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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요 방장산가 산도적은 안록산 | ||||||||||||||||||||||||||||||||||||
태인허씨 무대는 동북아였다 3...'배적(裵迪)의 시'가 변해 방장산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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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록산에 잡힌 왕유는 비밀시를 친구 배적에게 넘겨주니...
그곳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가무향연으로 즐기는 이원이 있는 곳이다. 안록산은 여기서 황제가 되어 음악 시, 가무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에 배적이라는 시인 친구가 비밀리에 찾아갔다. 그때에 왕유는 배적에게 당 현종임금을 사모하고 그리워한다는 시를 몰래 적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안록산의 난은 이사도, 장보고, 허이기등의 지원군 세력과 관군의 반격으로 평정되었다. 어느시대나 전쟁으로 왕권이 바뀌면 적군에 협조한 자는 모조리 죽이는 살인태풍이 진행된다. 정읍사람들도 1950년 6,25전쟁 때에 적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마구 죽임을 당한 역사가 있었다. 여기서 왕유는 안록산 반군 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한사람으로 꼼짝없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왕유에게는 배적이란 친구가 가져간 왕유의 "보리사에서 배적에게 보낸 편지"(菩提寺禁口號又示裵迪)라는 그 시가 배적의 시집에 남아 있었다. 왕유와 배적은 전쟁전부터 절친한 예술친구였다. 그래서 왕유의 동생 왕진이 그 시를 들고 왕에게 찾아가서 안록산의 진중에서도 역적 안록산을 저주하고 당 현종 임금을 사모한 근거로 배적의 시집에 있는 응벽시(凝壁詩) 상사(相思) 등의 시를 보여 주었다. 왕유만 살아남게 만든 구명시가 됐다 이로써 모조리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에서 왕유만이 유일하게 살아나는 사실이 구명시이다. 응벽시는 안록산의 명령을 거부한 악공의 이야기다. 그 시의 내용은 "아 이 속세에서 그물을 어떻게 벗어 던지고 갈거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부처와 무릉도원으로 가고싶구나 "였다. 이 시에서는 안록산을 탈출하여 임금에게 가고 싶다는 내용이 발각될 수도 있어서 왕을 부처, 당나라를 무릉도원으로 표현하였다. 수없이 많은 반란으로 왕권이 순식간에 바뀌는 시대마다 왕유가 배적에게 보낸 이시는 목숨을 구하는 노래로 유행하였다. 중국은 이때부터 배적시가 전국에 유행되니 점차 신라로까지 유행되어 전쟁에서 겉으로는 적을 도와도 속으로는 임금을 충성한다는 사형이 면죄되는 생명시가 되었다. 그 시 이름이 배적시 또는 "상사"라는 제목으로 불리었다. 왕유가 써서 배적에게 넘겨준 배적시가 정읍 방장산가의 유래 이 배적시는 당나라 안록산을 의미하는 산도둑이야기로서 정읍 방장산가의 유래가 되었다. 당나라 사신 맞이 잔치터인 정읍 삼산동 음성향에서 방장산 산신 제사장 무녀들이 초청되어 배적시를 부르니 바작산- 방장산- 반등산등으로 불리게 되고 산적 안록산에 잡혔으니 당 현종임금께서 어서 구원해 달라는 시였다. 정읍시 삼산동 음성향 마을 앞에 있는 논은 연못이며 산은 섬으로 만들고 마한,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이어온 유일한 사신맞이 잔치터다 방장산가의 우리나라 고려사악지의 기록과 그 해설은 아래의 내용뿐이다. "방장산가는 장일현 여자이고 선운산가는 장사현, 지금의 고창군 무장현이다". 장사현은 현재 중국 장가계 국제공항 장사현 지명이다 허이기가 유금필과 당나라에서 장사현에서 귀국하여 무장현을 장사현으로 불렀고 두성씨가 고창과 정읍의 토족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현종이 피난간 곳으로 태인허씨 허이기가 찾아간 곳이다 장일현은 장사현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선운산,방장산, 정읍사의 내용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당나라 현종,안록산, 왕유의 이야기가 담긴 배적시가 유력하다. 삼산동 음성 마을, 통일신라부터 고려까지 중국 사신맞이 연회 장소 그 당시 당나라에서 정읍사람 허이기, 전주도독 김원웅, 그리고 장보고, 최치원의 활동과 이끌고 온 병사, 악사, 가수들의 피난 및 은신처로 정읍 삼산동 음성(音聲) 마을이 유력하다 방장산 밑에서 높게 바라보이는 있는 정읍시 삼산동 음성마을에 삼신산을 상징하는 못과 섬을 만들고 통일신라시대, 당나라 후백제시대, 후당 양나라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이 지나는 연회의 장소이다. 정읍시 삼산동 음성마을은 신라, 후백제 고려의 음성서(音聲署)를 상징하는 이름 음성향(音聲鄕)으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악공을 양성하는 특수 기능을 지닌 마을임이 틀림없다. 고려시대는 이자겸과 이의방 무신정치시대 이후에 유자량의 퇴직귀족모임인 '기로회(耆老會)'가 조직되어 가무향연의 자리가 되어 평상시는 노래하고 송나라 사신이 가무향연으로 놀고 가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중국 문물이 소개되는 음성마을에서 왕유가 지은 배적시가 불려지고 자연히 중국의 유명시인 왕유의 시를 자주 거론하는 위치이므로 배적의 산도적 이야기가 주민과 산신을 모시는 방장산무당이 무속 노래로 불렀을 것이다. 