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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셈의장막재건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이스라엘을 향한 바른 자세 -
마지막 때에 제2의 선민 한국 백성은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까지 구원의 복음을 가져갈 것이다(사52:7; 41:25~27; 46:10~13; 55:5~9; 계7:1~8).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는 약속을 능히 실현시킴으로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수축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1.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선대하라
우리는 바울의 로마서 11장의 모든 증언은 사실상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엄숙한 경고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든지 한 민족 이스라엘에 대해 영적 빚(spiritual inheritance)을 지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기독교의 모태이다. 만일 그들이 없으면 예언자, 사도, 성경, 그리고 구세주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하느님(하나님)은 다른 민족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들에게 영적 빚을 지게 되는 것은 동일한 사실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한 민족을 선택하시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선택된 그 민족에 대해 다른 이방인들은 빚진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모든 이방인들은 한 민족 이스라엘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따라서 이방 기독교회는 유대 민족에 대한 큰 부채 의식을 가지고, 그들을 선대하고 축복해야 함이 정의이며 도리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증언은 이점을 분명히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마케도냐와 아가야 사람(주-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주-유대인)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기부(헌금)하였음이라. 그들(주-이방인)은 기뻐하였으며 또한 저들(주-유대인)에게 빚진 자가 되었으니, 이는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하였으면 물질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함이라”(새성경 행 15:26,27).
마케도냐와 아가야는 로마가 행정구로 나누어 둔 그리스의 두 주였다. 빌립보 교회는 마케도니아의 대표 교회였고, 고린도 교회는 아가야 지방의 대표였다. 그리고 유대인들로 구성된 오순절에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였다. 이 지방의 이방인 교회들이 모교회인 유대인의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한 것을, 바울은 이방인은 유대인에게 빚진 자라는 논리로서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시 이방인 교인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위해 헌금한 것은 기쁜 마음으로 한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원리적으로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했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유대인의 구원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 민족을 박해하거나 학살하는 행위는 도의(道義)에 어긋나는 행위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하느님은 이방인을 유대 민족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국가를 유대 민족을 징계라는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의사는 결코 없으시다. 구원 받은 이방인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방 기독교 국가는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여 그들을 하느님과 화목케 하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어야만 한다. 특히 알이랑 민족 한국 백성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수축해야 할 사명이 있는 특별한 민족인 만큼 이스라엘과 함께 서야 하며, 지구상에 역사적 종말이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선대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반유대주의자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유대 민족을 축복하고 선대하면 하느님께서도 나 자신과 우리 민족을 반드시 복을 주시고 선대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지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말씀은, 반유대주의자에 대한 하느님의 확실한 경고이다.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 민족을 통하여 말씀(성경)과 구원(메시아)이 올 것이었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사단의 주공격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논리적인 일이다.
사실상 사단은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있을 때 바로를 통하여 사내아이를 다 죽여 유대인들 멸종시키려 했고, 파사왕 아하수에로 치세 때에도 하만을 통해 유대인을 멸절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겠다고 명백히 약속하셨으며, 또 그의 백성을 저주 하는 자들에게 저주하시겠다고 엄중한 경고를 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또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무릇 너희(이스라엘)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Zechariah 2:8
For thus says the LORD of hosts: “He sent Me after glory, to the nations which plunder you; for he who touches you touches the apple of His eye.
이 말씀 가운데 대명사 ‘그’ 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그’가 하느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칼빈, 헨더슨, 박윤선). 또 하나는 ‘그’가 이스라엘을 범하는 자, 즉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대부분의 주석가들). 그러나 ‘그’가 누구를 의미하든지 그 뜻은 매한가지로서, 이스라엘을 범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견해를 취하면 유대 민족은 하느님 자신의 눈동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유대 민족을 대적하는 자의 행위는 하느님 자신의 눈동자를 범하는 행동과 동일하다는 뜻이 된다. 인간이 어찌 감해 하느님의 눈동자를 범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하느님의 눈동자를 범했다면, 그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 견해를 취하여도 그 뜻은 한가지이다. 두 번째 견해를 취하면 유대 민족을 해롭게 하는 자는 곧 자기 자신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과 동일한 짓이라는 뜻이 된다. 즉 유대 민족을 범하는 자의 행위는 ‘자해행위’라는 것이다. 왜 유대 민족을 해롭게 하는 행위가 자해행위인가? 그 까닭은 유대 민족을 대적하는 자를 하느님은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 견해 중 신명기 32:10에 근거해서 전자를 취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참으로 하느님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리니”라는 약속을 전 역사를 통해 충실하게 지켜 오셨다. 고대사에서 몇 나라만 언급하자면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등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나라들은 모두 몰락하였다.
