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길을 걷듯 황홀했던, 낙동강 세평하늘길
1. 일자: 2021. 12. 24 (금)
2. 산: 체르마트길, 낙동강세평하늘길
3. 행로와 시간
[도로끝(10:55) ~ (출렁다리) ~ 승부역(11:03) ~ (거북바위 / 태극물길전망대 / 외나무다리) ~ 양원역(13:02) ~ (용골쉼터 / 비동승강장 / 비동2교 / 금강송오솔길 / 비동1교) ~ 와우곡(14:11) ~ 분천역(14:45) / 13.39km]
< 체르마트 트레일을 준비하며 >
기억은 일러준다. 여정을 마치고 나서는 귀경길, 영주에서 풍기IC로 들어서며 바라보는 소백산은 거대한 병풍 같은 장막이다. 잠시 숨이 막혀온다. 그러나, 이내 험상궂지 않은 얼굴과 넉넉한 품으로 나를 배웅하며,‘다음에 또 오그레이’라고 말한다. 경상도 북부지방은 늘 아련하고 편안한 땅이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승부역~분천역 낙동정맥 트레일을 떠나려 한다. 찻길을 머리에 그려본다. 풍기에서 고속도로를 나와 영주를 지나 봉화 땅에 들어선다. 눈에 익은 곳이다. 봉성, 법전, 소천을 거쳐 석포에 들어선다. 고속도로 200km에 국도와 지방도 70km. 꽤 멀다. 겨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시골길을 달리며 차창으로 보이는 오지의 풍경이 기대된다.
오늘 걸을 길은 크게 세 구간으로 나뉜다. 월간산 기사를 바탕으로 길의 대강을 살핀다. 꽤 오래 지난 글이지만 머리에 그림이 그려진다.
‘낙동강변 비경길’은 승부역에서 양원역까지 5.6km 거리로, 계곡처럼 아담한 낙동강 상류와 철길을 따라 걷는 코스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최상류의 모습은 소박하고 아기자기하다. 왼쪽으로 오미산(1,071m)이, 오른쪽으로는 비룡산(1,129m)이 굵은 선을 자랑하며 장쾌하게 펼쳐지니 눈의 화첩에는 남성적인 산과 여성적인 강이 어우러진 산수화 한 폭이 고스란히 담긴다. 양원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역사면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기차역이다.‘체르마트길’, 양원역을 지나 비동승강장까지 2.2km 이어지며, 산골마을과 작은 고개를 넘어 아름다운 물길을 만나는 길이다. 분천역이 스위스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을 맺은 걸 기념해서 명명되었다, 오솔길을 걸어 언덕을 지나자 눈앞에 강과 철교가 어우러진‘엽서 같은’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비동~분천 구간’은 4.3km 거리로 흐르는 물 따라 굽이굽이 계곡 따라 가는 도로 길이다. 총 12km, 넉넉잡아 4시간 거리다.
< 희망사항 >
길을 나서며 한 해를 보내며 나를 되돌아보는 여행을 하자고 마음 먹는다. 돌이켜보면 코로나, 올림픽, 대선 정국 등이 어수선하게 스치듯 기억에 남고 훌쩍 지나가 버린 세월이다. 버스에 몸을 누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지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는 그림도 그려 보아야겠다.
< 승부역 가는 길에 >
오랜만에 나서는 평일 원거리 트레킹, 아침 하늘은 잔뜩 흐리다. 성사 여부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버스는 만원이다. 대장은 말이 많다. 자고로 말이 많으면 흠도 보인다. 중언부언, 나를 되돌아 본다.
풍기를 거쳐 봉화 땅에 들어선다. 차창 밖을 유심히 바라본다. 빠르게 지나는 그저 평범한 시골마을 풍경뿐, 추억을 연결시킬 그 무엇도 없다. 현동을 지나 태백 방향으로 접어들더니 석포에서 길을 튼다. 석포역을 지나며 외길을 만난다. 멀미가 날 정도로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가 이어진다. 교행이 불가한 긴 길을 버스는 용케도 잘 간다. 창 밖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마치 어느 먼 나라 오지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차가 진입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가서 멈춘다. 승부역은 멀지 않았다. 오지도 이런 오지는 흔치 않을 듯하다. 군말 없이 운전해준 기사님께 감사하다.
< 낙동강변 비경길 >
11시가 다 되었다. 트레킹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라는 승부역에서 시작되었다. 역으로 가능 길, 강 건너 벼랑이 벽처럼 솟아있다. 초입부터 근사한 풍경이다. 도보교가 보인다. 붉은색이 주위 시선을 압도한다. 다리 위에 서니 출렁거린다. 먼 여정이 설렘으로 바뀐다. 다리 건너 승부역은 조용했다. 어묵을 파는 음식점을 내려서니 코스가 나뉜다. 직진하면 배바위고개를 넘어 비동으로 연결되는 산길이다. 좌측으로 방향을 튼다. 강변길이 이어진다.
