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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적석목곽분의 특징과 북방 유목민족의 정치적 영향력 기원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고신라(古新羅) 묘제의 하나로 지상 또는 지하에 피장자(被葬者)와 껴묻거리를 안치한 목곽을 구덩식으로 설치한 다음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의 냇돌로 덧널을 덮어 돌무지 시설을 하고 다시 그 바깥에 점토 등의 흙을 입혀 다지는 방법을 사용한 신라 특유의 묘제이다. 이러한 형식의 고분은 대체로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모두 매장 주체시설이 구덩식널로 되어 있고 돌무지시설, 봉토, 들레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분마다 조금씩 다르다. 널의 위치에 따라 지상식, 반지하식, 지하식으로 구분되며, 널에 따라 돌무지 안에 덧널이 있는 돌무지덧널식, 없는 단순적석식이 있다.
경주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은 그 분포위치에 따라 시내 평지에 있는 평지고분과 시 외곽의 산록에 자리잡고 있는 산지고분으로 구분되는데,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평지고분은 4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까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에서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대에 걸친 김씨 국왕 시대의 무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황남동의 고분군 가운데 미추왕릉(味鄒王陵)으로 전해지는 고분을 중심으로 12만 5천여평의 평지에 밀집돼 있는 23기의 고분군은 1973년 이후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는데, 이를 대릉원(大陵圓)이라 부른다. 대릉원은 경주시내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이곳에 있다.
경주 평지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인상깊은 것이 금관인데, 생김새가 독특한 금관은 모두가 서너 그루의 나무와 나뭇잎 열매, 두개의 사슴 뿔과 새 등의 상징으로 구성돼 있다. 금관의 모양을 이루는 요소, 즉 나무와 사슴, 새는 금관을 쓴 사람들이 가장 신성시하고 중시했던 것들이다. 따라서 금관 그 자체가 금관을 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옛 가야지역의 금동관들도 신라 금관과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런 사유체계를 고고학자들은 시베리아 초원에서 왔다고 그 연원을 말하고 있다. 시베리아 일대의 샤먼에게 나무는 성스러운 상징이었으며 이들은 사슴의 뿔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신라 금관과 동일한 사유체계를 형상화한 금관은 서쪽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흑해 북쪽 사르마티아 지역에서 출토됐다. 제작 연대는 1세기경으로 스키타이족이 만든 금관이다. 기원전 7~8세기 철기문화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스키타이족의 활동범위는 매우 넓어 수백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초원지대는 스키토-시베리아라는 동일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호전적이었던 스키타이족이지만 하늘로 통하는 매개체로서 타이가 지대의 곧게 자란 침엽수를 섬겼고 생명을 이어주는 사슴을 어느 동물보다 숭배했다. 이들은 성스러운 대상으로 섬겼던 나무와 사슴을 가장 고귀한 인물의 관으로 장식했는데 특히 신라 금관의 출(出)자형 수목형 입식은 스키타이 칼자루의 '성스러운 나무 무늬', 즉 성수문(聖樹文)과 동일하다. 황금을 좋아하던 그들은 무기와 장신구 등을 모두 황금으로 장식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경주의 고분에서 서쪽 끝 흑해 연안에서 쏟아지는 것과 같은 유물이 발굴돼 나오는 것은 신라의 금관이 흑해 연안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사유체계를 가진 초원지대 유목민족의 금관에 기원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4세기 초에 갑자기 등장하는 신라의 새로운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도 북방아시아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학계에서는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 기원에 대해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었다. 첫번째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주로 주장되어진 이원적 계통론이다. 이원적 계통이란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 가운데 주로 적석부와 목곽을 분리하여 그 기원을 한반도 내부의 선행묘제에서 찾는 견해들이다. 강인구는 고구려의 방형 적석총이 남하하여 좌지의 토광목곽묘의 목곽과 결합하여 적석목곽분이 출현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신라 적석목곽분은 처음에는 봉토가 없는 순수 적석총이었으나 뒤에 적실봉토분의 영향으로 원형봉토가 씌워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적 계통론에는 수긍할 수 없는 문제점이 많다. 