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19
류인혜
* 친숙해진 일행
2003년 10월 22일(수) 일정을 끝내고 호텔에 도착하면 꼼짝하기 싫어서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밤에도, 새벽에도 일을 만들어 다녔던 모양이다. 아침 식탁에는 새로운 화제가 심심찮게 나와서 지친 일행에게 활기를 준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주스와 커피만 마셨다. 맛있어 보이는 다양한 종류의 빵이 준비되어 있어도 먹을 수 없었던 것이 정말 유감이다. 아침에는 늘 속이 복잡하고 입이 깔깔하여 잘 먹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오늘은 로마와 만나는 날이다. 로마 시내를 관광하려면 열심히 걸어야 한다기에 간단한 옷차림을 했다. 그런데 비가 내리니 아침을 먹은 후 방으로 가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동안 아침마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는 차림들이 흥미로웠다. 각기 독특한 개성이 돋보여 과연 예술인이구나 감탄했다. 정한 시간에 호텔 로비에 모이면, 서로를 탐색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져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
어디서나 튀는 사람은 있게 마련인지 폼페이로 가던 날, 비가 오는데도 배낭을 메고 꽃 달린 모자를 쓰고 베이지색 긴 항아리치마를 입었던 사람의 감각은 일행을 미소 짓게 했다. 이 국장은 당연히 지나쳐 버리지 않고 “비 오는 데 긴 치마가 뭐냐”라고 한마디 했다.
인천공항을 떠나던 날에는 예술의 도시 파리로 간다며 초록색 투피스를 입고 스카프를 멋있게 두르고, 높은 구두에 꽃무늬 긴 핸드백을 들었던 사람이 있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만찬장으로 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파리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날씨가 추우니 내일은 이런 옷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다.
김 선생님 내외분은 어느 날 같이 흰색 계통의 자라목깃을 입어서 신혼여행 ‘커플 티’인가 하며 즐겁게들 웃었다. 사진을 찍으려면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며, 화려한 색의 스카프를 착용하기도 했었고, 선글라스를 낀 채 박물관의 그림을 감상한 사람도 있었다.
조 선생은 무거운 수동 카메라를 목에 메고 다니며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사진 기자처럼 붉은색의 모자를 썼는데 옷차림도 멋있었다. 필름 10통을 가지고 와서 9통을 찍었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사진을 열심히 찍으려고 필름을 많이 준비했었지만, 믿었던 디지털카메라는 충전이 어려워서 카메라 사용을 많이 했더니 필름이 없어서 걱정이다. 지사장은 파리를 거쳐서 로마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파리에서 정신없이 찍다가 필름이 떨어져서 로마의 좋은 것들을 지나쳐 버린다고 했다.
오래전 어느 사람의 여행기에서 그 사연을 읽은 기억이 났다. 시행착오는 미련한 사람을 만든다. 허 선생은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가끔 사진을 부탁했는데, 나대로 다른 것에 정신이 나가서 제대로 찍어 주지 못해 미안했다.
유럽여행에서는 볼 것도 살 것도 많다.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이를 챙기는 것은 무리다. 모두 일정이 마무리 단계에 오자 바빠졌다. 선물을 챙겨야 하고, 여행기의 메모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강박에 잡힌다. 오랜 여정에 몸은 피곤하여 신경이 곤두서있다. 누가 무엇을 샀는지도 경쟁이 되어 큰 관심거리이다.
도사처럼 생긴 미니버스 기사가 일찍부터 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급해진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기는 어렵고, 화장실 표지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서 두리번거리니 눈치 빠른 안내 아가씨가 턱으로 가르쳐준다. 아무도 없는 곳에 전깃불을 일일이 커가면서 들어가는 기분은 묘했다.
우리와는 다른 잠금장치라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파리 공항에서는 안에서 덜거덕거리니 밖에서 김영중 선생이 열어 주었다. 그 짧은 시간이 길고 무서워서 진땀이 났다. 여행 중의 화장실 이용은 언제나 짝을 지어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보다 늦게 버스로 갔더니 누군가 로비의 소파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들고 와서 자리를 앞쪽에 잡아 놓았다. 여행 중에는 사소한 일에도 감사가 커진다. 대형버스를 넉넉하게 이용하다가 좁은 버스 안에서 얼굴을 가까이 맞대하니 더 정겨운 마음이 들었다. 로마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즐거운 표정들이다.