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8-25. 예수의 혁명 양 은식 목사
로마의 남쪽, 나폴리 항 근처에 있는 '폼페이'라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집 같은 것은 한 채도 없습니다. 옛날에 도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만 있을 뿐이지요. 이 잔흔(殘痕) 위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가 여기에 있었던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구획이 정리된 도시였던가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운동경기장, 연회장, 호텔, 그리고 술집들, 거기에 공중목욕탕까지 완벽하게 갖춘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신전(神殿)이 있었던 자리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에 이미 상수도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본다면 까마득한 삼국시대라고 해야 고작 1,500년 전인데, 2천여 년 전의 그사람들이 상수도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폼페이가 얼마나 화려한 문명의 도시였던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악의 도시를 하루아침에 심판하셨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용암 분출물이 이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며 웅크리고 앉아 죽은 개의 모습 따위가 고스란히 미이라가 된 채 남아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침실에서 그때의 몰골 그대로 돌이 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때에는 때로 이처럼 무섭게 역사 하십니다.
노아 때 홍수로 온 생물을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려 죽음의 바다 사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에는 이렇게 급격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일들이 일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役事)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살리는 것은 아주 어렵게, 긴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마구간에서 주님이 태어나시는 말구유 사건에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말씀이요, 이것은 계시입니다. 인간의 모든것, 인간의 문화, 인간의 도덕적 상황 ---- 바로 거기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는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첫째로 공동체적인 신앙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이나 미련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백하여 온 교회적인 신앙 고백을 나도 같이 고백하는 공동체적인 신앙이며 그 내용이 성서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바른 응답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신앙 자체를 하나님께로서의 선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이요 동일한 고백적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순교적 신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뜻은 기독교의 신앙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기독교적 신앙은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적 신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부활을 믿기에 웃으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은 현재 살아 있다고 해도 역시 순교적으로 사는 것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에 매이지 않고, 결코 사망에 굴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순교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기독교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이는 종말적인 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영원히 소망적이요 무한히 미래적이며 절대화된 신앙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문제 아니며 삶과 죽음도 문제가 안됩니다.
다만 영원한 생명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로써 기다림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결코 단순한 기대나 감상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관적 감정이나 소원이나 욕망을 뜻하지 않고 막연한 이상이나 무지개의 꿈도 아니며 컴퓨터의 예언도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의 기다림의 신앙 입니다.
먼저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Reality). 특히 성서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진리는 언제나 역사적이며 사건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인간의 심리나 특히 종교심, 혹은 종교적 본능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깨끗한 사실에 근거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세째로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욕망이나 본능적 필요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인 약속,
즉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고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또한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그것을 기다리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넷째는 약속의 성취(Fulfilmemt)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무지개처럼 항상 앞에 있고 무한히 미래적인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이며 현재적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확실한 구체적 체험에 근거하여 다시 보다 높고 보다 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취됨이 없는 약속, 실현성 없는 기대, 사실이 없는 기다림은 헛된 것으로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벌써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를 체험하면서 다시 주시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곧 참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것을 증거 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확실함과 정확함을 구구 절절히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예언들, 그 모든 약속들이 그처럼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면서 또한 우리의 현실 생활 안에서 또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그 말씀들이 분명하게 성취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이를 근거로 하여서 다시 멀리 보여 주시는 약속도 확실하게 믿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큰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것 바로 세상에 가장큰 혁명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른 분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를 믿는 것보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나를 아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일은 없다.”
즉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그분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하는 방법, 용서받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하시며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죄를 용서할 자가 없는데 자기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탄생을 축하하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신 분입니다.
자기를 경배하라 하셨고 자기 앞에 모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고백하며 경배했을 때 예수님은 “왜 나에게 경배하느냐?
하나님께만 경배해야지” 라고 하시지 않고 그 경배를 당당하게 받으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마6:35).
“죽는 자는 살 것이요, 살려 하는 자는 죽으리라”처럼
여러분과 저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어떤 문제?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들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환경적 문제들이 있지만 그 모든 문제들의 중심에는 죄가 있습니다. 죄를 가슴에 품은 인간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보다 죄의 문제가 제일 큰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는 물론 건강의 문제까지 해결될 것입니다.
죄 속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 속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라는 단어가 ‘구원자’(Savior)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육신의 사망뿐 아니라 영원한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 즉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현자들과 철학자,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인생의 진리 한두 가지를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 받고, 죄의식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점점 정결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한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셧습니다.
예수많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우리를 영원한 부활의 생명으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고 다스려 자유하게하며 영생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고 믿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