첫째,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 변천은 초기 고분으로부터 세부구조가 簡化․縮小․省略 되어가는 과정이고 묘제의 특수성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은 대형분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발굴 고분 중 가장 시기가 빠른 황남대총 남분의 구조가 신라 적석목곽분 기원 추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둘째, 황남대총 남분의 목곽부는 內外 二重의 목곽에 內槨과 外槨 사이를 잔자갈로 채운 복잡한 구조로 이러한 목곽부 구조는 原三國期 토광목광묘에서 찾아지지도 않고 거기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없다. 셋째, 이원적 계통관에서는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 가운데 高大封土와 護石은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적석부와 목곽만이 아니라 圓形의 고대봉토와 원형의 호석도 신라 적석목곽분의 기본 구조로 이들의 기원 또한 한반도 안의 先行墓制들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적석부 또한 구목으로 골조를 짠 대호가구(大浩架構)를 설치하고 여기에 맞추어 냇돌을 쌓았으며, 이와 같은 적석부의 구조 또한 고구려 적석총과 연관시킬 수 없다. 넷째, 4~5세기 영남지방의 묘제는 경주의 적석목곽분을 경주를 제외한 영남지방의 竪穴式石槨墳이 포위하고 있는 양상이고, 경주내에서는 적석목곽분이 상위, 수혈식석곽분이 하위 묘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수혈식 석곽분은 원삼국기 이래의 토광목곽분을 계승한 묘제이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기원은 전체가 토광목곽분 지대였던 영남지방 가운데 왜 경주 일원에만 적석목곽분이 발생하여 존재하고, 다른 영남지방에서는 토광목곽부를 계승한 수혈식목곽분이 주묘제로 되어 경주를 포위한 상태가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최병현 저 '신라 적석목곽분의 기원 이론')
두번째는 토광목곽분으로부터의 발전설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중산리 고분군 발굴조사를 계기로 신라 적석목곽분의 새로운 계통관이 제시되었다. 이성주는 중산리 고분군의 묘제가 순수 토광목곽묘, 목곽과 묘광 벽사이에 큰 냇돌을 채운 목곽위석묘, 목곽과 묘광 사이에 적석이 집중화 되어 있는 적석목곽분의 순으로 변처뇌고 있음을 들어 원삼국시대 목곽묘에서 완성형의 적석목곽분을 거쳐 퇴화되어 가는 과정을 단선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중산리 적석목곽분의 기원이 선대 토광목곽묘에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발굴 조사가 끝난 후 1996년 신라 적석목곽묘의 발생 과정을 자세히 언급했다. 그는 고신라 적석목곽분의 개념은 목곽과 적석봉분 그리고 고대봉토라는 3요소를 갖춘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적석봉분이란 기준으로 보면 그 안 신라 적석목곽분으로 취급되어 왔던 것의 대부분은 이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신라 적석목곽분은 경주분지 내에서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신라 중심 고분군의 최고 우계 대형분들만이 진정한 적석목곽분이라 했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외부적인 영향이 아니라 원삼국기 이래의 토광목곽묘로부터 자체 발전된 것으로 처음에는 목곽과 묘광 사이에만 돌을 뒷채움한 四方積石式의 형태로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발전하여 최고위급 대형분의 특수형식으로 地上積石式 또는 적석봉분식이 출현했다는 견해이다.
북방아시아 일대 Scytian Kurgan에서 시작되어 High Altai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목곽분은 세부 구조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신라 적석목곽분과 유사한 고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들과 신라 적석목곽분 사이에는 원거리에 떨어져 있는 지리적인 문제, 그리고 조사결과가 알려진 북방아시아의 목곽분들은 대부분 기원전이고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4세기 이후라는 시기적인 문제가 있으므로 연관성을 결부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묘제(墓制)'라는 것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문화다. 기원전 대초원을 누비던 유목민족의 묘제양식이 한반도 경주 땅에서 4세기경 갑자기 출현한 것은 수세기 동안 전통묘제를 끈질기게 이어온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한줄기가 4세기경 경주로 들어왔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실제로 적석목곽분이 발견되는 지역은 초원의 길, 즉 동서 7천킬로미터의 유라시아대륙 유목민족 문화권과 일치하고 있어 동으로 동으로 말을 몬 기마민족의 한 지류가 한반도 동남부로 흘러왔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4세기 고대 신라에 적석목곽분 조성 전통을 남겨준 유목민족은 과연 누구였을까? 4~^세기 경주 평지고분들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구려 왕족의 무덤은 깎은 돌을 계단 모양으로 쌓아올리는 형태의 적석총(栯石塚)이 유행했으므로 신라의 적석목곽분과는 양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향으로 경주에 적석목곽분 형태가 등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한성(漢城)에 도읍을 둔 백제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적석총임을 볼 때 신라 김씨 왕족의 기원은 고구려, 백제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지닌 계통의 집단이었다.
