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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대역~공릉근린공원~묵동천~신내역~양원역~중랑캠핑숲~망우묘지공원~용마산(깔딱고개, 용마산5보루,용마산정상)~아차산(아차산5보루,3보루,5보루,1보루,해맞이광장,아차산성)~광나루역
길동무의 도보여행은 ‘함께 행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행(同幸)입니다. 2018년 가을의 길목에서 시작하는 서울둘레길 2코스는 화랑대역 5번출구를 들머리로 공릉동근린공원에서 묵동천에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묵동천은 묵동을 지나 중랑천과 합해진다고 해서 묵동천이라고 부른다. 봉화산 아래에 있는 묵동은 조선시대에 먹을 만들던 고장이어서 먹골이라고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묵동이 되었다. 유명한 먹골배가 나오던 곳이다.
서울둘레길 2코스는 중랑구로 접어든다. 서울 북동부에 있는 중랑구는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있었던 곳으로 1963년 서울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동대문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동부와 동남부는 용마봉(348m)·아차산(316m) 줄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부에는 봉화산(160m)이 솟아 있다. 중랑천이 서쪽 경계를 따라 남류한다. 원래 중랑천 연안의 충적지는 농경지로, 동북부의 구릉지는 배밭으로 이용되던 농업지역이었으나, 1970년대초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주거지로 변모했다.
중랑구가 ‘푸른도시 만들기’일환으로 만든 도시 속에 작은 숲 신내동 동네숲으로 들어선다.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경춘선 신내역이다.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중앙선 양원역이다. 양원역은 공사역명은 송곡역이었는데 양원역으로 부르게된 것은 주변에 있는 자연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서울 강북의 최동단 전철역이다.
서울둘레길 2코스는 중랑캠핑숲(중랑가족캠핑장)으로 들어선다. 중랑캠핑숲은 개발제한구역 내에 설치되었던 비닐하우스 등을 철거하고 가족 단위 캠핑과 학생 소풍 등을 할 수 있게 꾸민 체험형 공원이다. 캠핑장을 비롯하여 청소년커뮤니티센터, 청소년문화존, 잔디광장, 분수가 있는 연못, 산책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체험과 놀이, 휴식과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과수원 사잇길을 통과한다.
망우리고개 육교다. 망우리고개는 원래 봉화산과 망우산 사이에 있는 중앙선이 다니는 터널 위로 나 있었는데 일본 강점기 때 신작로를 내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넓게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서울둘레길 2코스 망우묘지공원 구간이다. 망우묘지공원은 일제강점기부터 공동묘지로 이용된 망우산 일대를 정비 후 망우묘지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망우묘지공원에는 한용운, 오세창 등 독립운동가와 방정환, 지석영, 이중섭 등 현대 유명 인사들의 무덤도 많다. 망우묘지공원 산책로는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잘 가꿔진 숲이 우거지고, 쉼터와 약수터 등이 시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박인환 시인은 강원 인제 출생. 1946년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남풍, 지하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다. 1949년에 김경린·김수영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등이 있다.
독립운동가 서동일 선생은 남형우 배천택 등과 북경성 마사묘에서 무언실행을 행동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23년 귀국 경북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인 오재영 선생의 연보비다.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생활에 불합리한 일제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살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 '의열단 선언' 중에서
작가 최학송 문학비다.
전망대다. 휘둘러보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시계방향으로 서울둘레길 8코스가 지나는 북한산과 도봉산, 그리고 1코스가 지나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망우(산) 삼거리 북카페 쉼터다.
산신제단이다. 면목동 남촌마을(응달말)의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독립운동가 서광조 선생 묘비다.
서울둘레길 2코스은 용마산구간으로 접어든다. 용마산(348m)은 옛날 산 아래 어떤 집에 장사의 기상을 지닌 아이가 태어나자 역적으로 몰릴 것을 걱정한 부모가 아이를 죽여 묻었다. 그러자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 후로 이 산을 용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산이다.
서울둘레길 스탬프 거치대가 있는 용마산 깔딱고개 쉼터에 도착한다.
깔딱고개 570계단이 시작된다. '계단을 오르면 건강도 올라갑니다'
깔딱고개 570계단에서 만나는 조망 쉼터다.
'당신의 수명은 35분정도 늘었으며, 90kcal를 소비하셨습니다. 성공! 570계단 소리없는 박수를 받으며 오른다.
헬기장에 오른다. 봉화산(160m), 망우산(282m), 용마산(348m), 아차산(287m)을 총칭하여 아차산군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래서인지 옛 기록들에는 이 산들을 모두 아차산으로 적고 있다. 봉화산은 아차산의 봉수대로, 용마산은 아차산의 용마봉으로 기록되어 있고 망우산은 망우리라는 지명만 있지 산 이름으로는 찾을 수없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분포도가 설치되어 있다. 사적455호 용마산, 아차산 보루군은 고구려(용마산1,2,4,5보루/망우산1보루/아차산1,2,3,4,5보루/시루봉보루,홍련봉1,1보루)와 신라(용마산3,6,7보루) 유적으로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이 한강하류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전략요충지였다.
