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스케치용 도구인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초기 카메라인 다 게레오 타입을 시작으로 현대 디지털카메라까지 모두 카메라는 옵스큐라처럼 어두운 공간에 작은 구멍을 뚫어 굴절하는 빛을 맺히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생물의 안구와 원리가 같고 단지 안구는 망막과 시신경을 사용해서 사물을 모둠지만 카메라 옵스큐라는 사람이 직접 그려서, 필름 카메라는 필름에 반응시켜서, 디지털카메라는 이미지 센서에 노출시킨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원리는 같습니다.
앞에서 말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라틴어로 '어두운(obscura) 방(camera)'이라는 뜻은 어두운 방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으면 반대쪽 벽에 외부의 풍경이 비치는 것을 카메라 옵스큐라가 발명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기본적으로 사진기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애당초 '카메라 Camera)'라는 단어도 원래는 단순히 '방(房, room)'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이지만 카메라 옵스큐라 때문에 사진기를 지칭하는 단어로 정착했다고 봐집니다. 19세기에 첫 등장한 다게르식 사진기 또한 카메라 옵스큐라에 감광물질을 이용하여 상을 각인시키는 것에 가까웠으며 이후 발전하여 현대의 렌즈 사진기로 대체하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고안하였다 알려져 있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러한 원리는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유클리드는 이미 버들가지로 만든 바구니의 작은 홈을 통과한 빛이 바구니 안에 밖의 풍경을 비추는 것을 관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눈에서 빛이 나와 사물에 닿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러한 관찰은 빛이 우리 눈에 들어와 사물의 상이 눈에 맺히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황철이란 인물이 1883년에 '중국 상해에서 최초로 카메라를 들여왔는데, 카메라를 이용하면 후대에 기록이나 자료를 남기는 데 편리하겠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집에 사진관을 세우고, 날마다 카메라를 들고 도성을 돌아다니며 저잣거리 풍경이나 궁궐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황철에 대하여 인물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야조(冶祖), 호는 어문(魚門)·무명각주(無名閣主). 한성부(漢城府, 지금의 서울) 출생. 자헌대부 규장각 제학윤수(潤秀)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1882년 가내에서 운영하는 함경도의 고진동 광산에 사용할 신식 광산 기계를 인수하기 위하여 중국을 여행하였습니다. 북경을 거쳐 톈진(天津)에 머무를 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잡혀온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청덕국광무회사(駐淸德國鑛務會社)로부터 광산 기계를 인수하여 탁송한 뒤 상해(上海)까지 여행하였습니다. 상해에서는 중국인 좌소인(左紹仁)으로부터 사진 촬영술을 익히고 사진 기계를 구입하여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그해 말에 귀국하였습니다. 1883년 대안동 사저의 서책 사랑을 개조하여 촬영소를 설치하였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로 지목된 그의 사진관을 격노한 군중이 난입하여 사진 기재를 파괴하였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1885년 다시 상해에서 사진 기재를 구입하여 일본의 주요 사진관을 시찰한 뒤 1886년에 귀국하였습니다. 영선사였던 김윤식(金允植)의 집을 매수하여 사진관을 개설하였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갑오경장 때까지 개화파로 지목되어 벼슬길이 막혀 사진과 서화에 전념하였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 및 갑신정변에 연루된 인사들에게 등용의 문이 열리자 1895년 6월 포천군수로 첫 관직을 받았습니다. 포천군수 재직 시에 송금법(松禁法)을 어긴 국왕의 근친에게 장형을 가한 사건이 수구파에 의하여 문제가 되자 사임하였습니다. 1896년 국왕이 아관파천하고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에 망명하게 됩니다. 1906년 사면령이 내려져 의친왕을 모시고 귀국, 농상공부 협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경상남도관찰사를 거쳐 종 2품 가선대부가 되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에서 주는 관직을 모두 거절하고 일본에 건너가 서화에 전념, 각지를 순례하면서 전람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사진기를 구입하여 최초로 사진을 도입하였으며, 초상사진뿐만 아니라 중요한 기록 사진을 다수 촬영하여 오늘날 그 시대를 조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남겨 주고 있습니다. 그의 촬영 범위는 서울의 중요한 요소뿐만 아니라 대궐의 건물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명성이 높아지자 의금부에서는 간첩죄로 체포하여 투옥시킨 일도 있고. 또 궁내의 도화서를 혁파하고 도화서원으로 하여금 사진을 학습시켜 인물을 그리는 대신 사진으로 그 일을 대신하도록 국왕에게 상소하였습니다. 그의 사진 세계는 초상 사진과 기록 사진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진 기술이 일천하였던 그 당시로 본다면 가히 한 세계를 이루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고 여겨집니다. 또 서화가로서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사진에서 떠난 이후입니다. 1913년부터는 일본을 무대로 하여 많은 전람회를 가지며. 약 10년간 일본 각지를 순례하면서 수십 회의 전람회를 열어 이름이 만인에게 알렸습니다.
2차 대전 중에 군사용으로 사용되던 잠망경, 포대경 현미경 등등을 만들며 광학기술을 발전시켰던 기업들은 정전 이후 카메리 신업을 주도하는 회사들로 거듭 나 의료용 내시경 사업이나 카메라 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대중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2010년을 정점으로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카메라 사업은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고성능 카메리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스마트폰에 달린 카메라를 이용하여 촬영 후 카톡이나, 블로그 등 소셜네트워크에 올리면서 컴펙트 카메라 시장부터 치명타를 받아 시장이 축소되기 시작하면서 상위군 카메라 시장까지 위협받게 됩니다. 또한 더욱더 듀얼렌즈를 이용하여 심도를 옅게 만드는 스마트폰과 초광각 렌즈 구성으로 나오는 스마트폰까지 이어지자 기존 카메라 시장은 더욱더 위축될 것 같습니다.
사진은 기계가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감성으로 찍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단지 자기의 기능만 빌려 줄 뿐입니다. 구도와 배경 그리고 찍는 자의 감성을 서로 어울림의 효과로 빛이 그려내는 것이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