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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공동체 / 시 96:1-13, 요 20:19-23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이 4월도 다 가고 이제 5월을 우리는 눈 앞에 두고 있다. 5월은 4월에 비해 밝고 희망찬 달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먹구름이 우리나라를 덮고 있다.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한다. IMF의 한파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고 한다. IMF의 시련, 다시 한번 잘살아 보세를 위한 환난이 아니다. 경제가 피어나니 하나님을 멀리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고난이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신앙과 교회 생활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앙만이 이 어려운 난국을 헤쳐나갈 해답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궁극적인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생의 궁극적인 종말은 무엇인가 하는 생과 사의 문제이고, 결국 종교의 문제이며, 또 신앙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논하게 되면 자연히 건전한 종교, 인간의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그런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말하게 될 때 종교는 청시자가 있어야 하며, 그 종교의 교리를 말해주는 경전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종교라 한다면 반드시 뚜렷한 내세관이 있어야 하고,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생활하는 건전한 예배가 있어야 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모임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예배의 기능과 사명이며, 구체적으로 선교, 교육, 봉사, 성례전의 집행, 성도간의 친교, 이런 것이 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요,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교회의 기능 중에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른 말로는 예배 행위,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것, 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예배라는 행위가 대단히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시작된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며 모여서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 초대교회 예배 공동체의 형성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그 원형이 되는 사도시대의 모습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 예배의 중요성,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 얘배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고자 한다.
1. 먼저 예배의 중요한을 생각할 때 예배 드리는 날과 시간을 생각할 수 있다.
요 20:19절을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함께 모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는 주일은 안식 후 첫날이다. 한 주간이 시작되는 첫째날 예배드리기 시작하였다. 옛날 구약성서의 전통에서 보면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 안식일로 지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점점 희미해져 가면서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인 주일로 지키기 시작한 전통이 오늘의 주일제도로 정착하게 되었다.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축하하고 그 기쁨과 감격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모이기 시작한 예배가 주일 예배의 시작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이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섭리와 새 창조를 기념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내용을 서로 나누며 드린 것이라 말씀드릴 수가 있겠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여서 예배드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같은 특별한 시간의 의미는 하나님께 그 주간의 첫 시간을, 중요한 첫째날 지정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강한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감사와 회개와 간구를 드리는 것이 주일 예배 전통의 원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정한 날을 이렇게 지시한 것은 하나님께 바친 시간이라고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하는 매일매일이 예배하는 날이요, 매일매일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날, 우리 주님이 세상을 이기신 날, 주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셔서 승리하신 날을 주셔서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도록 특정한 시간과 날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러므로 시간시간, 매일매일, 주일마다 정해진 예배시간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다.
우리 교단 헌법에 보면 신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교회의 모든 규정에 순종하는 자는 신도가 될 자격이 있다라고 하면서, 한 지교회의 신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귐 곧 교회의 예배와 활동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아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전력을 바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화평과 친교를 도모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자의 의무 가운데 첫째가 공중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가 정한 공중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신자된 자의 기본적인 의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일 오후예배나 수요예배에 꼭 참석해야 되느냐? 그런 생각보다는 사랑하는 자는 자주 자주 만나고 싶어하듯이 믿음으로 생활하는 우리들은 예배 시간과 예배 행위를 중요시 하고 가장 우선 순위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 축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물론 안식일 제도나 주일 제도의 흐름은 전원적인 농경사회의 잔여물이라고 입증할 수도 있겠다. 산업사회 또는 산업 후기에 있는 우리들이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데, 한주일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율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훨씬 더 복음적인, 자발적인 의미에서 말씀드리자면, 예배시간에 아예 참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긍정적인 자세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려운 일이 많고 바쁜 일도 많지만 ‘오늘 예배에 참석해야 되겠다, 오후예배, 수요예배에 참석해야 되겠다’ 하는 이런 의지를 가지고 세상 시간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세상 시간을 맞추어 가는 이런 긴장감이 얼마나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러분, 제가 목사로서 ‘모든 예배를 잘 지키십시오’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너무 쉽다. 목회자들은 예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설교를 맡고 있지만, 여러분에게 제가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은 예배에 참석하려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우리들의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점이다. ‘한주일 교회에 빠졌으니 미안하다’ 하는 것보다 매일 마을에서 만난다 해도 주일은 교인들을 만나고, 성도의 교제를 가지고, 함께 찬송하고, 성서를 공부하고, 하나님 말씀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정한 시간인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주어진 시간, 결정되어 있는 이 예배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대교회는 예배드리는 날과 시간을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정하여 모였다고 요 20장은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제자들이 모여 함께 교제하며 예배드릴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그 가운데 나타나셨다’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예배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함이다. 성서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해설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하여 만난다. 기도를 통하여 만난다. 성령의 뜨겁게 하시는 양심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2.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주님을 뵙기 위하여,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 때문에,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가 아쉽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바른 신앙은 생활이며, 교회 출석하는 것이며,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공동체를 통하여 성장한다. 믿음이 약할 때라도 믿음이 강한 자들을 보면 내 신앙에 불이 붙는다. 슬픔에 처해 있을지라도 다른 슬픈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태도를 보고 내 신앙이 도전을 받게 된다. 신앙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가지 않아도 성서만 읽고 교리만 터득하면 구원받는다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는 훌륭한 믿음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예배 행위를 통하여 성장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함이다.
