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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서북지방 사경회 부인반 |
▲ 남산현교회 부인반 |
1. 들어가는 말
한국기독교회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감옥에 있는 인사들과 그 가족을 돕는 활동에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를 후원하고 독립군 무기(獨立軍武器)를 후원하는 모금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서울에서는 1919년3월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가 조직되었고, 1919년4월에는 “조선애국부인회”(朝鮮愛國婦人會)가 조직되었다. 이 두 단체는 1919년6월에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로 통합하고, 총재에 오현관(吳玄觀), 회장에 오현주(吳玄州)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기독교여성을 중심한 학교와 병원 등 사회기관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대한애국부인회, 남산현교회 여선교회 임원들(앞줄중앙, 회장:김세지) | ||
그러나 1919년 6월, 평양에서는 “남산현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秘密結社 大韓愛國婦人會)가 결성되었고, 각 교회 여선교회(女宣敎會)를 지부로 조직하여 활동한 여성독립운동(女性獨立運動) 연합단체가 있었다. 여기서는 평양의 비밀결사인 감리교회여선교회(監理敎會女宣敎會)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밝혀 보고자 한다. 이 자료는 1921년(大正10年) 3월1일에 발행된 것으로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일제 해군대장)의 서언과 복면유생(覆面儒生)의 이름으로 저술되었고, 부록에는 3.1운동 이후 2년 동안의 경과와 검거 및 재판에 대한 사실이 첨부되어 있다.(참조-覆面儒生: 朝鮮獨立運動騷擾史論, 1921年.)
필자는 이러한 검거 및 재판기록을 중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검거”(秘密結社 大韓愛國婦人會 檢擧)를 중심으로 살펴보려한다.
2.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의조직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된 애국부인회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감리교회는 1919년6월 초순(大正8年) 평양 서문(西門) 밖 백동화(白東㦊)의 집에서 박승일(朴昇一), 이성실(李誠實), 손진실(孫眞實), 최순덕(崔順德) 외 2명이 모였다. 박승일은 당시 조선의 현실과 독립운동의 상황을 설명하고, “남자만 독립운동 하도록 하고 부인이라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우리 동포에 대한 의무에 상반될 뿐 아니라 남자에 대하여 대치(大治)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도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위해할 수 있는 일을 노력하여 나감이 마땅하다”고 하여,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를 원조해야 할 것을 설명한 후 일동이 찬성하였고, “희생을 할지라도 조선 독립을 위해 열심히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임원을 선출한 후 산회하였다.
동년(1919) 6월 중순에 다시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南山峴 監理敎會) 유치원에 모여 협의회를 개최하였으며, 7월15일에 동 교회에 다시 회집하여 임원개선과 회비제정, 독립활동에 대하여 비밀리 의논하였다.
한편 장로교회측도 1919년6월 하순(大正8年) 한영신(韓永信)이 발기자가 되어 김보원(金寶源), 김복용(金福用), 김신희(金信喜) 외 수명이 한영신의 집에 모여 동일한 내용의 회의를 열고, 한영신을 회장으로 하고 임원을 선출한 후 산회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들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가지고 비밀결사단체인 애국부인회를 각각 조직하였고, 이어서 규합하는 일, 회비징수, 군(軍) 자금모금, 독립사상 고취, 결사대 독립단(決死隊 獨立團)과 기타 독립운동원들을 후원하는 원조금 등에 관하여 결의하고 활동하던 중 상해 임시정부 연락원인 김정목(金貞穆), 김순일(金淳一) 등의 권유로 연합키로 했다. 감리교회는 동년 8월 중순에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에서 장로교 측과 연합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장로교회 측도 동월에 김용복(金用福)의 집에서 주요 간부 8명이 모여 감리교회 측과 연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상순에 평양부 신양리(平壤府 新陽里)의 김경희(金景姬) 집에서 양교 간부 각각 6명이 협의회를 열고 합동키로 결정하고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라 명칭 하였으며, 본부를 평양에 두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할 것과 본부임원을 양교에서 공평히 선임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이미 조직되어 있는 양교(兩敎)의 부인회는 지회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모임에서 지방 각 교파의 부인신도들에 권유하여 지회를 설치하고 회비 외에 군(軍) 자금을 모금하도록 결의하였다. 그 후 총재로 오신도(吳信道) 여사를 선출하고, 회장과 임원을 선정한 후 산회하였다.(본부 임원은 “체포 및 검거자 명단”을 참고할 것.)
본부 총재인 오신도 여사는 남산현 감리교회 전도부인으로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上海臨時政府議政院) 의장인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모친이며, 당시 존경받던 인물의 중심이었고, 평양감리교회 지회의 서기인 손진실(孫眞實)은 손정도 목사의 장녀였으며, 당시 지각 있는 여성들이 대거 참여하여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 여성들의 단체인 점에서 관심을 끈다.