그렇다면 북방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어느날 갑자기' 고구려를 관통해 경주로 내려갔던 것일까? 고구려가 4세기 중엽 전연과 전쟁을 할 때에 6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는 국력을 보여준 사례로 미루어 보아 이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당대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던 고구려가 대규모 무장 집단이 국토를 관통해서 남하하고 있는데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고구려의 국가체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기마민족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일부가 남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작은 356년에 즉위하는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이요, 시베리아 풍의 적석목곽분도 4세기 중엽에 조성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342년 전연의 국왕인 모용황(慕容晄)이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모용씨 선비족(慕容氏鮮卑族)의 일부가 신라로 남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용씨 선비족(慕容氏鮮卑族)이 건국한 전연(前燕)은 고구려 침공에서 성과를 거두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켜 미천왕(美川王)의 무덤을 파가고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모친과 왕비를 붙잡아 갔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고국원왕(故國原王)은 단웅곡으로 피신했고 5만명의 고구려 백성들이 연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고구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고 국가체계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럴때 외부 세력의 고구려 땅 관통이 가능했을 것이다.
모용황은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 전군을 남로와 북로로 나누어 진격했는데, 고국원왕은 1만의 군사로 전연의 남로를 방어하려다가 대패했지만 북로의 방어를 맡은 고국원왕의 아우 고무(高武)는 5만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전연의 북로를 막아 왕우(王寓)가 이끄는 연나라 군사 1만 5천명을 궤멸시켰다. 모용황이 전쟁에서 이기고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을 점령했지만 오래 주둔하지 못하고 군대를 철수시킨 것도 바로 북로에서 연군이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전성한 저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역사')
그렇다면 여기에서 패배한 1만 5천여명의 연나라 기병군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에는 '자치통감'의 기록을 축략하여 '장사 왕우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모용황 측 입장에서 볼때 북로로 진군한 기병 1만 5천명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세한 내용은 담지 못하고 '모두가 전사했다.'는 짧은 기록만을 남긴 셈이다. 하지만 모용황이 이끄는 본진으로 아무도 귀대하지 않았다고 해서 별동대 1만 5천여명 모두가 전사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1만 5천여명의 기마군단이 옥쇄를 다짐할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연의 별동대는 자신들이 버림받은 신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 주력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자신들이 전선에 투입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1만 5천의 병력으로 5만의 고구려 대군과 맞서 싸우라는 명을 내린 전연의 국왕 모용황은 그들을 바둑에서 사석(捨石) 취급을 한 셈이다. 모용황은 1만 5천의 기마군단이 고구려 주력군을 유인해 전투를 벌이다 모두 죽어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전선으로 내몰았을 것이고, 그들은 불안과 울분이 교차하는 심정에서 전쟁에 임했을 것이다. 전연의 별동대 1만 5천명은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왕제(王弟)인 고무가 이끄는 고구려군 5만명을 상대로 내키지 않는 심정에서 전투에 임했다고 봐야 한다. 어차피 이기지 못하는 전투였으므로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고구려군과 싸웠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물러섰다가는 모용황의 분노를 사 처형당할 판이니 전투하는 시늉은 해야 된다.
더구나 고대 전투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군단이 기록상 그대로 전멸되었다고 믿기는 힘들다. 한마디로 북로로 진격한 전연의 별동대 1만 5천여명의 행방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왕제 고무가 지휘하는 고구려군 5만여명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전연의 북로 침공 별동대는 우선은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모용황의 본대와 합치려고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제지를 받아 본진과 합류하는데 실패하고 대오를 갖추기 힘든 상태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피해 계속 남쪽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은 병사들도 상당수였겠지만 적어도 5~6천명은 탈출에 성공해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을 상정해 본다. 낙오한 별동대는 고구려군의 창칼을 피해 동해를 왼쪽으로 끼고 남쪽으로 말을 몰지는 않았을까? 북사(北史)의 기록에 의하면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고구려인 가운데 일부가 신라로 망명하자 나라가 강성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고구려에서 신라로 이어지는 망명로가 있었음을 알수 있는데 지형적으로 볼때 험준한 산악 루트보다는 동해안 해변루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사'의 기록은 고구려 군사들과 싸우던 모용황의 군대 일부가 신라로 진출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오재성 저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4세기의 신라는 아직 국가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고 군사력의 수준도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모용씨 선비족과 신라 석씨 왕실 사이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결론은 석씨 왕실이 단절되고 김씨, 즉 모용씨 일가가 신라의 왕권을 장악한다.
