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歸天 全文
年報
1930년 - 정월초하루(陰曆) 부 천두용, 모 김일선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출생
1934년 - 귀국하여 진동에서 지냈다.
1940년 - 일본으로 다시 출국
1943년 - 간산 초등학교 졸업
1945년 - 중학교 2년 재학중 해방을 맞아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한다.
1946년 - 마산중학교 3학년 편입
1949년 - 중학교 5학년 재학중 담임이면서 국어교사 김춘수를 통해 구름과 장미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한다.
강물이란 시를 써서 담임 선생님에게 보여드린다. 강물이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文藝誌에 추천된다
1950년 - 마산중학교 6학년 한국전쟁 발발함. 마산경찰서에서 시행한 통역관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미국통역관으로 활동
1951년 - 부산에서 서울상대 입학
1952년 - 갈매기 모윤숙 추천으로 文藝誌 추천 완료
1954년 - 서울상대 4학년 2학기 때 학업포기
1964년 - 김현옥 부산시장 공보비서로 2년간 재직함
1967년 - 7월8일 김형욱 중정부장 발표로 동백림사건 연류자로 발표된다. 서울상대 동문 강빈구로부터 독일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던 사실 듣었고 그로부터 막걸리 값으로 한 번에 5,000 - 10,000원을 받아 합게금 5만여원을 썼는데 간첩자금
수수죄로 몰려 중앙정보부에 구금 3개월, 교도소 3개월 고문과 고초를 겪은 후 선고유예로 풀려남
1970년 - 친우 김관식 사망에 현대문학에 김관식 입관을 발표
1971년 - 봄 이후 종적이 사라짐, 시인 민영 등이 앞장서서 유고시집 제목을 새라 짓고 조광에서 출간하지만 서울시립정신
병원에 행려자로 오인되어 입원중인 것이 발견됨.
1972년 - 병원 입원 중 지극히 간호한 친구 목순복의 여동생 목순옥과 김동리선생 주례로 결혼식
1979년 - 74년도 까지 작품 모아 주막에서라는 제호로 믿음사 출간
1982년 - 종로3가 연동교회 3년간 다님
1984년 - 시집 천상병은 시인이다 오상출판사 출간
1985년 - 강태영씨 도움으로 부인 목순옥 인사동에 찻집 귀천개업. 천상병 문학선 구름 손짓하며 도서출판 문성당에서 출간
1987년 -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 일선출판사에서 출간
1988년 - 만성 간경화로 춘천의료원 입원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소생함, 이외수와 인연을 맺음,
그리고 이후부터 맥주 2잔 이상 마시지 않음
1989년 - 중광스님, 이외수와 함께 시집 도적놈 셋이서 도서출판 인의에서 출간
1990년 - 중광스님 삽화를 넣은 산문집 괜찮다 쾐찮다 쾐찮다 강천출판사에서 출간
1992년 - 시집 새 도서출판 답계에서 출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믿음사에서 출간
1993년 - 4월28일 오전 11시20뷴 의정부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 8월에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도서출판 청산에서
출간
1994년 - 60년대 신문과 잡지에 수록된 작품과 90년 -93년 사보에 수록된 수피을 모아 천상병 수필 유고집 한낮의 햇빛을
보았느냐 영인에서 출간
1996년 - 평민사에서 천상병 전집을 시와 산문으로 나눠 출간함
千祥炳 詩人의 시와 삶의 질곡을 대면한 것은 6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화가 이 중섭과 시인 이상에 대한평전을 어렵게 구하여 읽던 시절이었다. 천재화가와 천재 시인의 삶을 밤샘해 가며 읽은 후 空超 오상순 시인의 시와 생애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귀천이란 시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을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를 통하여 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 후 관련된 책을 수소문하여 구한 후 밤을 새우며 정독을 하면서 시인의 영혼을 헤아릴 수 있었다. 마음에 담아두기에 좋은 삶의 표본처럼 각인된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여러 권의 수필집을 읽으며 삶을 소풍이라 표현한 시와 더불어 솔직함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늘 말했던 가난은 나의 직업이라는 의미가 아름답게 다가 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무소유라는 개념을 심어 준 이는 바로 천상병 시인이셨었다. 그 다음이 법정 스님이셨으며 이후로는 성프란치스코 사부셨다. 특히청소년기에 접하게 된 천상병 시인의 삶과 시는 울림이 너무 컸었다.
세 분 다 영혼의 빈터를 닮은 자연에서 위로받으며 새와 더불어 무소유의 속으로 성큼성큼 마음 걸음을 옮기셨던 분들이셨다. 손이 없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새는 한톨의 씨앗으로 자족하는 겸손과 가난과 자유의 상징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천상병 시인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