현대사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폴레옹은 정복 사업을 시작했을 때,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들에 대해 반우호적으로 돌아서자 유럽을 통일하여 자신의 권력 아래 두고자 했던 그의 꿈은 러시아의 동설(冬雪) 아래 매장되었다. 그는 결국 워터루에서 패하고 말았다.
한때 대영제국은 해질 날이 없었다. 그 국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대영제국은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피난처였다. 그 후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팔레스틴에 유대인 국가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한 발포어 선언의 약속 -1차 대전 당시 영국은 이 약속을 통해 유대인 부호들의 지원을 얻었다- 을 수행하는 것보다 아랍산 원유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1930년대 초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틴 이주를 금하는 ‘백서’가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결국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최후 해결책’에 발이 묶이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대영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와해되었고, 이제는 그 찬란하던 과거의 잔영만을 간직한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히틀러의 제3독일 제국은 천년 동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정부는 출범하지 겨우 13년 남짓한 후에 패망의 잿더미 속에 완전히 매장되고 말았다.
체포되는 유대인 어린이, 1939년 폴란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시고자 여러 국가들을 사용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그 국가들은 모두 이스라엘인들을 박해한 데 대한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던 이라크의 후세인은 하만처럼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대적하다 명대로 못살고 사형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은 이란이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저주를 퍼붓고 있는데, 이란이 이런 완고한 태도를 견지하는 한 미래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선대하고 축복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독특한 민족을 여기서 함께 언급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 이유는 지나간 세계 역사의 경향이 한결 같이 반유대주의가 현저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을 선대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 복을 크게 받은 이방인의 예는 성경 안에서 찾아봄으로서 대신하도록 하자.
메시아의 족보에 오른 이방 여인 룻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구약성경 룻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룻기는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경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 큰 흉년이 들어서 한 히브리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그 재난을 피하여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내려갔다. 그때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로서,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해 가던 시기였다.
그 히브리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론’인데, 이들 히브리 가족이 모압 지방에 살 때에 나오미의 남편이 죽었고, 그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오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론 두 사람마저 죽고 나오미는 어릴 때 과부가 되어버린 모압의 이방 여인인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과 함께 남게 되었다.
이에 나오미는 자기 고향인 베들레헴을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두 며느리와 함께 귀향길에 오른다. 그러나 나오미는 도중에 두 며느리에게 자기를 따라 오지 말고 다시 돌아가서 그들의 종족과 함께 살라고 권고한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1:9).
나오미가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라고 말한 것을 보아, 이들 모압의 이방 여인들은 자기 남편들이 살았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 나오미를 잘 섬기었던 착한 여인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이들 두 여인 오르바와 룻은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소리 높여 울며, 나오미와 함께 시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들이 자기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라고 설득한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고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 1:11-13).
나오미는 자기의 아들들이 다 죽으므로 어린 나이가 과부가 된 두 며느리의 처지가 같은 여인의 입장에서 심히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그들의 육신 생활과 관련된 남편 문제에 역점을 두고 설득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은 형제 중 하나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죽은 자의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가서는 아니 되었고, 그 남편의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행하도록 되어 있었다(신 25:5-6).
그러나 나오미는 죽은 두 아들 외에 형제 된 아들들이 더 없었으니, 자기의 며느리들을 아내로 취할 자가 없었다. 따라서 나오미는 “나의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늙었기 때문에 자기의 과부된 며느리들을 아내로 취할 형제들을 낳기 위하여 다시 결혼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낳게 된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며 남편 두기를 멈출 수 있겠느냐며, 두 며느리를 향하여 자기의 동족에게로 돌아가 살길을 찾으라고 간곡히 타이른다.
시어머니의 이 같은 말에 오르바와 룻은 소리 높여 다시 운다. 그리고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나 자기 길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붙좇는다. 하지만 나오미는 단호히 룻에게 돌아가라고 권고한다.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룻 1:15)
그러나 룻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기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룻은 자신의 육신의 안락을 버리고서라도 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며, 그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느님을 함께 섬기는 것이 옳다고 결심한 의리(義理)를 지키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에 나오미는 더 이상 설득하기를 그친다.
