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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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정초
전북 장수읍長水邑에선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침략자 왜장을 붙잡고, 함께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사당을 새로 짓고, 그 안에 영정을 모시려는 유지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일찍이 논개의 출생지였다는 장수읍의 관민 유지들은 적당한 화가를 수소문 끝에 고종 순종의 어진을 그린 초상화의 대가 서울의 동양화가 이당을 모시기로 했다.
그렇게 의논이 되자, 그들의 대표 몇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당은 장수 유지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그는 일단 전주로 내려가서 전에 춘향이와 이충무공의 영정을 그릴 때처럼 사화史話의 논개가 어떻게 그려져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현지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역사적인 인물상을 그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능한 한 고증문제부터 해결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전주에 내려간 이당은 이재호李在鎬 등 당지 여러 인사와 논개상의 윤곽에 대하여 신중히 의견을 교환했다. 어느 정도 의견이 접근하자, 그는 유숙한 여관의 특실을 빌려 곧 제작에 들어갔다. 다음은 그때의 상황을 전하는 당시 전북일보의 기사이다.
* 이당 김은호선생에 의한 논개 초상화 제작이 마침내 착수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동양화의 거장이며 특히 과거에 많은 초상화를 그린 경험을 가진 이당선생은 민족정신의 상징으로서 모시게 될 논개의 초상화를 자기의 독창으로만 제작하게 될 것을 경계하고, 그리 많지 않은 사적이나마 충분히 고증함과 아울러 지방 유지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모임을 가질 것을 요청하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15일 하오, 시내 태양여관의 이당선생 임시화실에서는 이당화백을 중심으로 논개 사적에 조예가 깊은 이재순李在淳씨를 비롯한 사계의 연구가들 십여 명이 모여 2시간에 걸쳐 논개의 사적, 출신, 성격, 용모 등이 논의되고, 이를 화면에 나타낼 표정, 스타일, 의상 등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던 바, 앞으로 20일 내에는 가로 2자 5치, 세로 5자의 논개 초상화가 완성될 것이 기대되고 있다.
1955년 3월 17일, 조선일보는 전주발 기사로 다음과 같이 이당의 논개영정 제작의 중간 소식을 보도했다.
〈전주〉 조국의 위기를 구출하기 위하여 진주 남강에서 왜장의 허리를 휘어잡고 물속에 뛰어 들어 왜장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의기 논개의 충절과 의거를 길이 찬양하기 위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의 출생지인 장수에 비치하게 되었다. 즉, 당지 유지들의 초빙으로 지난 달 15일부터 이곳에 와 있는 동양화의 거장, 이당 김은호화백은 이재호씨를 비롯하여 사계의 권위자 십여명을 초청하여 논개의 출신지, 성격, 용모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한 끝에 길이 5척, 폭 2척 5촌의 초상화 제작에 착수한 결과, 수일 전에 완성하였으므로 불일내에 그 출생지이며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전북 장수군에 사당을 짓고 비치하리라 한다.
앞의 기사는 또한 이당이 전주에서 완성시킨 논개의 아리따운 입상의 사진을 함께 게재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이당 김은호의 논개 초상
같은 때, 전주일보 문화면에는 전주의 화가 김용봉金用鳳이 이당의 논개상을 보고 “전형적인 고전미.” 라는 글을 기고했다.
___ 2, 3일전 하오 4시경, 우리 화단의 거장 이당 김은호화백의 휘호인 논개 초상화를 감상키 위하여 가슴을 두근거리며 태양여관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마침 화백은 외출 부재이시고, 벽에는 화조화만 2, 3점 걸려 있었고, 초상화는 보이지 아니 하였다. 화백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의 공간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여러 가지 공상에 잠겼었다. 노경이신데도 불구하시고 화도에 정진하시는 성실하신 화백의 모습도 상상하여 보고, 임진왜란 때 왜적이 물밀듯 몰려와 우리 강산이 들끓던 정경도 더듬어 보았다. 진주성이 중과부적으로 함락하여 왜놈들이 개가를 올리는 지옥 같은 소리를 생각하고 소름을 끼쳐 보기도 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살벌한 전쟁터의 일각, 촉석루 밑에 너무나 대조가 뚜렷한 한 떨기의 화려한 꽃, 논개가 표연히 나타나 왜장들을 뇌살하고 무한한 매력으로 사로잡아 왜장과 더불어 술잔을 주고 받게 되고, 만취한 왜장의 목을 끼고 촉석루의 꽃으로 산화하신 의기 논개를 생각하고 눈이 뜨거움을 느꼈다.
귀공자 타이프의 화백이 외출에서 돌아 오셔 청수한 얼굴에 연방 미소를 띄우시고 불필요한 내객인 나를 환영하여 주셨다. 그리고 손수 초상화를 보여 주시며 광선이 밝아야 잘 보인다고 문을 열어주며 친절히 보여주시었다. 찬연한 화폭에 숨을 죽이고 잠시 무아경에 들어갔다. 착종錯綜한 감정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양화에서 볼 수 있는 색조, 특히 반영(뉘앙스), 구도, 중량감(볼류움) 같은 것과 금일 유행되는 동양화는 지금 논의할 것이 아니라 인물의 포우즈도 교묘한 선, 클라식한 노련한 수법으로 신품에 가까운 창작을 하시었다.
