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회 尹祥源과 투사회보
光州민중항쟁 '全南大 3총사', 朴寬賢.尹한봉.尹祥源. 이중 5.18민중항쟁기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尹祥源(당시 30세)이다. 5.18 현장을 끝까지 지킨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 全南大 학생회장으로 민주화대성회를 주도, '광주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朴寬賢도, 70년대 광주재야운동권의 핵심이었던 尹한봉도 5월17일 예비검속령을 피해 도피중이었다.
항쟁기간 내내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한편 도청 항쟁지도부 대변인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尹祥源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탈환 작전대 최후를 맞이한다. 朴寬賢이 5.18광주민중항쟁의 불을 당기는 도화선이었다면 尹祥源은 항쟁기간 내내 全南도청을 지키면서 광주항쟁을 마무리한 인물이었다.
光州시민들은 최근 항쟁 당시 온몸을 바쳤던 尹씨를 기려 尹祥源상을 제정, 기념하고 있다.
尹祥源(본명 開源)은 1950년 光山군 임곡에서 尹석동씨의 3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북성중과 살레시오고를 거쳐 71년 全南大 정외과에 입학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가 사회현실에 눈을 뜬 것은 75년 군제대후 녹두서점 주인 金相允씨등 민청학력 세대와 만나면서부터. 이때부터 그는 유신체제의 질곡속에 신음하는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한다. 78년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 서울 신림동 지점에 취직했지만 6개월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귀향,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光州시 西구 光川동 한남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취업, 노동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가 야학운동에 뛰어든 그는 당시 光川동에서 노동자를 상대로 야학강의를 했던 들불야학 朴琪順(여)의 간곡한 권유 때문. 그후 尹시는 朴琪順과 함께 들불야학을 이끌며 70년대 후반 광주지역 노동운동과 야학운동을 주도했다.
이때 朴寬賢도 尹씨의 권유로 야학운동에 참여했다. 全南大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 당선됐다. 尹씨는 자신이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입었던 양복과 넥타이.구두 등을 朴씨에게 빌려주며 朴씨를 독려했다고 한다. 朴씨가 도피생활중에도 尹씨에게서 물려받은 옷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이지역 재야인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
尹祥源은 朴寬賢.朴琪順 등과 함께 광주지역 노동야학의 선구, 들불야학을 이끌다 광주민중항쟁을 맞게된다.
尹祥源하면 떠오르는 것이 투사회보.5.18 당시 광주시민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는 尹씨와 들불야학의 작품이었다.
6월18일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이 자행되자 들불야학팀은 그 참상을 외부에 알리고 시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위해 19일부터 유인물을 제작, 시내 각 지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21일 계엄군의 만행을 보다못한 시민들이 총궐기, 계엄군을 光州외곽으로 몰아냈다.
尹씨는 계엄군을 光州외곽으로 몰아낸 21일 시민 승리의 날로 규정하고 유인물에 처음으로 '투사'라는 제호를 붙여 제작했다.
투사회보는 21일 1호를 시작으로 25일 밤 8호까지 발간됐다가 26일부터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10호까지 발간했다.
그러나 마지막호였던 10호는 27일 계엄군의 진입으로 미처 배포하지 못한채 압수되고 말았다.
尹씨와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었던 田龍浩시(당시 22세.全南大 경제학과 3년)는 "투사회보는 5.18의 상황이 정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악선전에 휘말려든 폭동으로 왜곡되는 것을 보고 올바른 진상을 알리기 위해 출발했고 19일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라는 이름의 호소문이 투사회보의 효시가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투사회보의 효시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지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그악무도한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가 하나로 단결, 유신잔당과 全斗煥 일파를 영원히 추방할때까지 싸웁시다. 최후의 일각가지 단결하여 싸웁시다. 그러기 위해 5월 20일 낮 12시부터 계속해 광주 금남로에 총집결합시다"
투사회보의 탄생에는 光川동 들불야학 이외에 당시 광주재야의 정신적 메카 녹두서점(光州시 동구 壯동 구청산학원 옆)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尹씨는 18일 밤 녹두서점을 찾아 예비검속으로 검거됐던 녹두서점 주인 金相允시의 부인 鄭賢愛씨(당시 29세.교사)와 광주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유인물 제작을 논의했다.
외부와의 연결통로였던 녹두서점에는 전국 각지에서 광주의 상황을 묻는 전화가 쇄도했고 주인 金씨의 연행에 염려의 성금이 답지했다.
鄭씨는 광주의 실상을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성금의 대부분을 尹씨에게 쾌척했다.
들불야학팀은 이 성금을 기반으로 들불야학의 교실이었던 光川동 시민아파트 앞 양철문 가게에서 본격적인 유인물 제작에 들어갔다.
그들은 문안작성조(尹祥源.田龍浩) 필경조(朴용준), 등사조(金성섭.羅명관.尹순호), 물자조달조(金경국)로 나누어 매일 적게는 5천-6천부, 많게는 4만부까지 투사회보를 찍어냈다.
제작된 투사회보는 주로 노동자들을 통해 녹두서점과 광주시내 광주시내 각지역으로 배달됐다.
투사회보는 21일부터 지방신문 발행이 완전히 중지된 상태에서 격문이나 가두방송이 지니는 일시적인 성격을 극복한 활자매체로서의 지속성.논리성, 변두리 지역까지 보급될 수 있었던 전면성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시민의 신문'이었다.
들불야학팀과 투사회보를 제작했던 尹祥源은 27일 계엄군의 도청탈환작전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다 장렬히 산화했다.
짧지만 굵게 살다간 尹祥源, 그는 82년 2월20일 들불야학시절 그와 함께 활동하다 연탄가스로 숨진 '노동자들의 누이' 朴琪順씨와 영혼 결혼식을 올리고 망월묘역에 영면하고 있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