3. 대한애국부인회의 활동 및 검거
▲ 고문도구들
“대한애국부인회”로 통합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각 부인회는 지부회로 확장 조직키 위해 교회와 감리교회 병원인 평양 기홀병원(記笏病院) 간호원실에서 각 지부 대표자회를 개최하고 상황을 청취하며 계속 지회를 조직해 가면서 결의사항을 전개해 나갔다. 동회(同會)는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원조하고 독립군의 무기를 지원키 위한 목적으로 모금운동을 펼쳐서, 2,400여 원을 모금하여 2차례에 걸쳐 송금하였다.
제1차는 김순일(金淳一)을 통해 917원 과 금은(金銀) 지환을 보냈으며, 제2차로 1,190원을 오신도(吳信道)와 안정식(安貞錫)으로부터 김정목(金貞穆)에 전해져 송금하여 합계 2,107원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232원은 자체 경비로 사용하였다.<大正9年, 11월7일 매일신보(每日申報) 참조>
이때 일본경찰은 교회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여 왔으며, 박세환(男, 朴世煥)이 독립운동을 위해 각 지방으로 순회하는 것을 요시찰 하던 중 송성겸(宋聖謙)으로 하여금 애국부인회를 증산(甑山)지방에도 지회를 조직토록 하고, 군자금을 모집케 하는 것을 포착하고 송성겸을 체포하여 취조하던 중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1) 모금된 금액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부: 총재 오신도(吳信道)의 취급액 200원, 회장 안정석(安貞錫)의 취급액 400원, 부회장 한영신(韓永信)의 취급액 800원, 최순덕(崔順德), 이성실(李誠實)의 취급액 98원. 본부 취급액 합계 1,498원.
지회: 평양 감리교회지회 119원, 진남포감리교회 지회 185원, 강서감리교회 지회 50원, 증산감리교회 지회 78원, 함흥감리교회 지회 15원, 평양장로교회 지회 320원, 진남포장로교회 지회 100원, 순천장로교회 지회 52원. 계919원. 총계 2,417원.
2) 체포 및 검거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감리교회 측 78명
오신도(吳信道, 61. 본부총재
안정석(安貞錫, 38. 본부 회장)
김세지(金世智, 55. 본부재무)
송성겸(宋聖謙, 44. 증산지회장)
최순덕(崔順德, 본부 교통부장)
이성실(李誠實, 23. 교통부장, 적십자부장)
안경신(安敬信, 25. 교통부원, 강서지회장)
홍활란(洪活蘭, 28. 적십자부장)
정월라(鄭月羅,26.적십자부원.본부재무부장)
최매지(崔梅智, 24. 서기 진남포지회장)
주광명(朱光明,26.부서기 진남포지회 재무)
김신희(金信喜, 26. 회원 적십자부장)
박몽애(朴夢愛, 23. 회원)
손진실(孫眞實, 평양지회 서기)
이성실(李聖實, 평양회원) 外 8명
박승일(朴承壹, 25. 평양지회장)
박현숙(朴賢淑, 25. 평양지회 부회장)
안애자(安愛慈, 48. 진남포지회 회장)
이선순(李善順, 22. 진남포지회 재무)
양진실(梁眞實, 29. 진남포지회 모집원)
오유덕(吳有德, 진남포지회 회원) 外 22명
강현실(康賢實, 29. 개성지회 재무)
김명덕(金明德, 37. 개성지회 모집원)
박치사(朴致思, 41. 증산지회 재무)
이순미(李淳美, 40. 증산지회 모집원)
최병록(崔炳錄, 함종지회 회원) 이하 8명
박숙선(朴淑善, 증산지회 회원) 이하 8명
최영실(崔永實) 이하 6명(신양리 지회원)
장로교회 측23명
한영신(韓永信, 34. 본부 회장)
조익선(趙益善, 30. 본부 재무부장)
김보료(金寶療, 본부 부재무)
최명실(崔明實, 28. 서기)
이겸랑(李謙良, 26.서기 및 평양지회 서기
강계심(姜啓心, 40. 평양지회 회원)
김용복(金用福, 31. 평양지회 회장)
황복리(黃福利, 22. 평양지회 부회장)
이복석(李福錫, 23. 평양지회 재무)
최영보(崔永保, 23. 진남포지회 회장)
이성계(李聖季, 26. 진남포지회 재무)
김도민(金道敏) 이하 7명(진남포지회원)
김성심(金誠心, 38. 덕흥리 전도원, 모집원)
박복녀(朴卜女) 이하 4명(진남포 지회원)
임시정부 연락원(3명 男)
김정목(金貞穆, 23. 임시정부 연락원)
김순일(金淳一, 27. 임시정부 연락원)
박세환(朴世煥, 27. 미상)
총 106명- 監理敎 78명, 長老敎 25명, 男子 3명
체포된 여성들은 평양 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오미(五味) 재판장의 징역 3년, 2년 반, 1년의 언도 받았고, 복역 후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특히 61세의 고령인 총재 오신도(손정도 목사 모친)는 징역 1년 판결 받아 관심을 끌었고, 본부회장 안정석은 2년6개월, 평양지회장 박승일(26)은 징역3년 등 1-3년의 징역 판결 받았다.