또한 예배의 중심 내용이 무엇인가?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이 사실이 있어야 한다. 예배학이란 책을 보면 ‘모든 예배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으면 그 예배는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의 예배가 직통으로 갈 수는 없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게 된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간구되듯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소망, 그리스도의 사랑이 거듭거듭 체험되고 다시 기억되며, 매일 새로워지는 체험이 고백되어져야 한다. 예배의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디.
3.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더러눈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예배를 본다와 예배를 드린다, 어느 말이 옳으냐? 의미를 포착하는데는 차이가 없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예배를 본다 보다는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 성서적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를 보면 예배한다와 예배 드린다 두 가지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고, 찬송을 하고, 예배를 드린다 하는 것이 오늘의 어법으로 보아서 본래 의미에 더 근접한 단어라고 생각된다.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는 결석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 이런 말은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안된다. 오지 않은 분들에게 ‘결석하지 마십시오’ 해야 되는데 오신 분들 보고 ‘결석하면 안됩니다’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혹시 결석하실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아주 잘라서 말하면 개인이 죽었다거나 중병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거나 부모가 돌아가셨다거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라도 예배 출석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열심히 에배드리는 자의 기본 자세는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우등상을 받는 것보다 중요시한 것이 개근상을 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예배드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하면 이 행위는 많이 드릴수록 좋지 않겠느냐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출석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오후예배도 부지런히 참석하기를 바란다. 수요예배도 빠지지 말고 찹석해야 한다. 예배드리러 올 때 혼자 오지 말고 자녀들과 함께 참석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몸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자녀들이 그것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말을 해도 설교는 설교대로 가고, 교회 출석은 내맘대로 가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또한 시간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늘적지근한 사람은 ‘예배만 참석하면 됐지’라고 생각하고 느지막하게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대개 사람은 자기가 늦어지는 시간은 경험으로, 직감으로 대충 느껴진다. 조금만 더 서둘러 일찍 와서 기도하고 주보를 읽어보고 성서분문을 찾아 읽어본 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면 훨씬 더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다음은 복장문제이다.
결혼식에 가는 복장과 시장에 가는 복장과 논밭에 일하러 가는 복장이 같을 수가 없다. 목욕탕에 가는 복장이 사돈을 만나러 가는 복장과 같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간다는 의식 속에서 ‘내가 복장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새로 사서 입고 오라는 말이 아니다. 깨끗한 것, 더렵혀지지 않은 것이라면 어떤 옷이라도 좋다. 남을 만나러 갈 때 이 옷은 창피해서 못 입겠다라는 옷은 예배에 입고 오면 안된다. 될 수 있으면 단정하게 누가 봐도 정성이 있는 복장이라면 좋다. 신발에 흙이 묻은 채로 오는 것보다 집에서 나설 때 물걸레로 닦고 오는 것이 보기에 훨씬 좋다. 정성의 문제이다.
또 하나, 헌금하는 자세이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진실로 감사하여 하니님 아버지 앞에 드리는 것이다. 어떤 분은 새 돈이 있으면 고르고 모아서 헌금한다고 한다. 낡은 것이나 새것이나 같은 것 아니냐 하겠지만 액수는 같아도 정성은 다르다. 헌금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정성의 문제이다.
다음은 설교를 듣는 자세이다.
