗날 본인의 치적이 과대 포장되는 일을 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 인해 후대에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유풍마저도 일실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밀암과 옥천의 글 속에 나타나 있다. 보백당이 이처럼 겸손한 처신으로 자신을 관리했던 것은 허언과 과장으로 치장된 수식이 후대에 더해질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시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과 할 만한 일을 했을 뿐 여기에 대해 찬사를 구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현실에 충실한 삶의 자세를 일관되게 지켜왔으며, 그 어떤 세속적 명리에도 흔들림 없이 스스로에게 정직한 생을 살고자 노력했다.
5. 맺음말 대산 이상정은 「齋樓重建上樑文」에서 “만물은 융성하면 훼손되니, 큰 건물이 기울어지려는 것을 탄식하도다. 기물은 오래되면 새것을 구하니, 아름다운 집이 벌써 우뚝이 솟았음을 축하하노라.”25)라는 말로 그 서두를 장식했다. 우리가 보백당 사후 500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그에 대해 공부하는 이유를 이 말 속에서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동적이며, 즐거워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정적이며, 장수한다고 했다. 조정에 출사했을 때와 향촌에 은거했을 때의 행적을 고려한다면 보백당이야말로 이에 부합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염량세태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환로에서 파란을 겪는 가운데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처신하며 천수를 누렸다. 보백당에게는 1868년, 고종 때 定憲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여기서 ‘定’은 진실되게 행하여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며, ‘獻’은 충을 향해 나아가서 덕을 쌓는다는 의미이다.27) 그가 직접 편액에 쓴 “우리 집에 보물은 청백뿐이다.”라는 글과 그 실천을 보더라도 시호와 그의 사람됨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비록 유고가 일실되어 전해지는 것이 영성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품은 黨色을 초월해서 후인후학들의 마음을 흥기시키는 바가 있었기에 사후 200년도 더 지난 19세기 중반, 철종 무렵에 亞卿인 이조참판으로, 그리고 한 해 뒤에는 正卿인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본고에서는 보백당의 인물됨과 처신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 첫째가 거중약경의 실천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주저하는 일을 그는 가볍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출사해서는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해 적극적으로 간언했으며, 물러나야 할 시점에서는 한시도 지체함이 없었다. 이러한 그의 처신은 군신 간의 유교적 의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둘째가 난득호도의 철학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난득호도에서 호도는 실제적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총명하지만 그 총명함을 감춘 채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영악하게 첩경을 찾는 대신 비록 멀리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대도를 택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기국이 크고, 그 어떤 위력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가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셋째가 성문과정에 대한 경계였다. 그는 실제보다 과장된 명성을 수치로 여겼으며, 내세울 만한 일이 있더라도 어제나 겸손한 처신으로 일관하며 마음을 단속했다. 그는 타인의 칭송에 초연하고자 했는데, 더욱이 칭송의 대상이 현재의 모습과 관계없는 것일 때는 떳떳하지 못한 일로 여겼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현실 그대로의 모습에 충실하고자 하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정리한 보백당의 처신은 단견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유풍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것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은 보백당이 시간을 초월해서 후인들의 정신 속에 살아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의 학덕과 자취를 추모하고자 창건한 묵계서원이 오늘날까지 후학을 포용하듯 보백당 역시 세상을 향해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다.
<참고문헌> 論語 , 中庸 , 周易 朝鮮王朝實錄 寶白堂先生實紀 , 寶白堂文集刊行所, 1984 鄭燮, 鄭板橋全集 , 臺北 新興書局, 1956 김시황, 「寶白堂 金係行 先生의 生涯와 儒學思想」, 동양예학 제29집, 동양예 학회, 2013, 1-67쪽 박명숙, 「寶白堂 金係行 先生의 學問과 文學」, 동양예학 제29집, 동양예학회, 2013, 93-116쪽 최은주, 「嶺南士林들, 보백당을 추모하다」, 동양예학 제29집, 동양예학회, 2013, 69-92쪽 -----,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 종가 , 예문서원,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