▲ 동아일보 1921년 2월 27일자- 재판판결 언도에 “피고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조금도 놀라지 않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고 보도했다. |
▲ 복역 후 출소한 평양 대한애국부인회-임원들(1922년) |
감리교회 여성들은 교회 내 여선교회 조직을 통해 지회를 형성해 나갔고, 독립군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혹독한 형벌과 투옥 후에도 독립투쟁의 의지 꺽이지 않고, 더욱 불타올랐다. 총재 오신도는 며느리 박신일(손정도 목사의 부인), 손녀 손진실(손정도의 장녀)과 함께 복역 후 중국 길림으로 망명하여, 상해 등으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국내와 연계 무장투쟁으로 이어 나갔다.
▲ “여자폭탄범 안경신은 사형선고”와 사진(동아일보 1921.6.12.)-당시 임신 중이였음. |
안경신(安敬信)은 평남 강서지회장으로 상해독립군을 돕는 모금과 금액을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었으며, 그 후 상해 광복군(光復軍總營)에 투신하였고, 항일투쟁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국제 여론을 깨우치기 위해 평양도청과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사형언도까지 받기도 하였다. 항소운동으로 10년 복역 후에도 독립투쟁의 결의를 불태웠다. 그후 생사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애라(李愛羅)는 이규갑 목사의 부인으로, 당시평양 정의여학교 교사로 3.1운동과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러시아로 망명 도피 중 함북 옹기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역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감리교회 평양애국부인회 여성들은 대부분 전도부인으로 서북지역 교회 개척 전도인들이었고, 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분들이었으며, 검거선풍이 일어났을 때 체포되지 않고 도피한 회원도 수십 명에 달하였다. 체포복역 된 임원 및 회원들은 후에 건국훈장, 대통령 표창 등을 받아 보훈처에서 기리고 있다.
4. 맺는말
이상에서 우리는 1919년 3.1운동 직후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 안에서 일어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여성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신앙을 통한 자각된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교파의식을 떠나 연합하여 협력해 나간 모습도 볼 수 있다. 감리교회의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상해 독립군 무기 지원으로 머물지 않고, 광복군에 투신하여, 무장투쟁으로까지 전개해 나갔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진남포 지회 회장이었던 최매지 여사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즉, “1919년 평양에는 오신도(吳信道, 孫元一 제독 祖母) 씨를 위시하여 박승일, 박정석, 한영신, 박현숙 씨 등이 대한애국부인회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나는 이 회가 조직되기 전 진남포에서 애국동지를 모아 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한 달에 한번 씩 친목회도 모이고, 저명하신 분을 초청하여 좌담회도 열고 믿음직한 일을 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비밀결사대라는 이름을 공공연하게 말할 수는 없으므로 교회 내에서 신임할 수 있는 분들 중 40대의 아주머니들을 만나 우리 목적을 이야기한 후 몇 분을 회원으로 하고 동우회에서도 몇 분을 추려서 우선 회비를 거두어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보내는 일에 주력하였다.”
최매지 여사는 계속해서 비밀히 다니며 회비를 모금하던 고생을 회고하면서, “자유로 못 다니는 몸들이라 한번 오고가는 일이 피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고 하면서, “1920년 8월 어느 날 신흥감리교회 여선교회 월례회일이 되어 회장인 내가 사회하고 있는데 보지 못하던 남자 3명이 나타나 문 앞에서 한참 들여다보더니 없어진 이후 나는 강서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고, 참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여기서 106명의 동지들이 잡혀 온 것을 알았다고 하면서, 그 고생하던 얘기를 다 쓰면 눈물 없이는 못 있을 것이다”고 술회하고 있다.
당시 평양지회 부회장이었던 박현숙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즉,
“부인회 사건이란 상해에 있는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는 운동을 부인들의 힘과 정성을 바탕으로 전개했었다. 혹은 금반지, 비녀, 머리타래, 부인들이 아끼던 모든 물건을, 그리고 현금을 나라의 독립운동에 흔연히 헌납해 왔던 숨은 독립투사들의 지하운동이었다.”(“아아 三月”, 女性東亞 1971.3.월호 부록)
여기서 우리는 바울사도의 심정과 같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3)는 신앙의 결단과 헌신희생의 성숙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으로 이러한 기독교 교회의 여성독립운동 방면의 연구가 계속되어 교회의 역사적 사명을 일깨우고 인식시키며, 민족구원의 성업을 이루고, 민족역사 속에 뿌리박는 한국 기독교가 되도록 추구하는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감리교회는 이러한 신앙의 유산으로 오늘에 임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민족구국, 민족선교(民族宣敎)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힘차게 나가야 할 것이다.(rch)
▲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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