용마산 정상이다. 용마산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온다. 삼국시대에는 장사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사가 될 재목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걱정하던 부모가 아기를 죽여버렸으며 그뒤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른 곳으로 날아간 데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용마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가을에 길목에서 만나는 용마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용마산 정상에서 휘둘러보는 조망,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동부서울 그리고 관악산과 남산이 손에 잡힐듯하다.
서울둘레길은 광진구 구간으로 접어든다. 서울시의 동부에 있는 광진구는 원래 경성부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6년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43년 구제가 실시되면서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었다. 이후 고양군의 뚝도면과 광주군의 4개 면지역이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75년 한강이남지역이 강남구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개편으로 자양동·화양동·모진동·군자동·능동·중곡동·구의동·광장동 등이 광진구로 분리·신설되었다.
서울둘레길 2코스는 테크계단을 내려서면서 아차산구간에 들어선다. 아차산(287m)은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아차산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아단성이 변하여 아차산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조선시대 유명한 점쟁이 홍계관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 온다. 아차산은 산줄기 용마산에서 갈라져 나와 남쪽으로 한강 근처까지 뻗어 내렸다.
긴고랑길 안부다.
아차산 4보루를 오른다. 아차산은 한강을 서로 차지하려고 삼국이 서로 싸울 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처음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한성백제는 남하해오는 고구려 세력을 막기 위해 아차산에 산성을 쌓았는데 이 산성을 아단성 또는 아차산성이라 한다. 그럼에도 고구려 장수왕은 아차산까지 쳐 내려와 백제의 개로왕의 목을 베고 아차산을 차지하고는 이곳에 여러 개의 보루를 설치했다. 아차산에 설치한 고구려 보루는 한강 유역을 경계하는 성채다. 이곳에서 온돌과 우물이 발굴되었다.
아차산 4보루다. 보루는 조망이 좋은 곳에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고구려가 쌓은 군사시설이다. 아차산 일대에서는 20여 곳에서 보루가 발견되어 삼국시대 이곳이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던 현장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서울로 흘러드는 한강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 유적들은 우연한 기회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1989년 발생한 아차산 산불 진화작업을 하다가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돌무지들과 그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마다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넓은 구덩이가 확인되었으며 이것이 곧 지금의 장성과 작은 성들인 보루였다. 장성은 아차산 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한번을 감쌌고 다시 북쪽의 용마산과 망우산의 능선을 따라 이 또한 반달 모양으로 감싸안아 한강 하류의 위쪽 북변을 두 겹으로 쌓은 석성으로 대략 500m의 간격을 두고 20여 개의 보루들이 산봉우리의 지형에 맞게 돌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아차산 일대에 분포한 고구려 보루는 아차산 능선에 7개소(홍련봉 2개소 포함), 용마산 능선에 7개소, 망우산 능선에 2개소로, 총 16개소가 사적지로 지정되었지만 사적지로 지정 받지 못한 것과 소실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30여 개소의 보루가 아차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아차산 3보루다. 둘레 304m, 면적 3,100㎡로 노송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선다.
297.5m의 아차산 정상 표지목이 서있다.
뒤돌아보는 용마산이다.
아차산 5보루에 오른다.
아차산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5보루다.
홍련봉 1보루에 오른다. 1보루는 둘레 117m, 면적 950㎡이다.
여러 보루 유적 중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17개소의 보루군(홍련봉 1·2보루, 아차산1~5보루, 용마산 1~7보루, 망우산 1보루, 수락산 보루, 시루봉 보루)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 중에 있다고 한다.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기운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고 한 해 소망도 빌어보는 새해 첫 해맞이, 이 곳이 광진구 명소다. 2000년 1월 1일, 광진구가 서울시에서는 처음으로 시작한 <아차산 해맞이 축제>는 매년 새해를 출하하는 문화공연 외에도 새해 소망을 기원할 수 있는 다양한 부대행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 매년 4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드는 서울시의 대표적인 해맞이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정이다.
낙타고개다.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은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서 남동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복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는 이 성은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나 있는데 한성시대의 백제의 성이었다.
서울둘레길 2코스 용마ㆍ아차산 코스 세 번째 스탬프 거치대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이 얽힌 아차산, 한강과 함께 오랜 숨결로 광진의 대지에 숨을 불어 넣어주고 광진과 함께 살아온 산이 바로 아차산이다. 아차산은 광진의 푸르름을 더욱 맑은 빛으로 우리의 삶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다툼이 있던 장소로서, 아차산성이 있었고, 고려때에는 강호의 이상향으로서 멋진 강변의 풍경을 가져 여기에 쌍수정을 세워 광나루 강촌을 오르내리며 농로·어옹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심을 돋울 수 있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길동무와 함께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남긴 하루였다.
첫댓글 한결같으신 수명산님~~
용마.아차산 2코스를 오늘 이슬비 맞으며 걷고 왔습니다.......
벌초하는 모습도 보이고, 비오는 바닥엔 벌써 나뭇잎들이 색깔을 보태 떨어져 있었습니다.
오늘 이 길을 걷고 와서 수명산님의 해박하고 자세한 글들을 보니~~공감은 물론 제대로 복습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2코스를 걸었군요. 8월 말부터 길동무와 서울둘레길 역방향으로 걸을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가 발목을 붙잡는군요. 언제 한 번 예전처럼 함께 걸을 기회가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