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블랙
2004년 2월 25일
제일화재 세실극장
연극 <우먼 인 블랙> 초연 당시, 배우님들 인터뷰 원고입니다.
그때 제가 사랑티켓 홈페이지 인터뷰란을 맡고 있었거든요. ^^;;
Chapter 1.
「우먼인블랙」은 ‘공포 연극’입니다. 그러나 ‘공포’ 연극이라는 것이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닙니다. 공포건 비애건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에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연극’이라는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전의식을 갖게 하는 연극이라는 거지요.
처음 이호성 씨를 만나기 전에 저는 그분이 굉장히 희극적이고 재미있는 성격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남센스’에서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지요. 수염을 기르고 스타킹을 신은 남자 수녀란 정말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었습니다. 게다가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놀라웠는지. 그런데 공연장에 도착해서 미리 공연 프로그램을 보고 저는 생각을 달리 했습니다. 아~ 아주 근엄하고 점잖으신 분이시구나 라고요.
실제로 이호성 씨를 직접 뵈었을 땐 저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전부 고쳐먹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이호성 씨의 이미지는 전부 아니었습니다. 아니, 전부 맞다고 해야 할까요. 세상 그 어떤 성격을 표현하라고 해도, 세상 그 어떤 인물을 연기하라고 해도 다 소화해낼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기 때문에 많은 다양한 역할들을 정말 자신인 것처럼 연기할 수 있는 거겠지요. 처음에 도전의식 이야기를 꺼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배우의 ‘변신’은 미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변신’이란 자기 자신을 감추는 트릭이라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이호성 씨는 이 연극에서 1인 8역을 맡았습니다.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모습들을 표출하는 것, 또는 자신이 갖지 못한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 바로 그것에 도전의식을 갖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 도전의식이 지금의 배우 이호성을 존재하게 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저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대본을 외워야 하는 공연이 지겹지 않느냐고요. 이호성 씨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밥 매일 먹으면 지겹습니까? 배우에게는 공연이 밥이에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지요. 배우가 공연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공연을 하지 않을 때가 더 지겹고 지루해요.
그야말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지요.
언제까지고 이호성 씨의 식사에 초대되고 싶습니다. 다음 번 식사에서 그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을까요?
Chapter 2.
공연장에 그는 없었습니다. 항상 공연장에 일찍 도착하신다더니 오늘따라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호성 씨와의 인터뷰를 먼저 시작했습니다. 인터뷰가 한 5분쯤 진행되었을까. 갑자기 무대 뒤에서 그가 마술처럼 나타났습니다.
이상직 씨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두 번을 놀랍니다. 이 공연 「우먼인블랙」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이전 작품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도 너무 진지한 모습만을 보아서, 저는 그의 웃는 얼굴은 별로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람이 항상 진지할 수만은 없다는 게 당연한데 말이에요. 하여간 그는 상상 외로 밝고 유쾌하고 즐거웠으며 그러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두 번째 놀라움 역시 얼굴에 관계된 것입니다. 인터뷰 중에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첫째 아이는 보았는데, 둘째 아이는 아직 못 보았다고, 그래서 둘째 아이를 돌보느라 부인도 아직 못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둘이나 된다니. 과장 조금 더해서 그의 얼굴은 정말 20대, 아무리 많이 보아도 20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는 「문제적 인간 연산」을 보면서 ‘어린 사람이 참 연기를 잘 하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먼인블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무서움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지요. 요즘 공연장에는 종종 귀신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대 뒤에서 출연자가 아닌 누군가의 그림자가 휙 지나가기도 하고, 며칠 전 음향 담당자는 무대 위로 쑥 내미는 손을 보았다고요. 이상직 씨는 현재 가장 무서운 것이 공연장에 나타나는 그 귀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별로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상직 씨는 귀신도 놀라 도망갈 만큼 환한 미소를 가지고 계시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공연장에서 공연 중에 떠드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먼인블랙」공연 중에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는 관객이 공연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상직 씨는 오히려 그런 관객의 반응을 보면서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코미디언들이 관객의 웃음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처럼, 무서운 연극을 할 때는 공포의 반응을 통해 지금 내가 잘 하고 있구나를 알 수 있다고요. 그러니 「우먼인블랙」을 보러 가시는 분들은 저 같은 걱정 마시고 마음껏 소리 지르고 오십시오.
이 공연을 하면서 이상직 씨는 팬카페가 생겼습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관객들이 자신의 연기에 박수를 쳐줄 때, 배우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일 듯싶습니다.
Chapter 3.
원래는 연출가이신 와이킷 탕과의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생겨 홍콩에 가셔야 했기 때문에 인터뷰는 최소되었습니다.
그냥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글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원래 한국 사람들이 그 사람 없는 데서 남 얘기 하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까.(저만 그런가요?) 이호성 씨와 이상직 씨에게 연출가 와이킷 탕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았습니다.
두 분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굉장히 젊고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고 밝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상직 씨보다 더 동안(童顔)이시라고요. 연륜에 비해 작품 해석 능력도 탁월하고 배우에게 신뢰감을 주는 연출가이시랍니다.
저는 인터뷰 전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홍콩 사람이라는데, 그럼 인터뷰를 영어로 해야 하나, 중국어로 해야 하나? 질문이야 어떻게든 한다고 하더라도 대답을 못 알아들을 텐데 녹음을 해서 누군가에게 해석을 부탁해야 하나? 등등의 걱정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걱정은 해결되었지만 역시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배우들은 어떻게 작업을 했을까.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느낄 수는 있다고 은근한 자랑 섞인 말씀들을 하십니다.
연극인은 세계 공통적으로 똑같고 작품에 대한 해석도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와이킷 탕은 배우 출신이라 배우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서, 지금 배우가 어떤 생각으로 저런 연기를 하는지, 무엇을 더 필요로 하는지를 금방 잡아낸다고 칭찬하시더군요.
저렇게 좋은 얘기들만을 하시니, 와이킷 탕 씨가 평소에 배우들에게 무섭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 잠시 싱거운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Appendix
등장하지 않으면서 등장하는 그녀, ‘검은 옷의 여인’...
그녀를 본 후,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질 때마다 눈에 잔상이 남아
정말로 어둠 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제 방의 불을 켜다가
전기 스위치 아래의 종이에 손을 베었습니다.
(제 방은 전기 스위치 바로 아래 책상이 있거든요.)
손가락을 스치는 실낱 같은 한줄기의 섬뜩함이
제 손가락에도, 그리고 제 마음에도 남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날따라 같이 사는 친구는 들어오지 않는 건지,
왜 하필이면 그날따라 바람은 유난히도 많이 부는 건지.
싱크대에서 갑자기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주위 관객의 뒤척임 소리마저도 무서운 그곳.
그곳에서 만난 음산한 여인.
그러나 그녀가 내뿜는 무서운 기운은
견딜 수 없이 힘든 한 어머니의 짙은 외로움이 아닐까 못내 가슴이 저려옵니다.
2004. 2. 25.
사랑티켓 홈페이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