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의 만화가 봅 케인(Bob Kane)에 의해 탄생한 "배트맨"(Batman)은 "쾌걸 조로"(Zoro)의 복면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박쥐 날개 틀에 착안해 만들어진 영웅이다. 수퍼맨(Superman)과 함께 '완소', '최애' 캐릭터가 된 이 공상적 인물은 1949년 <배트맨과 로빈>(Batman and Robin)을 포함, 1943년과 1966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돼 모습을 드러냈으며, 1966년부터 1968년까지 TV 시리즈로도 안방 시청자들을 찾았다 .
그 누구도 쉽사리 흥행을 점칠 수 없던 이 만화캐릭터를 1980년대 들어 부활시킨 사람은 팀 버튼(Tim Burton) 감독이다. 감독 자신이 주인공 브루스 웨인(Bruce Wayne)과 같이 외곬의 성격소유자이었기에 1989년 스크린을 통해 팬들 곁으로 되돌아온 1989년 판 "배트맨"의 재탄생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봉 후 2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 히트를 기록한 팀 버튼의 <배트맨>은 이후 탄력을 받아 줄줄이 제작될 속편들의 흥행폭발에 도화선이 되었다. 더불어 영화와 함께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이 급부상했다.
바로 대니 앨프만(Danny Elfman)이다. 사실 영화감독의 야망을 품고 있었던 그는 "오잉고 보잉고"(Oingo Boingo)라는 록 밴드에 몸담고 있었으며 몇몇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유랑인 대니의 운명은 그룹 공연을 보던 감독 팀 버튼의 눈에 띄면서 완전히 새국면을 맞이했던 것. 유명한 다른 영화음악작곡가들처럼 정식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이 결성한 대중음악밴드를 통해 잔뼈가 굵은 작곡가 엘프먼은 <피위의 대모험>(1985)의 음악을 맡으면서 성공가도의 시동을 걸었다.
이때부터 팀 버튼과 대니 엘프먼이라는 환상적 영화 콤비의 꿈은 서서히 증폭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배트맨>(Batman)으로 둘의 의기투합은 그 결실을 맺었다. 이래로 대니 엘프먼의 음악은 "엘프만식의 음악"이라는 특별상표가 붙을 정도, 그야말로 저명한 영화음악 작곡가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팀과 대니, 황금 콤비는 뒤이은 속편 <배트맨 리턴즈>(Batman Returns)에서 재결합해 다시 한번 위력을 과시했다. 제각기 그 진가를 만천하에 드러낸 작품인 <배트맨>은 당시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의 홍보책의 일환으로 활용돼 주목받았다. 워너 뮤직 소속으로 팝계에서 한창 주가를 드높이던 프린스(Prince)가 동참한 것.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강타한 주제가 '배트댄스'(Batdance)를 포함해 9곡을 실은, 사실상 프린스의 독집과도 같은 또 하나의 영화음악음반으로 상업적인 마케팅을 펼쳐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프린스의 가창곡이 아니라, 대니 엘프먼의 웅장하면서도 음울한 음조가 압도하는 스코어를 마음껏 감상했을 뿐이다. 범죄, 부패, 탐욕의 상징인 구약성서의 소돔과 고모라를 인용해 만든 영화의 주요 무대, 고담시(市)의 칠흑 같은 어둠을 감싸고도는 엘프먼의 스코어는 팀 버튼 식 영상미와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
바그너(Richard Wagner)와 홀스트(Gustav Holst) 그리고 스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같은 고전음악거장들의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처음으로 활용한 그의 고딕적이고 오페라틱한 스코어는 우선 고담 시의 위풍을 장대하게 드러낸다. 기내에서 갑자기 떠오른 영감을 화장실로 달려가 카세트에 허밍으로 담았다는 메인 테마가 바로 그것이다. 그 위에 창백한 얼굴에 항상 웃고있어야만 하는 조우커(잭 니콜슨 분)의 테마를 첼로와 벨소리로 장식해 결정타를 날렸다.
마이클 키튼(Michael Keaton)이 연기한 브루스 웨인의 어두운 과거는 저음의 관현악과 합창으로 음산하게 처리해 경외심을 자극시킨다. 킴 베이싱어(Kim Basinger)의 비키(Vicki Vale)와 완벽하게 일치시키지는 못했지만, 흐름을 잃지 않은 러브테마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메인 테마를 주도하는 금관악기의 팡파르는 영상을 압도하는 영화음악의 키 포인트다. 음산하게 저류하는 브라스 음의 육중함은 스크린에 담긴 깊은 신비감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특히 배트맨이 조우커와 마지막 결전을 벌이기 전 배트 의상실에서 무기와 장신구 등을 착용하는 장면, 최후의 피날레에서 휘몰아치는 드럼 사운드, 배트맨의 출현을 알리는 박쥐 그림자가 하늘을 비출 때의 종소리와 금관악기에 의한 압도적인 화음은 시각적 감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자칫하면 앞으로 돌출되기 쉬운 금관악기의 취주와 타악기의 박자감이 관현악협주의 조화를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구성진 소리매김이다.
속편 <배트맨 리턴즈>(Batman Returns, 1992)까지 엘프먼 식 고딕 오케스트라 사운드스코어는 "배트맨"의 페르소나를 확연히 나타내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3편 <배트맨 포에버>(Batman Forever, 1995)과 4편 <배트맨과 로빈>(Batman and Robin, 1997)에서 음악은 비록 엘리엇 골든썰(Elliot Goldenthal)에게 지휘봉이 넘어갔지만, 누가 뭐래도 원작의 원형 사운드의 변조일 수밖에 없다. 원조의 가치는 그만큼 숭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