381년에는 신라가 고구려 사절을 따라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였던 전진에 사신을 보내는데, 삼국사기에는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이 "그대의 말에 해동(海東)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묻자 신라 사신 위두(衛頭)가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 명호개역(名號改易)과 같은 것으로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요."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신라가 내물마립간의 재위기에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자신에 찬 답변이라고만 풀이했다. 그러나 신라 사신 위두가 밝힌 바 있듯이 시대변혁, 명호개역은 왕권이 강화되고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서서 바로 석씨 왕실의 시대가 끝나고 모용씨 선비족이 정권을 장악하고는 모든 면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뜻한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오재성 저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실제로 내물왕 이후 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지는데,국왕은 물론 왕비도 한명 배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유명 재상이나 장군, 학자 가운데서도 석씨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신라가 내물왕 들어 이전의 부족국가 시대와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토착세력 내부에서의 권력교체라기보다는 강력한 군사력과 선진적 국가 운영체계를 경험한 외부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이 더욱 높으며 내물왕 때부터 신라 왕족의 무덤이 과거와 달리 북방 유목민족의 그것으로 돌변하고 출토되는 유물들도 북방형으로 갑작스럽게 바뀐다는 점은 바로 북방 유목민족의 한반도 동남쪽 진출, 즉 모용씨 선비족의 영향에 의해서라는 추정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법흥왕(法興王)의 즉위 기록에 의하면 성씨가 김(金)이고 이름이 원종(原宗)인데,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고 왕비는 보도부인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법흥왕 김원종의 성과 이름을 모태(募泰) 또는 모진(募秦)으로 괴상하게 적고 있는 책부원구(冊府元龜), 유사(遺事) 등 고기록의 출처를 밝혀두었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 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양서(梁書)에는 진통(晉通) 2년에 신라에서 모(募)씨 성에 이름이 진(秦)인 국왕이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으로 하여금 표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 남사(南史) 신라조의 기록에는 양서의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전재하면서 신라 국왕의 성씨가 모(募), 이름은 태(泰)라고 적고 있다. 또다른 중국의 사료인 통전(通典) 권185 변방신라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에 대해 왕성모명진(王姓慕名秦)이라고 적고 있다. 법흥왕의 성을 놓고 '양서'와 '남사'에는 '모(募)'자로 적은 반면 '통전'에는 '모(慕)'를 들고 있는 것인데,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옮겨 적다 오기한 듯하다.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신라 제23대 국왕인 법흥왕(法興王) 김원종(金原宗)의 본명은 '모진'이 틀림없다. 북제서(北濟書)에 의하면 북제의 황제는 564년에 진흥왕(眞興王)이 사신을 보내자 이듬해에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했다는 기사에서 진흥왕의 성명을 김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국왕의 성을 김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인데, 중국의 사가들이 역사를 기록할때 중국을 위에 올려놓고 주변국을 깎아내리는 습성이 있긴 하지만 사신을 보낸 나라의 임금의 성씨나 이름까지 바꿔 적지는 않는다. (최진 '한국 고대사의 비밀')
법흥왕의 본성(本姓)이 '모'였다는 것은 국내 문헌에도 드러난다. 1988년 4월 경북 울진군에 있는 봉평신라비(鳳坪新羅碑)는 524년에 국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3년이 흐른 뒤에 세운 것인데, 여기서는 법흥왕을 모즉지 매금왕(牟卽智寐錦王)으로 적고 있다. 지(智)는 존칭이며 매금(寐錦)은 국왕을 뜻한다. 이것은 왕의 성이 모(牟)요, 이름은 즉(卽; 경상도 지역에서는 직으로 발음된다고 한다.)으로 해석 가능하다.(오재성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우리가 알고 있는 법흥왕의 공식 성명인 '김원종' 역시 예사롭지 않다. 