그 두 사람은 이윽고 베들레헴에 도착하였고, 그때는 추수 시기였다. 그리하여 룻은 양식을 위하여 이삭을 줍게 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이방여인이었기 때문에 과부들에게 베푸는 도움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부유한 땅 주인인 보아스가 그녀를 보게 되었고, 보아스는 그녀에게 이삭을 충분히 줍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는 보아스가 이방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선대하여 자기 부모와 고국을 떠나 히브리인의 나라로 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1,12).
그런데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족이었다. 룻은 나오미의 지시로 추수절기(오순절) 밤에 타작마당에 가서 보아서의 발 곁에 누웠다. 밤중에 그가 놀라서 깨었을 때 그녀는 보아스에게 그가 자기 집안의 기업(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눈 땅)을 무를 자라고 하였다.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은 잃은 것을 회복시키는 자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지를 완전히 팔고 사는 행위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조상이 물려준 자기의 땅을 남에게 팔았다 할지라도, 그 땅은 50년 만에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무조건 원주인에게로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토지 매매 행위는 ‘희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희년’이 45년이나 남았으면 그 땅은 매입한 사람이 그만큼 오래 사용할 수 있으므로 비싸게 팔리는 것이요, 희년이 겨우 2년 남았으면 그 땅은 매입한 사람이 2년 동안만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만큼 싸게 팔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상 매매 행위가 아니라 임대 행위인 것이다.
인간은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이 같은 제도를 율법으로 명하심으로서 부동산 투기를 근본으로 방지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희년이 오기 전이라도 땅을 판 사람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즉 자기가 땅을 돌려받을 수 있는 희년이 남은 햇수)을 돌려줄 경우 언제든지 무르기를 허락해야 했으며, 그의 친족이 대신 무르기를 원할 경우도 물러 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토지는 그 지파의 땅으로 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레 25:25~28).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대지주 계급과 그들에게 평생토록 종속되어 대대로 가난을 물려주며 살아야 하는 소작농의 출현과 같은 불의와 불평들이 득세하는 사회구조는 결코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일찍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흉년으로 인해 모압으로 이주할 때 그의 땅(기업)을 팔았을 것인 바, 이제 그것을 물러 받으려면 어느 근친이 그것을 사들여야 되는데, 바로 보아스가 가까운 친족인 고로 이 일을 해결해 줄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은 “자식이 없이 죽은 사람의 미망인을 그 죽은 자의 친척이 취하여 자식을 낳아 계대 시켜줌”에 대하여도 사용된다(신 25:5~10, 창 38:7~10). 따라서 룻이 보아스를 향하여 “기업 무를 자”라고 한 말의 뜻은 보아스가 죽은 자신의 남편을 대신해서 자신을 아내로 취할 자라는 뜻도 양립하는 것이다.
그 후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기업을 이었고, 또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이 ‘오벳’이다. 오벳은 바로 다윗왕의 할아버지이다. 이 비천한 모압 여인은 다윗왕의 ‘증조모’로서 다윗왕의 혈통에 들어갔고 그 가계를 통하여 메시아가 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멸시받던 모압 여인인 룻은 -모압이라는 이름을 유대인은 경멸한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자기 딸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 모압이기 때문이다(창1930-38)-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이다(마 1:5). 이처럼 큰 영광과 큰 복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방 여인 룻이 이 같은 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오르바와 룻을 향하여 자기들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라고 권고 했던 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룻 1:9).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났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계속 선대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비천한 이방 여인이었으나 룻으로 하여금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어 메시아의 족보에까지 오르게 하는 복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 절기에 관한 주석」이라는 책에서 마이클 스트라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룻기는 대부분 오순절의 아침 예배시간(오순절 절기의 이틀 중 둘째 날 아침 예배)에 읽혀집니다(주-룻기의 배경이 추수기이기 때문임). 그런데 축복의 말씀이 없이 읽혀집니다.” 왜 축복의 말씀이 없을까? 그것은 아마 유대인들이 이방 여인인 룻을 시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단 4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책인 룻기는 이방인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쓰여진 책인 것이다. 이방인은 룻과 같이 히브리인을 선대하여야 한다. 반드시 그는 하느님이 주시는 특별한 복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이방인 기독교회는 오르바와 같았다. 그들은 유대인을 배척했고 멀리 했다.
