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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 장릉(章陵) /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
장릉(章陵)은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인조의 양친인 조선왕조의 추존 임금인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가 안장된 왕릉임. 사적 제2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릉이라는 능호는 조선왕릉 중에 총 세 군데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장'에 해당하는 부분의 한자는 모두 다르다.
◈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 : 조선 추존왕 원종(인조의 생부)과 추존왕비 인헌왕후(인조의 생모)를 모신 쌍릉으로 이 왕릉은 글 장(章)자를 사용한다.
◈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인헌왕후를 모신 합장릉을 말하며 이 왕릉은 길 장(長)자를 사용한다.
◈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 : 조선 6대 임금 단종을 모신 단릉으로 이 왕릉은 장중할 장(莊)자를 사용한다.
김포의 장릉은 현재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데, 이 능은 '장릉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인조의 능은 파주에 있기 때문에 '파주삼릉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보통 조선 왕릉의 입장료는 성인 기준 1천원이지만, 김포시 시민일 경우 5백원만 받는다. 단, 신분증이 있어야 하니 주의할 것.
주변에 김포 시가지와 묘지, 공단 등 난개발이 심하다. 심지어 건너편에는 검단신도시가 개발 중이다. 이렇게 된건 정원군이 죽었을때 최초 묘소는 남양주에 있었다가, 김포로 이장할때 대원군묘로 조성되어 부지가 작았는데, 왕으로 추존되면서 부지를 넓히거나 이장을 따로 못하고 추가로 석물과 정자각만 더 갖추었기 때문. 실록에도 석물을 옮길때 주변 농지를 망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기사가 있음.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장릉(章陵)은 제16대 인조의 부모인 원종(1580~1619)과 인헌왕후(1578~1626) 구 씨를 모신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태도가 신중하고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 했던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왕을 뜻하는 '종'이라는 묘호를 갖고 있음에도 원종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그가 생존 당시의 왕이 아니라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원종은 사망할 때 정원군인 '군'의 신분이었으므로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왕이 되자 이미 고인이 된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10년 후에 묘호가 원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묘도 원으로 추승되어 흥경원이라 했다.
이후 원종의 무덤은 현재의 자리인 김포시로 옮겨지면서 장릉이 되었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남다른 대접을 받은 셈이다. 인헌왕후는 아들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이라 했다. 1626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김포 성산 언덕에 예장했다가 원종의 능인 현재 자리로 천장했다. 김포 장릉은 육경원에서 왕릉으로 변경되었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쌍릉 형식이다.
정원군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선조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왕이 되자 정원군은 잠재적인 정적으로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 김 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 때문에 광해군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성품이 호탕하고 인물이 훤칠하며 무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마침 능창군이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는 상소가 들어왔다. 그러자 광해군은 곧바로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죽였다. 광해군 7년(1615)에 일어난 이른바 '신경희 옥사'다.
정원군이 더욱 낙담한 건 아들을 잃은 지 2년 후였다. 지관 김일룡이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라고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새문동터는 정원군이 살던 집터로 광해군은 결국 그곳을 빼앗아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을 짓게 한다.
정원군은 광해군이 나머지 아들들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술로 달래다가 40세의 나이에 화병으로 죽는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불안한 광해군은 정원군이 무덤 자리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도록 장례 기간을 단축하라고 재촉하며 조문객을 감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새옹지마'에 들어맞는 상황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정원군과 광해군의 싸움에서 광해군이 완승했다.
그러나 정원군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623년에는 광해군이 쫓겨나고 정원군의 큰아들인 능양군이 왕에 오른다. 광해군이 정원군에게만 신경을 썼지 실제로 왕의 기운은 능양군에게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원군의 부인인 인헌왕후는 아들이 왕이 되자 남편의 한을 풀듯 빼앗긴 새문동 집터(경덕궁)로 되돌아가 몇 년을 살다 1626년에 숨을 거둔다.
김포 장릉 알아보기에서는 김포와 장릉, 능주의 생애, 장릉의 변화와 공간 특성, 왕릉을 관리하던 사람들을 주제로 다루었다. 장릉지(1777년 처음 작성한 장릉기록) 등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궁능유적본부에서 직접 개발한 장릉 캐릭터 ‘참봉’과 ‘판노미’를 통해 더욱 친근하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특히 왕릉을 관리하던 관원과 군인이 어떻게 능을 보호하고, 각자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알아보기'에서는 장릉이 포함된 세계유산 조선왕릉에 대해 폭넓게 알아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세계유산으로서 "조선왕릉"의 가치와 40기 왕릉의 전체 정보를 담은 무인안내기(키오스크)를 통해 상세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