초상 논개의 얼굴을 응시하고, 또 한 번 감명과 상상에 잠겼다. 어제는 박서방, 오늘은 김서방 하는 들뜬 현세대의 일부 군상의 환영을 받는 남성을 뇌살하는 요염한 요부妖婦 미인형은 아니다. 남성의 의지대로 정복되는 우상 같은 백치미인형도 아니다. 청결함과 지성미 ―의리감에 강한, 조국애에 불타는― 를 가진 전형적 고전적 미인형이다. 미간이 넓고, 눈이 호수 같이 맑은 것은 총명과 기지를 말하고, 다문 입은 겸손하고 내성적이나 굳센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으로서 여러 가지 생활 경험 만고풍상을 겪어 체험한 참된 깊이와 넓이를 가진 미! 매혹적이나 박朴과 소성素性을 가진 범할 수 없는 모습이다. 퇴폐미는 추호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표현은 미인화의 제1인자인 노대가이신 화백의 영년永年의 수양과 품이 있는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지 우연한 것은 아니리라. 수인의 유지가 각자의 감명과 찬사를 아끼지 아니 하고 떠들어대는 가운데 나는 나 혼자의 동중정動中淨의 고독 속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나 자신의 공상과 감흥 때문에 홀홀히 귀가의 발길을 옮겼다. (하략) ___
- 전주일보 -
같은 지면 한쪽엔 또한 전주사람 연포然圃 이재순李在淳의 한시 「 배의낭영정(拜義娘影幀) 」 이 이당의 논개상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整我衣巾拜義娘 視死如歸紅一朶 정아의건배의낭 시사여귀홍일타
焚香默立恨心長 成功至大記千章 분향묵립한심장 성공지대기천장
江聲嗚咽前朝事 純忠雄志吾郷產 강성오열전조사 순충웅지오향산
草色棲凉近夕陽 永使相傳萬古芳 초색서량근석양 영사상전만고방
- 전주일보 -
이당의 논개상은 전주와 그것이 봉안되는 장수 일원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유지들이 끊임없이 이당이 유숙하고 있는 여관으로 몰려와선, 왼손을 뒤로 돌려 치마 자락을 잡고 일어서있는 이지적인 미기상의 논개에 모두들 황홀하여 감탄하곤 했다. 말로만 얘기하던 논개가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져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감동하여 환성을 올렸다.
논개의 영정이 드디어 장수로 보내지려던 때였다. 마침 전주에 내려왔던 서울의 한 인사(금융조합연합회 회장)가 이당의 임시 화실이 되어 있는 여관방을 찾아왔다. 그는 전주의 유지 몇 사람을 앞세우고 와서 정중히 초면 인사를 끝내더니,
“이당화백께서 그리신 논개 화상이 너무나 절색이고 신필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번 구경하고 싶어서 졸지에 이렇게 방문했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하고, 방문한 동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당은 점잖은 방문객에게 그의 논개상을 보여주었다. 방문객은 한동안 그 미기의 아리따운 자태와 세필채화의 눈부신 폭에 매혹된 듯하더니 또 다른 요청을 꺼냈다.
“부탁이 있습니다. 화백께서 이와 똑같이 논개를 하나 더 그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건 저의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전주에 내려왔다가 뜻밖에 이당의 논개상을 보고 반한 서울의 인사는 이당에게 또 하나의 논개를 그리게 해서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는 조르다 시피 간청하여 마침내 승낙을 받았다.
다음날부터 이당은 전주에 눌러 앉아 크기 자태가 똑 같은 또 하나의 논개의 전신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완성되는 동안 장수의 유지들은 화백에게 적절한 사례와 감사를 표시한 뒤 다 그려 놓은 논개의 영정을 가져갔다. 화백은 장수까지 따라가진 않았다. 그리고 두 번 째의 논개상이 끝나자 서울로 갖고 올라 와서 표구를 한 뒤, 청탁자에게 보내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두 번 째의 논개상은 요청자가 말했던 대로 과연 경무대에 들어갔더란다. 그러나 몇 달 후, 이 논개상은 진주의 촉석루 옆의 논개사당으로 내려갔다. 이대통령이 논개상의 정위치를 그리로 정해준 것이다.
그것을 선물 받고 이대통령은 처음엔 무척 기뻐하더니, 하루는 진주의 촉석루에 논개의 영정이 있느냐고 측근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측근자는 즉각 그 사실을 현지에 알아보았다. 했더니 사당은 있으되 영정은 봉안하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였다. 대통령은 측근자에게 지시했다.
"이 논개를 진주 촉석루로 내려 보내게. 논개도 여기보단 촉석루 쪽에 가 있고 싶을 걸세.”
결국 이당의 두 번째의 논개상은 잠시 경무대로 들어갔다가 그의 고혼이 살아 있을 진주 남강 기슭, 촉석루 곁으로 내려갔다. 당지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논개상을 대통령으로부터 하사받고 감격했다.
[ 論介 ]
유형시대출생 연도사망 연도성별
| 인물/전통 인물 |
| 조선 |
| 1574년 장수 주달문 밀양 박씨 사이에 출생 |
| 1593년(선조 26-19세) 진주성 2차 전투 후에 의암에서 적장과 투신 |
| 여성 |
목차
- 정의
- 개설
-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의기(義妓)로 알려진 기생.
개설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논개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논개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논개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논개의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논개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논개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 출신이며, 양반 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경회는 1532년생으로 임진왜란 진주성 싸움 당시 62세였으며 촉석루에서 투신하였다.
황진은 1550년생으로 임진왜란 진주성 싸움 당시 44세였으며 왜군에 의해 암살 최경회 보다 하루 전에 순국하였다.
논개는 1574년생으로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시에 20세였다.
그러나 문헌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