임금을 그리워 하는 배적의 시가 외치는 내용 "산적이 나를 잡아두고 있는데 우리남편(당나라현종)은 왜 나를 구원하지 않느냐". 이와 유사한 민요 노래는 지금 제주도 타령 가사로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를 갔는데 바람아 강풍아 ....불어라" 변모되어 불려지고 있다. 후백제시절부터 한국과 중국의 사신맞이 및 가무향연에서 방장산 무당이 초청되어 배적의 시 노래를 부를 때 태산태수 허사문이나 전라관찰사가 대대로 배적의 시를 가르쳐서 부르게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허사문의 자손 이자연 이자의 이자겸이 대를 이어 궁중을 장악하고 방장산 아래 정읍시 삼산동에 음성향 마을에서 송나라사신을 접대하며 중국의 충성가 왕유의 배적시 노래가 방장산가로 남아있다 이곳에 지금도 태인허씨 유적과 선산 제각이 있고 고려 기로회 중심인물 유자량은 태인사람으로 보인다. 대화자가 중국사신이니 이해가 빠른 중국의 명시인 명가수 왕유의 시를 들려주는 접대행위는 당연한 일이다. 평안도에서도 평안관찰사가 태평소를 중국사신이 지나는 산 바위벽에서 불게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줄포, 법성포 등 사신맞이 연회장에서도 왕유 노래 불려지다 점차 변질 신라시대 당나라사신의 통행로 주유성(줄포) ,법성포(영광) 항구의 사신맞이 연회장에서는 선운산 무당 가무단이 노래하고 정읍 삼산동 음성마을에서는 방장산 산신당 무속가무 전문 악공이 차출되어 부르고 남원에서는 지리산 신당 가무단이 지리산가를 불렀는데 이 세노래는 그리워하는 주인공이 왕, 군사, 장사꾼으로 변질되고 당나라 시인 왕유는 점차 변하여 장사꾼 아내로 변질된 가사이다. 농민과 서민은 왕을 사모하는 언사를 못하게 하여 고의로 장사꾼 병졸 등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을 수도 있다. 신라지역도 거창, 합천, 대구 등에 노래가 있는 것은 사신맞이 가무가 남긴 것으로 본다. 그래서 왕유의 시인 친구 배적이 방장으로 불려지고 그 배적을 모르는 촌 농부들은 지게의 바작으로 방장산을 바작산등으로 불렸다. 배적 모르던 농부들, 배적을 지게의 바작으로 오해, 방장산이 바작산으로 정읍사 노래는 북면 승부리나 탑성(사찰이전)의 산신당에서 숙련된 무속 가수가 음성향 사신맞이에서 불려진 노래로 본다. 백제가요 5수가 모두 당나라 사신맞이 향연 장소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증거이다. 왕유와 양귀비 궁전 악사들이 안록산 도적에 잡혀서 왕유는 벙어리 시늉을하였고 "뇌영년"이라는 악사는 연주를 거절하여 능지처참을 당한 내용은 배적의 시집에 기록되어 있어서 충성의 근거가되어 살아난 내용의 시이다 . 이후부터 중국에서는 전쟁마다 적군을 도왔다는 혐의를 노래로 벗기 위하여 누구나 이 노래를 누구나 외워 불러 목숨을 유지하는 노래로 대 유행되어 내려왔다. 왕유가 쓴 '배적'시는 난세에 목숨을 도모하는 구명시의 대명사 한국전쟁 1950년에도 6,25 공산 치하에서 봇짐을 지고 가던 김제 공덕면 사람이 "민중의기 붉은 깃발은..."라는 인민군가를 계속 부르고 땀흘리며 공산당 초소 앞을 걷는 나그네를 그시대 필자가 보았다. 그리고 다시 1951년에는 국군초소 앞에 지나는 나그네는 국군가로 노래를 바꿨다. 이들은 예술의 노래가 아닌 김일성과 이승만을 그리워하는 척하는 학살방지 충성표현 노래였다
정읍민요 "영감아 땡감아 ....."또는 "우리집 서방님은...." 등에서 영감,서방의 뜻은 임금, 상감, 상제, 수령, 군수등등의 임금과 남편을 의미하며 죽어도 사랑한다는 의미 내용이다.
그말이 준말이되어 방장산이다 지금도 농부가를 '상사소리'라고 부르는 이유도 왕유의 "상사"라는 시가 임금을 사모하는 시이므로 더욱 뚜렷한 고증의 자료가 보충된다. 배적시> 바작산-> 방장산-> 반등산 왕유는 字가 摩詰(마힐)로 지금의 山西省 祁縣(산서성 기현) 사람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여간 영특한게 아니어서 9세 때에 벌써 좋은 문장을 짓기도 했다. 게다가 왕유는 머리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그는 부모에게 효성도 뛰어나 어머니상을 당했을 때는 그 슬픔이 지극한 나머지 거의 죽음의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남달라 동생 縉(진)과는 각별하였다. 불법(佛法)에 너무나 심취한 탓으로 왕사정(王士禎)으로부터 시불(詩佛)이라는 일컬음을 받기도 했다. 해서 그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망천(輞川)의 집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절로 삼았으니 오늘날의 망천 녹원가(鹿苑寺)가 된다. 오늘날 전하는 그의 화폭에 선미(禪美)가 자리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그의 호불(好佛)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시·화를 감상하는데 그에게 미친 불교사상특히 선(禪)사상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가 개척한 망천별업을 중심으로 일단의 시인들이 모여들었는데 배적(裵迪), 전기(錢紀), 맹호연(孟浩然), 저광희(儲光羲) 등이다. 그들은 때로는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며 산수에 노닐면서 悠悠自適(유유자적)하는 멋갈스런 삶을 꾸리니 이들을 두고 산수전원파시인이라고 칭하였다. 특히 그는 맹호연과 함께 세상에서 왕맹(王孟)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