설교 듣는 자세에 대하여 한가지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태도를 보면 설교를 듣는가, 아니면 듣기 싫어하는가를 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인지 설교를 듣는 것인지를 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겁주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한눈에 들어 온다. 저분이 설교를 듣고 있구나, 듣는 것처럼 하지만 딴 생각을 하는구나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겁주는 얘기가 아니라 설교시간에 집중해서 들으라는 말이다. 우리의 설교 듣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 집중해야 한다. 설교시간에 성서를 뒤적이거나, 주보에 낙서를 하거나, 옆사람과 소곤소곤 말을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모습을 다 보고 계신다. 저는 어린아기가 예배 때 교회에서 왔다갔다 하며 예배를 방해할 때가 있다. 그래도 저는 제지를 안한다. 왜? 어릴 때 교회 분위기에 젖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어릴적 생각이 삶을 지배하기에 그렇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예언이다. 칼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 말씀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이다’라고 말했다. 성서를 오늘의 말씀으로 증언하는 설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 성서, 이 셋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수천년 동안 기록된 과거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말씀으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풀이해서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유언장을 읽는 것이 아니고 오늘 성령이 오셔서, 오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직접 말씀하시는 사건으로 받아야 한다. 변화로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에 비할 것이 없다. ‘설교를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고 듣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예, 아멘‘으로 받아야 한다.
또한 찬송을 부를 때는 열심히 가사를 생각하면서 찬송해야 한다. 아무 의미없 이 불러서는 안된다. 얼굴 표정을 보면 그냥 따라서 아무 뜻없이 부르는지 어떤지를 안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공동기도를 드릴 때는 이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알고 드려야 한다. 오늘의 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는 한 사람이 하지만 나도 그렇게 기도한다는 기도의 참여가 있어야 하며,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축도 문제가 있다. 예배의 가장 큰 마감은 축도이다. 미국인들은 축도 시간이 되면 갈 가다가도 예배당 안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축도시간에는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이 한주간도 오늘 받은 이 말씀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함께 예배드린 분들과 인사하고 나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자, 정성을 들여서 예배를 드리자는 말씀이다. 물론 롬 12:1절 이하에 보면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예배가 되도록.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도록 살아가는 생활예배, 삶의 예배가 중요하다. 그러나 먼저 교회 예배부터 정성되이 드리게 될 때 생활예배, 삶의 예배도 가능해 진다.
4.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
오늘 본문을 보면 몇가지가 나타나 있다. 예배드릴 때 우리는 위로하게 하시는 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슬픔 마음있는 사람, 죄절한 사람, 믿음이 약한 자. 병 중에 고생하는 자에게 하늘의 위로가 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평화가 느껴지며 체험하게 된다. 특별히 죄 용서의 체험과 확신을 전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금까지 잘못했는데 오늘도 하나님 나를 인도하시니 이 은혜 감사합니다.’ 죄 용서의 체험을 하며 봉사에 대한 사명을 느끼게 된다.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한 가정이 있다든지 할 때, 도와주어야 하겠다든지, 이럴 때에 봉사하고자 하는 결심이 예배 행위를 통하여 생기게 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된다.
여러분, 예배 출석을 부지런히 하며 신령하게 정신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치고 범죄한 자, 하나님과 멀어지는 자, 기도를 멸시하는 자, 성서말씀을 게을리 대하는 자는 없다. 나의 나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겸손한 고백을 하게 된다. 영에 속한 자라야 그리스도인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다 하나님의 영에 자로잡힌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범죄하게 되면 가슴이 뛰고, 갈등이 생긴다. 예배를 통해서 얻는 것은 성령의 능력, 나를 새롭게 하시는 권능이 다이너마이트 같은 성령을 통하여 임재한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어떤 학자는 ‘교회의 예배는 교회의 목회의 출발이다’라고 하였다. 이같은 예배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또 이 성령의 역사에 응답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에 참여하는 일이다. 바른 그리스도인은 바른 예배 공동체를 떠나서 성장할 수 없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예배하는 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4월 마지막 주일인 오늘, 98년을 맞아 지난 네달 동안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고, 어떻게 예배를 중요시 했는지 이 시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남은 기간 나의 신앙생활의 우선 순위가 예배에 참여하는 일이요, 예배의 의미를 아는 일이요, 예배에서 얻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이라고 믿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