코리아, 룻과 같은 위치에 서라
모든 나라들이 오르바의 길로 가더라도 우리나라는 룻과 같은 위치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은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켜, 유대 민족이 하느님과 화목케 함으로써,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수축해야 할 나라로 택함을 입은 제2의 선민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유대 민족을 축복하고 선대하는 이스라엘의 가장 우호적인 나라가 될 때, 하느님도 우리나라를 향하여 반드시 넘치는 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걸프 전쟁이 일어나 이라크의 이스라엘 공격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던 1991년 1월 15일부터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는 한국을 비롯, 미국, 영국, 캐나다, 남아프리카, 모로코 등 세계 20여 개국의 350여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 “이스라엘과 세계 평화를 위한 중보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유대인들은 지역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기도를 해주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에 크게 감격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일들, 즉 유대인들을 위로하고 선대하고 축복하고 감동시키는 일들을 마지막 때에 한국이 잘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만 한국은 복을 받고 장차 능히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여 마침내 온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한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서야 한다.
이스라엘을 적대하던 나라가 그들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수는 없다. 간단한 예로 걸프 전쟁시 이라크가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로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여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의 전쟁 개입으로 인한 중동전쟁으로의 확전을 막으려는 미국은,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요격하여 공중에서 파괴시키는 이른바 미사일 잡는 미사일인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그것을 조작하는 기술 요원들을 함께 파견하였다. 얼마 후 독일의 외무장관이 이스라엘 정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은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세 아렌스 국방부 장관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왜 거부하였는가? 본래 텔아비브를 강타한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이스라엘까지는 못 미치는 소련제 SS-1 미사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스커드 미사일로 개조하는 작업에 독일의 기술과 자본이 협력했던 것이다. 만일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만행을 진심으로 속죄했다면, 돈벌이가 아무리 귀해도 이스라엘에 가장 적대적인 아랍국가인 이라크에 이스라엘이 사정권에 들어가는 미사일을 만들어 주어서는 안 되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이 유사시에는 틀림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무기가 될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이라크에 스커드 미사일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독일인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모자라서 또 우리를 죽이는 데 사용될 무기를 원수 나라인 이라크에 만들어 주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 아렌스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독일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이 이스라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만일 미국이 한.미.일 삼각 동맹 체제를 구실로 주한 미군이 철수하고 대신 일본군으로 하여금 한국에 주둔토록 하여 미국이 수행하던 대북한 방위를 일본군이 대신 수행토록 한국 정부에 요구한다면 한국인이 그 정책을 수락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본의 한국 식민 통치의 잔학상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쌀을 강제로 공출(供出)하여 한국 민중은 초근목피로 연명하여야 했고, 우리의 젊은이를 강제로 지원시키고 징병(徵兵)을 하여 전쟁터에 내보내고,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여 강제로 상용시키고, 한국 처녀 약 20만 명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삼기 위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종군위안부로 끌고 나아가고 -특히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전례가 없는 파렴치한 행위로서 정신적으로 왜소(矮小)하고, 도덕적, 문화적으로 빈약한 일본인들만 할 수 있는 범죄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이름 아래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을 강요하고,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創氏改名, 1941)을 단행하고, 동경에 있는 일본 궁성을 향하여 날마다 동방요배를 강요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사참배를 거절한다고 고문, 학살을 일삼았고, 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투옥, 처형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일본의 탄광 등지에서 노예처럼 노동을 하던 한국인들이, 일본 패망 후 그대로 일본에 남게 됨으로서 생긴 대부분의 재일 한국인들을 차별, 멸시하고 있으며, 한국이 통일 될 경우 하루사이에 인구 7천만 명의 경제, 군사적 라이벌 대국이 생길 것이 두려워, 한국의 통일을 절대 원치 않는 가장 큰 반통일 세력이 일본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한국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 상징적 의미로서 순시선까지 가끔 보내는 도발 행위도 서슴치 않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군대가 한국 땅을 다시 밟는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자극하여, 능히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함으로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받게 할 나라로 택함을 받은 욕단계 천손민족이다. 그러니 만큼 우리나라는 룻과 같이 이스라엘을 선대하고 축복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함께 서는 나라, 이스라엘에 가장 우호적인 복음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사 40:1~3)
알이랑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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