강가에 가볍게 쌓인 눈 위로 서리가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 근사하다. 그늘이 추워 보여서 망설이다 삼각대를 세운다. 절벽 밑으로 낙엽이 쌓여 고운 갈색 빛을 뿜어낸다. 눈서리, 강물, 바위, 낙엽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그만이다. 은은한 색감이 좋다. 날씨도 맑고 걱정했던 바람도 잔잔하다. 걷는 재미에 푹 빠질 여건이 모두 갖추어진 날이다.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는 사이 일행들은 모두 앞서가 버렸다. 느긋한 마음으로 돌다리를 건넌다.
돌아보는 눈에 보이는 건 온통 산과 강물뿐, 산이 특히 깊다. 모든 게 세평이란 말을 실감한다. 거친 돌길을 걷고 몇 차례 오르내림을 거쳐 강과 철길 사이의 견주로(비상로)를 걷는다. 이런 길은 처음이다. 낯설더니 이내 익숙해진다. 가로등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명소인가보다. 강 건너 경치가 근사하다. 바위와 소나무가 있는 강가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 산하의 자랑이다.
벼랑에 놓인 데크를 걷는다. 이 외지고 험한 곳에 정성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기차가 지나간다. 석탄을 싣고 가고, 관광열차도 달린다. 색다른 경험이다. 다시 강가로 내려선다. 모래밭을 걷는다. 사구도 있다. 거친 물살이 이 고운 모래를 만들었구나, 그 오랜 세월을 가늠해 본다. 아득하다. 범상치 않은 너럭바위 위에 선다. 검푸른 강물 위로 얼어 붙고 눈에 덮인 물길 풍경이 더해진다. 이 강물은 멀리 흘러 부산 바다로 내려갈 것이라 생각하니 아득하고 아련한 생각이 든다. 이곳 세평에서는 시간도 강물도 조용히 흘러간다.
눈사람이 반겨주는 전망대 위에 선다. 조망이 시원하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강가 풍경에 익숙해져 간다. 양원역이 멀지 않았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햇살이 쏟아지는 철로 옆 시멘트 길을 걷는다. 겨울 햇살이 작은 마을에 내려앉는다. 양원역이다. 철로에 서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꿈길을 걷듯 황홀한 2시간이었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일 질 몰라도 내겐 수만의 추억으로 남을 곳이다.
< 체르마트길 >
이제부턴 체르마트길이다. 강가로 내려선다. 강 건너 마을에 정자와 카페가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역사면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기차역이라던 양원역 주변에도 개발 열풍이 부나 보다. 6km 넘게 보아온 낙동강은 또 새로운 모습으로 나와 길을 함께 간다. 돌다리를 건넌다. 물살이 세다. 부서지는 물길을 멍하니 바라본다. 절벽에 선 나무들은 언제나 늠름하다.
두 개의 다리를 건넌다. 철길 따라 걷는다. 기차가 오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길에 변화가 많아진다. 강가를 걷다 다리를 건너고 철길을 따라 걷고 다시 도로를 만난다. 쉼터 공터를 지나자 오늘 여정의 첫 제법 긴 오르막이 나타난다. 좁다란 오솔길에는 낙엽이 켜켜이 쌓여 있다. 수 만의 걸음이 만들었을 비탈 소로에서 또 긴 세월을 느낀다.
비동승강장은 어딘지도 모르게 체르마트길은 끝이 난 것 같다. 긴 돌다리를 건너자 찻길이 이어진다. 잔뜩 기대했던, 낯선 이름의 길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실제는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오늘 트레킹의 주인공은 세평하늘길이다.
< 비동 ~ 분천역 구간 >
긴 도로길이 이어진다. 왜 비동~분천역 구간은 고유 이름이 없는지 알겠다. 자랑할만한 그래서 길을 특징 지울만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흐르는 낙동강만이 벗이 되어 주었고, 분천역이 멀지 않았다는 가느다란 희망만이 있을 뿐이다.
길은 넓은데 발길을 멈추게 변화가 없었다. 캠핑장으로 쓰였을 너른 숲이 보인다. 긴 아스팔트 길에 지쳐갈 무렵, 낙동강세평하늘길의 11선경 와우곡이 등장한다. 소나무 군락에 쉼터가 있다. 강 넘어 벼랑 풍경이 멋진 곳이다. 잠시 쉬어간다.
그 후로도 꽤 한참을 걸어 분천역에 도착한다. 역사 부근은 산타마을로 변신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커다란 소나무 트리 장식이 눈에 들어온다. Merry Christmas! 그래 춥지만 소중한 계절이다.
< 에필로그 >
예상보다 긴 여정이었다. 굳이 평하자면 승부역~양원역은 A, 낙동강 비경길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길이었다. 양원역~비동은 B, 실제가 이름값을 하진 못한 조금은 아쉬운 구간이었다. 비동~분천역은 버스 타러 가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C급이었다. 만족은 기대와 현실과의 차이다. 세평으로 대변되는 외진 곳이 실제는 진수였고 대박이었다.
분천역 앞 국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뜨끈한 국물이 속을 데워준다. 커피 한 잔의 여유도 부려본다. 사진을 지우고 보정한다. 지난 4시간의 나의 흔적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있었다.
사진, 그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마력에 오늘도 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