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 대중선도의 심리학(3)> : 괴벨스와 히틀러의 최후
1. ‘바르바로사 작전’이라 불리는 나치의 소련 침공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괴벨스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수상쩍은 강대국”이 벌이는 이중게임을 막기 위해 공격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며 ‘금권정치와 볼세비즘’과 벌이는 투쟁임을 선전 활동을 통해 강조했다. 나치의 소련 공격은 동유럽의 민족주의에 대한 지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치는 동유럽인들을 멸시했으며 그들의 독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치의 이익이었다. “나치는 현실적이므로 자민족에 이익이 되는 행위만을 할 뿐이다. 그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이 이 지역에서 독일의 질서를 엄격하게 관철하는 것이다.”
2. 독일의 소련 침공은 초반의 성공과는 달리 진행될수록 어려움에 빠졌다. 점정 강해지는 소련의 저항과 빠르게 닥쳐온 겨울은 독일에게 심각한 고통을 가져왔다. 히틀러는 전쟁 상황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거부했고 호전적인 상황을 가져올 신호에 대하여 집착했다. 하지만 독일의 소련 공격은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항복함으로써 실패했다. 이후에는 오히려 소련의 독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대소전격전의 실패는 영국의 ‘대륙단검’을 빼앗고 곧이어 모든 물자를 동원 영국으로부터 강화나 항복을 이끌어내려던 나치의 전쟁계획을 좌초시켰다. 그럼에도 괴벨스는 자기기만적인 태도로 패배를 인식했다. “독일 민족이 이를 통해 깊이 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성을 극복하는 믿음은 이번에도 불가능한 사건을 일으키는 기적을 가져올 것이다.”
3. 소련의 침공과 병행하여, 아니 소련 침공의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오히려 더욱 집착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말살정책은 극한으로 치달렸다. 유대인에 대한 모든 재산과 권리를 빼앗은 후에 유대인들을 절멸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악용될 ‘반사회 분자들의 판결을 집행하기 위한 이송’이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여 시행되었다. 본격적인 아우슈비츠 격리 수송이 시작된 것이다. 나치의 끔찍한 인종주의는 소련과의 전쟁에서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음을 육군참모부의 보고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육군참보부의 보고서에는 “슬라브 민족의 열등함과 그 민족의 멸종 필요성에 대한 독일측의 구호들이 소련 사회에까지 이르렀고, 이것이 붉은 군대의 저항의지를 강화하고 스탈린이 주장하는 ‘조국전쟁’에 점차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안겨주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4. 전쟁의 위기에 닥쳐오자 괴벨스가 오랫동안 주장했던 ‘국민총동원’이 시작되었으며, 괴벨스는 국민전권위원이 되어 총동원 정책을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패배주의자들에 대한 강경조치가 시행되었고, 국방군의 효율적인 관리와 제한적인 행정적 조치가 이루어졌으며 징집면제자들에 대한 징집면제 해제가 강행되었다. 진정한 전시상태로 바뀌었던 것이다. 국민들에 대한 총동원과 함께 전쟁의 승리와 총통의 신화를 강조하는 선전활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기적의 무기가 준비되고 있으며,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전달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선에서의 패배와 타격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섭리의 믿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범주로 도피해야만 했다.
5. 전쟁 말기가 되자 히틀러의 피로와 광기 그리고 집착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 히틀러에 대한 암살시도(발퀴레 작전)이 실패하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전쟁에서 커다란 전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빠졌고 전쟁의 승리에 대한 일시적 망상에 집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가 점점 멀어져 가자 히틀러는 국내의 시설을 파괴하고 살인을 지시하면서 자신의 패배와 ‘제국의 종말’을 동일시하는 정책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파멸의 분위기는 이제 바꿀 수 없는 진실이 되고 있었다. 소련의 베를린 총공격을 방어할 독일군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히틀러와 괴벨스는 독일군의 와해소식과 베를린 함락될 위기라는 치명적인 소식을 접해야 했다. 탈출에 대한 제의를 거절하고 히틀러와 괴벨스는 자살을 준비한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비참한 죽음을 보게 되자 항복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었다.
6. 괴벨스는 자신의 여섯 자녀는 구하고 싶었지만 아내인 마그다는 동반죽음을 결심하고 있었다. “총통과 나치즘 이후에 오는 세계는 살만한 가치가 없으며,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련다. 우리가 죽은 뒤에 닥칠 삶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그의 부인 에바 브라운과 동반자살하고 다음날 괴벨스 또한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괴벨스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있고 비밀이 있지만, 청산가리를 통해 죽었다는 사실은 진실로 밝혀졌다. 그의 불탄 시신은 소련군에게 인계되었다.
7. 괴벨스의 삶은 철저하게 히틀러에 대한 찬양과 충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독일의 위대한 영광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그것을 위해 방해되는 모든 것은 제거의 대상일 뿐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개인적인 친분까지도 망각하게 하였고 전쟁 말기가 되자 더욱 잔혹한 방식으로 시행되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믿음은 비합리적인 방식인 ‘총력전’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전쟁 말기에 수많은 히틀러 측근들이 배신하였지만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와 최후를 함께 했다. 괴벨스에게 히틀러는 ‘인생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치와 전쟁 수행의 주요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히틀러의 끝없는 정복 전쟁, 동부의 생활권과 자원 공간을 갖춘 ‘대독일 제국’이라는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을 만든 사람은 바로 괴벨스였다.”
첫댓글 - 잘못된 생각이 광기에 빠진 결과의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