원종(原宗)이라는 이름 자체에 어떤 해답이 숨겨져 있는 듯 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각오를 뜻하며 새로운 형태의 이름을 처음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새 이름에 분명 특별한 의미를 담고자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종이란 이름에는 새로 시작한 사람, 즉 첫 창씨개명자(創氏改名者)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해석할 때 비로소 원종이란 법흥왕의 또다른 이름은 그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법흥왕 모진은 성과 이름을 바꾸는 최대의 결단을 내리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성명을 바꾼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으뜸보' 즉 원종으로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법흥왕의 원래 성씨가 모씨라고 하더라도 모(募)씨와 모용(慕容)씨는 다르지 않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여기에는 몇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볼수 있는데 첫번째는 신라로 들어간 모용씨가 혼동을 피해 모씨라는 단성을 썼을 가능성이다. 삼국사기에서 전연의 국왕인 모용황이 고구려를 치는 기록에서 전연의 장군 모여니(募與泥)라는 인물의 이름이 등장한다. 모여씨 역시 모용씨와 비슷한 위치의 귀족 성씨였다. (지배선 저 '동북아시아 연구- 모용왕국사')
같은 모용씨의 후손이 한문으로 성씨를 표기하면서 '모용'과 '모여' 두가지로 나뉜 것은 원래 선비족의 언어가 한문으로 표기하다 보면 '모용'이 되기도 하고 '모여'가 되기도 했으니 혼동의 소지가 있다. 모용씨로 표기하기보다 간단히 모씨로 표기하면 도욱 분명한 성씨가 될수 있기 때문에 '모'자만을 성씨로 채택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신라는 복성(復姓)이 아니라 단성(單姓)을 쓰는 문화였다.
두번째는 모용씨 계열의 신라 국왕 스스로가 본래의 성씨를 밝히길 원치 않았을 가능성이다. 모용씨의 나라 전연은 370년 전진에 의해 멸망하고 384년 후연이 건국되었지만 407년에 멸망한다. 신라를 정복한 모용씨 계열로서는 기댈 언덕이 사라진 셈이다. 반면 중국의 남북조 왕조나 고구려는 모용씨 선비족의 침략을 많이 받았으니 모용씨를 아주 적대했을 것이 분명하다. 신라는 내물왕 집권기인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의 간섭을 강하게 받았는데 혹자는 부용국 위치로 추락한다고 말할 정도였자. 이런 상황에서 석씨 왕조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장악한 모용씨 계열 세력이 고구려가 싫어하는 모용씨를 굳이 쓰지 않고 앞 글자만을 따 모씨로 얼버무렸을 가능성이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의 역사서는 법흥왕의 성씨를 김(金)이 아닌 모(募)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김씨 왕실의 성씨가 선비족 모용씨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모용씨의 시조신화와 신라의 건국설화는 매우 유사하다.
모용씨의 시조신화에는 '모용외의 12대 조상인 건라(乾羅)가 어느날 저녁에 갑옷과 안장을 갖춘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라는 간단한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 국조 박혁거세의 설화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큰 알을 품고 있는 흰 말을 발견하고 다가서자 말이 사라지고 알을 깨어본즉 어린아이가 나와 소벌공이 데려다 길렀더니 나이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여 육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하였던 까닭에 높이 받들어 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는 내용이 있어 두 설화 모두 흰 말이 등장한다는 점이 같고 건라(乾羅)란 이름이 신라(新羅) 가라(加羅)와 비슷한 것도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전성한 저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역사')
이러한 유사성과 당시 정치적 배경을 살펴봤을 때에 신라에 북방 유목민족의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이 4세기에 갑자기 출현한 것은 유목민족이 한반도 동남부에 진출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신라의 정치적, 문화적 변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종족은 바로 모용씨 선비족으로 추정되어 진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휘가 김원종으로 전해지는 법흥왕의 원래 성명이 중국 역사서와 국내 금석문에는 다르게 나타나는 점,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도 법흥왕의 본래 성씨가 김씨가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을 통해 신라 김씨왕족의 기원이 바로 모용씨 선비족에 있으며 유목민족 국가의 전통적인 묘제가 고구려를 관통해 4세기 한반도 동남쪽 신라에 번개처럼 등장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전연의 일부 군사력이 남하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려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의 기록이 적어 추측으로밖에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적석목곽분이라는 무덤양식의 성격과 당시의 정황과 정치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모용씨 선비족의 신라 정권 찬탈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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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길다고 느껴졌든 설연휴
짧게만 느껴진 아쉬움 남기고
어제가 끝으로 즐겁고
행복했든 명절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구정으로 맞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대망의 2020년
희망하시는 모든일 복주머니
가득 담으시는 한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