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목서 향기, 만리를 가다 / 봄바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듯 없는 듯, 푸른 자태 변함없이 자리잡고 있는 은목서를 보았다. 지금은 이렇듯 존재감이 없지만 꽃을 피우는 시기엔 나같이 무덤덤한 이의 발길마저 사로잡는다. 향기의 위력이란.
그녀는 대학시절 교생 실습 기간에 만났다. 과가 다른지라, 처음 같은 반에 배정되어서는 서로 어색했다. 하루이틀 지나며 배려가 몸에 밴 그녀의 태도에 맘이 열렸다. 담당 선생님의 열의나, 실제 수업의 어려움 정도의 말을 나누게 되었다. 그저 하소연 같은 내 말에도 눈빛을 빛내며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녀가 좋아 지루한 실습기간이 후딱 지나갔다. 하지만 다시 교정으로 돌아와서는 그녀를 까맣게 잊었다.
그러다 졸업 후 발령 받은 ㄱ군의 신규교사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다. 같은 군에 배정된 것이다. 집과 너무나 먼 곳이어서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내게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멀리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듯 포옹하고 두손을 꽉 쥐었다. 배까지 타야하는 나를 안타까이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자주 만나자 했지만, 배를 타야하는 처지라 쉽지 않았다. 대신 잠 못 이루는 날 편지를 썼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사와의 갈등이며, 동료교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세세히 적어 보냈다. 또한 배를 타야만하는 섬에서의 막막함도 함께. 마치 그녀가 곁에 있는 듯, 손이 가는대로 대충 써 보낸 내 글에 온 성의를 다한 정자체의 빡빡한 글이 가득 담긴 답장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생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 스쳐지나는 순간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힘들더라도 작은 즐거움을 찾아 즐겨보라는 그녀의 글이 경전의 한 구절처럼 절실하게 다가왔다.
즐길거리라곤 찾을 수 없던 곳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는 혼자서도 바닷가를 거닐고 언덕에 올라 해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풍경도 마음의 반영인 듯, 삭막하던 그곳이 날마다 다른 자태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정성어린 글이 준 용기로 혼자의 시간도 즐기게 되었다.
보석 같은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그녀와 나는 또 멀어졌다. 하지만 승진을 앞두고 먼저 걸었던 내 길을 밟아오는 그녀를 도울 기회가 주어졌다. 수업안을 함께 보며 수업 준비를 도와주다 예전의 따스한 정을 되살리게 되었다. 그시절 대학동기 여섯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그녀를 적극 추천했다. 조용하지만 어디서든 따스하게 정을 베풀고 배려할 줄 아는 그녀를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며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물었지만, 비밀로 묻어 두었다.
지금은 그저 잎푸른 한 그루 나무로 아파트 입구에 자리잡고 있지만, 꽃을 피우는 그날부터 향내의 근원지를 찾는 이들로 특별한 나무가 될 은목서. 그녀가 그렇다.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온기를 베푸는 그녀의 향기가 누구에겐들 미치지 않을까?
첫댓글 너무 진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친구 선생님의 향기가 코 끝에 닿습니다. 참으로 귀한 인연을 맺으셨고요. 인연이란 맺었다고 길게 이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라서, 봄바다님이 친주분께 어떤 상대일지도 짐작이 됩니다. 우리 동네도 은목서가 있는지 탐사 들어갑니다. 흐흐
은목서 못 찾으시면 언제든 우리 아파트로 초대합니다.
글 제목과 내용이 참 잘 어울립니다. 좋은 사람과의 인연을 적어서인지 아주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아주 아름다운 사람인데 재주가 부족해 다 살리지 못해 안타깝답니다.
저보다 더 늦게 올리시는 선배님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한지요. 고맙습니다.
은목서 향기 같은 그녀와의 인연, 잘 읽었습니다.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 40년간 쭉.
이 글은 제외할 거라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리는 듯하지만, 제 버릇을 어찌 하겠어요. 하하하.
은목서처럼 은은하지만 누군가의 발길을 잡는 글입니다. 인연의 진행형도 궁금해집니다.
인연의 소중함을 아는지라 가까이 지내면서도 그녀가 너무 배려만 하다 지치지 않도록 아끼고 아끼며 지낸답니다.
은목서의 계절이 오는군요.
우리 선생님들은 모두 향기 나는 사람입니다.
은목서. 선생님처럼 매력적인 이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